4佛敎儒家에 대한 인식

 

리치가 중국에 들어올 무렵, 명나라 말기의 불교는 깊이 중국화되어 있었다. 중국의 불교는 중국 고대의 社稷신앙을 방불하는 사원과 탑파를 세우고 농사와 인간생활에 행운을 가져다줄 것을 약속했다.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비는 祭儀가 발달한 것도 효도를 중시하는 중국사회의 관습에 적응한 것이었다. 중국식 經典도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고, 敎理의 발달도 중국사상사의 흐름 안에 뚜렷한 위치를 키워 왔다. 수많은 사찰과 승려를 가지고 불교는 중국 최대의 신앙조직을 이루고 있었다.[266]

[266] 명말 불교계의 상황을 살피는 데는 Wm de Bary,(ed.) The Unfolding of Neo-Confucianism (New York, 1975)에 실린 K Araki, "Confucianism and Buddhism in the Late Ming", P-y Wu, “The Spiritual Autobiography of Te-ch‘ing", K Greenblatt, "Chu-hung and Lay Buddhism in the Late Ming" 등 논문과 荒木見悟, <明末宗敎思想硏究>(東京, 1979) 215-274, K Ch'en, Buddhism in China: A Historical Survey (Princeton, 1964) 434-454 등이 참고가 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불교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불교에 비해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리치 등 선교사들이 중국 사상전통의 대표적 요소로 인식한 것은 불교였다. 리치는 老子<道德經>을 남긴 사실도 몰랐고,[267] 교리도 불교와 대동소이한 것으로만 이해했다: “天尊에 덧붙여 이 교파는 3大神을 만들어 놓았는데, 교파의 창시자 老子가 그 중 하나다. 이처럼 우리가 살펴보는 두 교파가 모두 자기 식 三位一體를 만들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거짓의 원흉(악마)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 포상과 징벌의 장소도 이야기하지만, 그런 장소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앞에서 소개한 교파(불교)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없다.”[268]

[267] <中國誌> 102: “그는 자기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宗派를 따로 열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268] <中國誌> 102-103.

그리고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마카오에서 준비를 할 때 예수회사들이 일본에서 겪은 경험을 참고자료로 물려받았는데, 일본 사상계에서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큰 비중으로 인해 중국에 들어가는 선교사들의 선입관 속에 불교가 크게 자리 잡게 되기도 했다. 또 중국인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도 불교와 같이 西方에서 전래하는 것이었고, 영혼의 불멸, 천당과 지옥 등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리도 많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불교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치는 後漢 明帝가 꿈에서 새로운 종교의 계시를 받고 그 계시에 따라 天竺에 사절을 보내 불교의 경전을 얻어왔다고 하는 중국 불교 전래의 통설을 소개한 다음 다소 독선적으로 보이는 해석을 덧붙였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일이다. 사도 도마가 인도 남부의 저지대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그 시기에 사도 바돌로매는 인도 북부, 곧 힌두스탄과 그 주변국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의 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에 대한 소문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 그들은 이 가르침에 접하고 싶고 배우고 싶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절들의 실수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절단을 맞이한 사람들이 복음을 시기한 때문인지, 중국인들이 얻어온 것은 그들이 찾아 나섰던 진리가 아니라 거짓된 경전이었다.”[269]

[269] <中國誌> 94.

 

리치를 비롯해서 처음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승려의 복장을 취했다. 종교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가장 비슷한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일본에서 승려가 일반인들에게 존중받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승려들이 아무런 힘도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승려의 복장을 버리고 선비의 옷을 입게 해 줄 것을 상급자들에게 청원했다.[270]

[270] <中國誌> 258-259.

처음 선교사들이 승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중국 승려들은 선교사를 자기네와 비슷한 교파에 속한 동료로 간주하고 우호적 태도를 취한 것이 분명하다. 리치와 루지에리에 뒤이어 1585년에 중국에 들어온 안토니오 알메이다(1556-1591)1585년에 유럽으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경험을 적은 것이 있다:

 

“15일 우리는 Gaoling의 마을에 도착함으로써 이 강을 따라가는 旅程을 끝내고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는 어쩔 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한 우상숭배자[불교 승려]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초청해 주었다. 우리는 커다란 神壇들이 갖춰져 있는 그의 집에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을 읽으며 佛供을 드리고 있던 많은 승려들이 우리에게 정중한 환영의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승려들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를 초청한 승려에게 책 한 권과 몇 가지 기도문을 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우리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주었다.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승려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고, 매일 저녁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온다. 지금까지도(오늘은 28) 우리를 찾아오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가로막을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손님들에게 우리 祭壇을 보여주는데, 그러면 그들은 우리 주님의 에 경의를 표하곤 한다. 신분 높은 관리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찾아왔는데, 우리가 떠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는 둥 기뻐들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관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장례식에 참례하도록 사람을 보내 초청했다. 그러나 (루지에리) 신부는 천주님을 받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기도가 효과가 없다고 대답했다.”[271]

[271] <中國誌>(불문판) “Introduction": 32에서 재인용.

 

선교사들이 처음 일반 중국인들에게 불교의 일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던 정경은 肇慶에 도착할 당시에 관한 리치의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肇慶에서 선교사들이 크게 의지하고 있던 知府 王泮이 선교소에 걸어놓도록 써 준 편액에도 僊花寺西來淨土라고 되어 있어서[272] 일반인들의 인식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청하지 않는데도 제단에 태울 향을 가져오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제단 앞에 밝힐 등불의 기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활비를 도와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그리고 知府에게 요청하면 불교 사찰에 나눠주는 땅을 몇 자락 얻어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신부들은 새로 세운 교회의 자유를 관부의 권력에 종속시키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결정했다.”[273]

[272] <中國誌> 159.

[273] <中國誌> 155.

리치는 불교가 기독교와 서양 고대사상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갔다고 주장했다:

 

이 두 번째 교파(불교)를 만든 사람들은 서양의 우리 철학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생각을 빌려간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들은 4원소를 인식했는데, 중국인은 어리석게도 여기다 원소 하나를 덧붙였다. 데모크리토스와 그 학파처럼 그들은 複數 세계의 존재를 믿는다. 영혼 윤회의 교리는 피타고라스의 주장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거기다 주석을 잔뜩 붙여 더 애매하고 막연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들의 철학은 서양의 사상을 빌려갔을 뿐 아니라 예수 복음의 빛 한 자락까지도 정말로 얻어 본 것 같다. 이 두 번째 교파 교리에는 세 의 서로 다른 신이 하나의 神格으로 융합된다고 하는 일종의 삼위일체설이 들어 있다.[274] 그리고 천당에서 착한 사람이 포상 받고 악한 사람이 지옥에서 징벌된다는 이야기도 한다. 獨身을 대단하게 내세우는 것을 보면 결혼을 일체 배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탁발행각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 관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이단적 전례 가운데도 우리 신앙의식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한 예로, 우리 그레고리 聖歌와 거의 똑같은 讀經방식이 있다. 그들의 사원에는 聖像이 있으며, 전례에 입는 복장은 우리 法衣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이 기도문 속에 거듭 뇌이면서도 그 뜻을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말로 ‘Tolome’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사도 바돌로매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의 종교에 빛을 더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275]

[274] , , 三寶를 말하는 것 같다.

[275] <中國誌> 98-99.

 

이처럼 유사점이 많고, 또 선교사들을 처음에 친밀하게 받아들였던 불교에 대해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선교사 측에서는 기독교가 신자를 늘려가는 데 대한 불교 측의 질시가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흔히 말해 왔다. 그러나 앞에 인용한 알메이다의 편지에 보이는 것처럼, 첫 접촉에서 불교 승려들이 평화적인 태도를 보인 데 비해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태도가 훨씬 더 도발적인 것이었다. 韶州에 있을 때 개종자들의 우상파괴를 묵인 내지 조장한 결과 주민들과의 분쟁을 일으킨[276] 이래 새로운 신자를 거둘 때마다 그 신앙의 첫 번째 증거로 가지고 있던 우상을 선교소로 가지고 와서 불태우도록 했다.[277]

[276] <中國誌> 247-248, 23.

[277] <中國誌> 469(2-6), 瞿太素의 경우를 비롯해서 개종자들이 우상을 가지고 와 불태운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발적인 행위처럼 기록해 놓았지만 세례에 앞서는 행사로 도식화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일본에서 기리시단탄압의 요령으로 혐의자에게 聖畵를 밟게 한 것(踏繪)이 연상된다.

18세기 초 서학서에 접한 조선 학자들 가운데서 리치가 전파하려 한 기독교와 그가 공박해 마지않은 불교가 비슷함을 지적한 논설이 재미있게 보인다: “그들이 天堂이니 地獄이니 靈魂不滅이니 하는 것은 佛家에서 말하는 것과 같음이 분명하며 우리 儒家의 책에서는 일찍이 그런 이야기가 보인 일이 없다. 佛家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儒家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佛家 논설의 찌꺼기를 지저분하게 끌어 모아 놓고는 도리어 斥佛의 명분을 내세우니 리치와 그 패거리들은 우리 儒家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佛家에 대한 반역자이기도 하다.”[278]

[278] 愼後聃 <西學辨>(李晩采 編 <闢衛編> 소수): 彼天堂地獄精靈不滅之說, 明是佛氏之說, 而未嘗略見於吾儒之書. 吾未知異於佛氏者, 何事也; 同於吾儒者, 何事也. 區區綴拾乎佛氏之餘論, 而反以斥佛爲名; 瑪竇諸人, 不徒吾儒之罪人, 抑亦佛氏之反賊也.

리치는 불교가 기독교의 내용을 훔쳤으리라는 주장을 <天主實義>에도 펼쳐 놓았다. 中士後世의 천당, 지옥을 말한다면 바로 불교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함에 천주교는 오래된 인데, 釋氏西民이므로 필히 그 을 훔쳐들었을 것이다. 무릇 私道를 전하려 함에 있어 옳은 말을 몇 가지라도 끼워놓지 않는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釋氏가 태어나기도 전에 천주교인들은 이미 이 설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했다.[279]

[279] <天主實義> 129-130: 천주교인이 석가보다 먼저 천당, 지옥의 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리치의 말에 대해 영문판 번역자는 여기 말하는 천주교가 유태교를 포함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142 5, 6) 불교의 연원을 잘 알지 못한 리치의 잘못을 덮어주려는 견강부회로 보인다. 리치는 불교 성립을 중국에 전해진 後漢 때와 별 차이가 없는 시기로 보았다. 리치가 천주교의 이름으로 유태교까지 포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리치가 중국에 귀화한 지 오래되는 開封의 유태인들과 연락을 가져서 그쪽 제사장이 리치에게 만일 돼지고기 먹는 것만 삼가겠다면 유태교의 높은 승직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中國誌> 107-109.

<天主實義>를 비롯한 리치의 저술에 나타난 불교 공격은 우상숭배라는 초점에 모아져 있어서 실질적인 교리 비판이라고 하기에 매우 빈약하며, 리치의 불교 이해 수준이 피상적인 데 그쳤다는 인상을 준다. 구체적으로 파악된 교리는 四生六道, 人魂輪廻”, “殺生者靈魂不昇天堂”, “及地獄充滿之際, 復得再生于人間”, “禽獸聽講佛法, 亦成道果등으로 모두 윤회설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 것이다.[280]

[280] 이 항목들은 같은 책 제4, 5편에서 논의된 것들로 497단에 모아져 있다.

리치가 중국선교단장으로 임명된 것은 1597년의 일이지만, 이미 1588년 루지에리가 중국을 떠난 뒤로는 실질적 지휘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선교단 방침을 현장에서 결정하는 일차적 책임을 가지게 된 후 리치가 제일 먼저 주력한 일은 儒家 경전을 학습하고 그 사상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1590년대 초, 韶州에 머무르는 동안 집중적 학습을 쌓아 南昌으로 옮아갈 무렵까지는 西士또는 西儒로서 행세할 학식을 갖추게 되는데, 이와 아울러 補儒論의 방향도 잡혀서 1596년까지 초고를 완성하는 <天主實義>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그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서 이해하고자 했던 儒家사상에 대해 그가 어떤 경위를 거쳐 어떤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자신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겠다.

儒家 학술의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四書五經에 대한 리치의 해설을 보면 그의 이해가 무척 피상적이고 잘못된 점까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중국 철학의 제왕으로 불리는 孔子는 더 앞의 철학자들이 쓴 글로 책 네 가지를 편찬하고 자기 책 하나를 저술했다. 그 다섯을 五經이라 불렀는데, 그 속에는 올바른 생활을 위한 윤리의 원칙들, 정치의 운용을 위한 교훈들, 옛 사람의 관습과 모범, 그들의 典禮祭儀, 그리고 그들의 詩歌를 비롯한 여러 종류 자료들이 들어 있다. 이 다섯 책 외에 이 위대한 철학자들과 그 제자들이 남긴 교훈을 특별한 순서 없이 묶은 책이 하나 있다. 그 교훈 대부분은 인간 理性의 빛에 입각해서 개인, 가정, 그리고 국가의 德行을 조장하도록 올바른 도덕적 규범을 정의한 것이다. 이 책은 앞에 말한 네 책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것으로, ‘四書라 불린다. 공자가 만든 아홉 책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이며, 다른 모든 책은 상형문자로 쓰인, 장래 중국의 이익과 발전을 위한 도덕적 교훈의 집합체인 이 책들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281]

[281] <中國誌> 불문판 97. 영문판: 33에는 인용부분 맨 앞에 공자가 선현들의 글로 책 네 가지를 편찬한 외에 자기가 다섯 권의 책을 지어서 오경을 만들었다고 했다. 중문판: 25-26에는 이곳저곳 얼버무린 흔적이 있고 빼 놓은 부분도 있어서 리치의 오류가 명백히 나타나지 않도록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정리한 자료에서 이 정도 이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리치가 중국 고전에 해박한 사람으로 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공격하면서 儒家를 옹호하는 성의는 가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리치가 南京에 자리 잡을 무렵 불교에 심취한 李汝貞이라는 名士가 있었는데, 리치가 그를 찾아가 토론을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어떤 자리에서 李氏가 불교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불교를 싫어하는 관리 한 사람이 나서서 리치와 같은 외국인까지도 공자를 존경하고 불교를 배척하는데, 어찌 중국의 士大夫로서 공자를 저버리고 외국에서 들여온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느냐고 공박하였다 한다.[282] 이 관리는 나중에 선교사들이 집을 구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283]

[282] <中國誌> 338-339.

[283] <中國誌> 345-346.

리치는 중국의 고대사상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유럽에 알려져 있는 어떤 이교도 가운데도 상고시대의 중국인들보다 잘못을 적게 저지른 사람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중국 역사가 시작된 가장 첫 기록에서부터 그들은 皇天上帝’, 또는 天地를 지배하는 권능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 유일한 최고의 존재만을 인식하고 경배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옛날 중국인들은 하늘과 땅이 모두 영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공통된 神明을 최고의 神格으로 경배했던 것 같다. 山川方位를 대표하는 여러 귀신은 이 최고 神格의 하급자로서 또한 경배되었다. 그들은 또 理性의 빛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모든 일은 이 理性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세웠다. 로마, 그리스와 이집트 사람들이 과 수호자들을 키워낸 것과 같이 중국인들이 이 최고의 존재로부터 의 괴물들을 이끌어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284]

[284] <中國誌> 93.

 

이런 견해가 리치의 적응주의와 補儒論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옛날부터 理性의 빛을 통해 진정한 구원, 唯一神에의 신앙을 향하는 태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 개종을 위해 그들의 전통적 정신세계를 통째로 깨뜨릴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신앙에 적합한 그들의 전통을 북돋워주는 것이 개종을 위한 효과적인 길이라고 하는 것이 리치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말년까지 지켜지고 있었던 것은 1609년 마카오의 순찰사 파시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나 있다:

 

맨 처음부터 말하자면 상고시대에 이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을 우리[유럽인들] 못지않게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1500년간 그들은 거의 우상숭배를 행한 일이 없으며, 간혹 행한 경우도 이집트나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처럼 저열한 것이 아니어서, 귀신 중에는 극히 덕성이 높고 善行으로 알려진 것들도 있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학자들이 보는 가장 오래된, 따라서 가장 권위 있는 책들을 보면 하늘과 땅, 그리고 이 兩者의 주재자만이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책들을 세밀히 검토해 보면 이성의 빛에 어긋나는 내용은 거의 없는 한편 이에 합치하는 것이 많으니 그 자연철학자들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285]

[285] <書信集> 413-414.

 

여기서 天地(兩者)의 주재자라는 표현은 리치가 만들어 넣은 것 같다. 중국인들의 칭찬을 인용할 때나 중국 고전에서 편리한 내용을 따올 때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을 끼워 넣은 것들은 리치의 글을 받아보는 당시 유럽인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인데, 오늘날 그의 기록을 검토함에도 조심스럽게 감안할 일이다.[286] <中國誌>에서 儒家사상을 소개하는 글은 補儒論的 동기가 드러나 보이는 중국 고대사상에 대한 찬양과 정통적인 儒家에는 우상숭배가 없다는 해명으로 채워져 있다.[287]

[286] 이 점은 Gernet의 전게서: 25에 지적되어 있다.

[287] <中國誌> 93-98.

 

스스로의 양심의 빛에 따라 구원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주어진다고 신학자들이 말하는 그 특별한 도움을 옛날 중국인들이 받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고대중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구원을 찾게끔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으리라고 희망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4천년 넘는 그들의 역사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그 역사는 자기 자신들을 위한, 그리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善行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특출한 지혜로 충만한 책들을 보아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책들은 인간의 덕성 함양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의견들로 채워져 있다. 바로 이 측면에서 이들은 우리[유럽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에 비해서도 아무 손색이 없다.”

 

공자는 그들에게 철학의 제왕이며, 그들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공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우상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천하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의 神格을 믿는다. 다른 귀신들도 인정은 하지만, 권능이 제한되어 있으며 극진한 경배를 받지도 못한다. 진정한 儒者는 우주 창조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儒者들은 하나의 궁극적 神格을 인식은 하면서도 그를 위한 神殿은 짓지 않는다. 그에게 예배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지정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예배를 주도할 성직자가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최고의 에게 祭物을 올리고 예배하는 전례의 책임은 황제에게만 귀속된다.”

 

그들 자신도 말하는 것처럼 이 儀式은 살아 계신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마찬가지 뜻으로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죽은 이들이 무덤 위에 놓이는 음식을 정말 필요로 한다고 진정으로 믿지는 않지만, 그분들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음식을 陳設하는 관습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무덤 위에 음식을 진설하는 이 관습은 우상숭배로 비난받을 염려도 없을 뿐 아니라 미신의 냄새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조상들을 으로 생각지도 않고, 조상들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빌거나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儒者들의 교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모두들 바라는 목적은 이 나라의 평화와 질서다. 또한 그들은 가정의 경제적 안정과 개인의 도덕적 훈련을 추구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교훈은 명백히 이런 목적들을 위한 것이며, 양심의 빛이나 기독교의 진리와도 잘 부합한다. 그들의 글 가운데는 자비심의 두 번째 가르침을 풀어 보이는 것이 있다: ‘네가 남에게 해 받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

 

이처럼 儒家를 찬양하고 기독교와의 접근 가능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송대 이후의 근세 儒學을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오늘날 儒者들이 제일 많이 받아들이는 이론은 약 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에서 따온 것 같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전 우주가 하나의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주는 하나의 몸으로써 하늘과 땅, 사람과 짐승들, 풀과 나무들, 그리고 네 가지 원소 모두와 함께 이어져 있으며,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는 모두 이 몸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이 존재의 통일성을 통해 그들은 사랑이라는 것이 개별적 존재들을 묶어주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과 한 몸으로 태어났으므로 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한다. 우리가 이 철학을 반박하려 함에는 理性만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철학의 모든 근거를 만들어 준 옛날 중국 철학자들의 증언을 활용하려 한다.”[288]

[288] <中國誌> 95.

 

儒家사상에 대한 리치의 인식범위를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한문으로 펴낸 교리서들, 특히 <天主實義>를 통해서다. 그는 <天主實義> 2편에서 우리의 天主는 곧 중국의 말로 上帝.”[289], “우리의 天主는 곧 옛 經書에서 말하는 上帝.”[290] 거듭한 다음 이를 뒷받침하는 중국 측 전거로 <中庸>, <詩經>, <周易>, <禮記>, <書經>에서 십여 개 구절을 인용했으나, 대부분은 원문을 나열해 놓았을 뿐, 해설을 붙이지 않았는데, 다만 <周易>帝出于震구절에 무릇 라 함은 하늘을 일컬음이 아니다. 푸른 하늘에 八方이 모두 들어 있는데, 어떻게 그 하나에서 나올 수 있는가?”[291] 하고 <書經>乃命于帝庭, 敷佑四方에 대해 上帝에게 이 있다 하니 푸른 하늘을 가지고 上帝를 삼지 않는 것임을 곧 알 수 있다[292]고 붙여놓은 것은 철학적 깊이 없이 말꼬투리를 잡는 수준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289] <天主實義> 103: 吾天主 卽華言上帝.

[290] <天主實義> 104: 吾天主 乃古經書所稱上帝也.

[291] <天主實義> 106: 夫帝也者 非天之謂 蒼天者 抱八方 何能出於一乎.

[292] <天主實義> 108: 上帝有庭 則不以蒼天爲上帝可知.

<天主實義> 6장의 시작에서 中士의 질문 중에 다만 천당과 지옥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 정말로 天主의 가르치심인지 모르겠다. 무릇 를 취하고 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막는 것은 곧 를 좋아하고 를 싫어하는 것일 뿐이지, 을 좋아하고 을 미워하는 正志일 수 없다.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은 사람들을 가르침에 를 말하지 않고 仁義를 말하였을 따름이다. 군자가 善行을 하는 데 다른 뜻이 없어야 하는데, 하물며 利害에 뜻이 있을 수 있는가?”[293] 한 것은 리치가 이해한 바 儒家에서 말하는 善行의 동기를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293] <天主實義> 321: 但以天堂地獄爲言 恐未或天主之敎也 夫因趣利避害之故爲善禁惡 是乃善利惡害 非善善惡惡正志也 吾古聖賢敎世不言利 惟言仁義耳 君子爲善無意 況有利害之意耶.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死後賞罰과 같은 구체적인 동기가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는 피상적인 차이점을 인식했을 뿐, 儒家 윤리의 고유한 원리들에 대한 이해는 보여주지 않는 점이 지적된다.[294] 바로 이 점을 깊이 지적한 대목을 18세기 조선 학자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94] <天主實義 영역본> “Introduction": 48-49.

 

이제 그 공부를 하는 자들은 天賦을 온전히 하지도 못하고 固有을 충실히 하지도 못한다. 天敍을 살피지도 못하고 當行를 다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받든다, 두려워한다, 하는 것은 다만 禍福修短이 하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니, 그 받든다고 하는 것도 誠心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요, 그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도 誠心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을 바라고 를 꺼리는 것일 뿐이다. 그 공부라는 것이 전적으로 利心에서 나온 것이니 聖賢誠心으로 對越하는 것과 더불어 말할 것이 되지 못함은 대개 알아볼 수 있다. 이 퍼질 경우 천하가 를 좇는 도도한 흐름을 되돌릴 길이 없을 것을 나는 내다본다.”[295]

[295] 愼後聃 <西學辨>(李晩采 編 <闢衛編> 소수): 今爲彼學者 不能原其天賦之性 而充其固有之德矣 又不能察其天敍之倫 而盡其當行之道 其所以敬且畏之者 徒以禍福修短之係乎天 則其所謂敬之也 非誠心而敬之也 則其所謂畏之也 非誠心而畏之也 求福而已 禍而已 其學之全出於利心 而不足與論於聖賢對越之誠 槪可見矣此說行 吾見天下之滔滔趨利不可返也.

 

리치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와 유가사상을 접근시키려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것이 <天主實義>였다. 이 책에 대해 자랑스러운 마음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우상숭배자들에게 옆구리의 가시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그들의 공허한 교리를 방어할 모든 수단을 빼앗아 버린 때문이다. 한편 儒家 측으로부터 공격받을 염려도 없었으니, 그러려면 자기 자신의 입장을 공격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儒家의 사상 속에 아무것도 없다고 처음부터 인식한 사람들에 의해 신앙이 지켜지게 된 것은 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세 교파를 한꺼번에 상대로 싸우게 되었더라면, 누적된 권위에 억눌려서든 중과부적에 의해서든 꼼짝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296]

[296] <中國誌> 449.

 

13절에서 三淮화상과의 논쟁 내용을 소개했는데, 三淮의 주장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엄밀히 살펴보면 佛家의 고유한 사상이라기보다 明代 儒家心學으로 보인다. 近世儒學佛敎에 오염되었다고 리치가 비판하면서 先儒를 존중한 것은 佛敎 배척을 빙자하여 중국의 재래사상 가운데 기독교 도입에 저촉되는 요소들을 묶어서 공격하는 뜻이 들어 있었던 것인데, 佛僧三淮를 상대로 하여 실제로는 心學을 공격한 일에서도 이런 뜻을 알아볼 수 있다.

리치의 佛敎 인식은 佛敎를 공격하려는 목적의식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중국인의 관점에서 佛敎와 기독교가 비슷한 종교로 비쳐지는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 두드러진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그는 佛敎가 기독교에서 파생된 면이 있으나 악마에 의해 변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佛敎의 성립시기를 중국에 전해졌다고 하는 後漢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불교 공격이라는 전략적 목표 때문에 대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제약을 받은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儒家思想에 대한 이해 역시 전략목표에 의해 제약받은 면이 많았다. 儒家思想에 대한 그의 인식은 補儒論을 위해 필요한, ‘先儒後儒를 구분하는 틀에 얽매여 도식화되었다.[297] 그가 존중한 先儒唯一神으로서 上帝를 받드는 사상이었으며, 이 시각에서만 儒家사상을 고찰하다시피 했다. 太極,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은 모두 後儒의 잘못된 학풍으로 간주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리치의 補儒論易佛論儒敎佛敎의 투철한 인식 위에서가 아니라 피상적 지식만으로 먼저 얽어졌고, 구체적 인식은 나중에 그 틀에 맞추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97] 리치가 세운 補儒論의 틀에 대해서는 方豪, 明末淸初天主敎適應儒家學說之硏究(<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 J Sainsaulieu, "Le Confucianisme des Jésuites" (Actes du Colloque International de Sinologie, Chantilly, 1974. Paris, 1976) 등에 잘 정리되어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