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12. 17:28

 

몇 달 전 "글 장사를 접으며"란 글을 적은 일이 있다.

http://orunkim.tistory.com/1600#comment11600948

그 글에 OCB님이 붙인 댓글이 어제 눈에 띄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탓일 거라는 추측이다.

 

다시 생각에 잠겨본다. 1년여 전 "서세동점의 끝"이란 책을 구상하면서부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몇 해 동안 해 온 한국근현대사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는 뜻에서 동아시아의 근대를 내 관점으로 정리하려는 것인데,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책 한 권 인세 수입으로는 두 달 생활비도 바라보기 힘들다. 그래서 처음으로 "공적 자금"을 쳐다보게 되었다.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오른 것이 방송대출판부 교양서 공모였다. 당선되면 계약금을 2천만원이나 준다니 내 검소한 생활로는 1년 버틸 수 있다. 가작에 입선만 해도 5백만원이니 단골 출판사들에 바라는 것과 수준이 다르다.

 

그래서 냈는데, 두 달 지나 발표 때가 되었을 때, 발표를 연기한다고 한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1주일 지나 발표가 났는데, 가작에도 못 들었다.

 

가작에도 못 들어? 워낙 조건이 좋으니 엄청 빼어난 응모작이 더러 들어올 수도 있겟지만, 가작에도 못 들어? 이건 말이 안 된다.

 

어이를 잃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방송대출판부 직원이라며 내 훌륭한 응모작이 낙선된 데 유감을 표하고는, 공모와 관계없이 내 기획안으로 계약을 맺고 싶다고 한다. 가작 수준의 계약조건으로 하자는 것이다.

 

다른 출판사의 제안이라면 즉각 달려가 계약을 맺을 조건이다. 하지만 정문으로 집어넣었던 응모작을 뒷문으로 다시 넣을 수야 있나.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출판사와 신뢰를 갖지 않고는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사양하고 말았다.

 

그 기획안을 갖고 다른 출판사에서 내려고 의논을 하는데, 참 힘들다. 다들 그런 책 내고 싶다고는 하는데, 주머니 사정이 다들 빡빡하다. 그런 참에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을 알게 되었다. 거기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적은 소감이 몇 달 전 글이다.

 

"블랙리스트" 얘기가 이번에 나오면서 참 나쁜 짓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이해하는 데 "서세동점의 끝"을 둘러싼 내 경험이 참고가 될 것 같아서 털어놓을 생각이 들었다.

 

두 차례 낙방에서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내 공부 제대로 하는 데만 몰두해 온 사람이다. 공부가 어느 정도 틀이 잡혔을 때 저술활동을 시작했고, 예상보다 큰 독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공부의 외형적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신이 나서 원래 공부 방향을 놓아두고 한국근현대사 정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의 마무리 단계에서, 처음으로 제도적 지원을 받아볼 마음을 먹었다가 물만 먹고 말았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사회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지만, 내 정체성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학인으로서 내 입장에는 한국인, 동아시아인, 그리고 세계인의 입장이 겹쳐져 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은 한국인 입장에 치중해서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글을 써왔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한국사회의 제도적 지원 모처럼 쬐끔 바라보다가 딱지를 맞고 보니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한국사회는 한국인으로서 내 노력을 평가해 주지 않는구나."

 

우수출판콘텐츠에 낙방한 뒤 저술작업에 매진해 온 지난 몇 해를 되돌아봤다. 내 공부 성과를 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데는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한국 독자에게 발표한다는 목적에 너무 얽매여 내 공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많이 벗어나 있었다. 말하자면 각론에 몰두하면서 총론을 소홀히 해온 셈이다.

 

각론에 집중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길은 아니다. 공부 성과에 대한 구체적 반응에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위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그런 반응을 얻기에 그리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고 있었다. 내 글 반가워해 주는 독자들의 개인적 반응에 비해 책 판매량에 나타나는 사회의 총체적 반응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제도적 지원을 바라본 두 차례 시도에 실패하자 이건 너무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조언을 받아들일 자세가 안 된 상대에게는 아무리 좋은 조언도 낭비다. "들어야 할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은 사람을 버리는 것이고 들으려 하지 않는 말을 해주는 것은 말을 버리는 것"이라고 공자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제는 한국사회 아닌 인류사회를 상대로 말하기로 생각을 돌렸다. 총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를 해나가면 한국인, 동아시아인, 그리고 세계인의 입장을 두루 위하는 공부를 쌓아나갈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그 동안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프레시안에 글을 싣던 것 같은 발표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시대가 아닌가. 옛날 학인들은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 후세를 바라보며 공부를 하고 글을 썼다. 그에 비하면,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지금 학인은 글값을 받지 못할 뿐, 읽을 사람들에게는 바로 보여줄 수 있는 길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 수십 권 책을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옮겨 왔는데, 이제 갚을 때가 되었다고도 하겠다. 한국인의 글 중 옮길 가치가 있는 것을 골라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다. 당장은 영어만 가능하지만 좀 더 노력하면 중국어도 가능하게 될지?

 

번역은 공부의 깊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넓게 읽으려는 강박에 많이 시달려 왔다. 앞으로는 못 봤던 새 글을 많이 찾아 읽기보다 읽었던 글 중에 생각할 점이 남은 글을 다시 뽑아 공들여 읽고 싶다. 옛날 학인들은 깊이 읽기를 위해 주석 작업을 했다. 내게는 번역이 주석과 같은 성격의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글 중에도 번역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보니 새로 음미할 의미를 꽤 떠올릴 수 있다. 내 글 옮기는 데는 저작권, 판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우선 작업 대상이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 떠난 한 분 선생님 글도 적합할 것 같아서 세밀히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번역을 생각하며 글을 살피려니 나라 밖에 내놓기에 적합한 글이 그리 많지 않다. 좋아하는 필자들 글도 그런 방향에서 바라보려니, 한국사회를 향한 글쓰기라는 조건이 너무 좁은 방향을 강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제도적 지원을 받는 데 실패한 것이 "블랙리스트"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그 문제가 밝혀지는 것을 보며, "이제 다시 응모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얼른 든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건 아니다. 김기춘, 조윤선 등 몇몇 사람 때문에 내가 좌절감을 느낀 게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편협성을 이용한 한 가지 책동을 일으킨 것 뿐이며, 그들의 책임이 드러나 바로잡혀질 수 있는 것은 그 한 가지 책동일 뿐, 사회의 편협성 자체가 아니다.

 

블랙리스트가 없어서 내가 약간의 제도적 지원을 누릴 수 있었더라면 "爲己之學"의 길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나 개인에게는 이것이 새옹지마가 될 것인지, 득실을 예단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게는 손실이 분명하다. 한국사회가 키워낸 한 학인이 한국사회에 직접 공헌할 길을 줄인 거니까.

 

블랙리스트 때문에 함께 좌절을 겪었을 많은 문화인 동료들 생각을 한다. 조그만 충성경쟁을 위해 벌인 일에 치어 과제와 진로를 놓고 고민에 빠져야 했던 사람들. 그중에서 나는 비교적 쉽게 빠져나갈 길을 찾은 축 아닐까? 젊은이들 중에는 다른 진로를 찾은 사람들도 있고 늙은이들 중에는 은퇴를 앞당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버티고 길을 지킨 사람들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자해행위가 가능한 사회라는 사실이 끔찍하다.

 

Posted by 문천

 

3절 중국의 文物社會에 대한 인식

 

앞 절에서 리치가 중국이라는 국가의 윤곽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리치의 중국 인식의 전체적 깊이를 더듬어보기 위해 중국의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던 질적 특징들, 그리고 중국인의 자기인식 근거인 역사에 대해 리치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리치 이전에 중국 역사를 유럽인에게 소개한 책으로는 1585년 나온 멘도사(Juan Gonzales de Mendoza)Historia de las cosas mas notables, ritos y costumbres del gran Reyno de la China가 있었다.[238] 아우구스티노수도사 멘도사는 1583년 그레고리 13세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책을 지었는데, 일본 선교의 대성공이 유럽에 알져지고 그 다음 선교지로 중국이 각광받고 있던 이 시기에 이 책은 굉장한 인기를 끌어서, 1600년까지 유럽 각국어로 수십 판을 거듭했다. 당시 유럽에 전해져 있던 거의 모든 중국에 관한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교황청이 뒷받침한 권위까지 겹쳐져서 18세기 말까지 중국에 관한 표준적인 참고서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었다.[239]

[238] Roma, 1585. 영역본으로 George T Staunton, ed, The History of the Great and Mighty Kingdom of China, and the Situation thereof (London, 1853-54)가 있다.

[239]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Chicago, 1965): 742-751.

멘도사의 이 책에 역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 역사를 다룬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유럽에 전해진 중국 관계 정보가 마카오에서 입수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중국 남부의 당시 사정을 알리는 데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이름들이 音譯되어 있지만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어 있어서 그 중에는 아직도 고증이 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점은 중국의 첫 임금이 기원전 2600년경부터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한 것인데, 이는 당시 통용되던 聖書연대기에 비추어 놀라운 일이었다.[240]

[240] E Van Kley, "Chinese History in 17th-Century European Reports" (Actes du Ille Colloque International de Sinologie, Chantilly, 1980. Paris, 1983) 196-197.

중국 역사의 길이에 관한 문제는 그 후 전례논쟁과도 맞물려 18세기까지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멘도사 이후 중국에 관한 정보 공급을 독점하다시피 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역사가 기원전 2600년경, 또는 그 전에 시작했음을 확인했지만 보수파 신학자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241] 리치 역시 비단 직조에 관한 기록이 기원전 2636년의 일로 전해진다고 하여[242] 중국의 상고사 기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241]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가 작성한 중국 역사서로 가장 널리 활용되어 온 마티니(Martino Martini 衛匡國, 1614-1661)Sinicae historiae decas prima res a gentis origine ad Christum natum in extreme Asia (Munich, 1658)에는 伏羲氏의 치세를 기원전 2952년으로 하여 이로부터 중국 역사의 서술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성서학은 노아의 홍수를 보통 기원전 2349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노아의 자손이라고 보는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양쪽 연대기 중 하나는 틀린 것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교황에게 청원하여 통용되던 불가타(Vulgate)대신 70人譯(Septuagint)성서를 1637년부터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았는데, 70인역판을 표준으로 하면 노아 홍수의 연대를 기원전 3천년 이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D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modation and the Origins of Sinology (Honolulu, 1985): 124-128.

[242] <中國誌> 6.

리치는 중국 역사의 내용에 대해서 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Hia’, ‘Than’, ‘Yu’, ‘Sciam’, ‘Cheu’, ‘Han’ 등 고대의 왕조 이름을 나열한 것이 있어서 중국 正史, , (?), , , 등을 그대로 음역해 놓은 것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왕조가 바뀔 때마다 나라 이름을 임의로 정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의 왕조는 Ciu()씨가 세워서 Mi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 정도의 기록밖에 없다.[243]

[243] <中國誌> 6-7.

 

중국 문명에 대한 리치의 인식에는 유럽의 기준에 얽매여 중국의 고유한 가치체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244] 그러나 중국 인쇄술에 대해서는 깊이 탄복하는 마음을 보여주는데,[245] 그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치 등 선교사들이 출판활동을 위해 인쇄술을 깊이 연구한 때문인 것 같다.[246] 실제로 리치가 서적의 간행을 선교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발전시킨 것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244] <中國誌> 22, “다른 면에서는 그렇게 독창적이고, 지구상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는 소질을 가진 중국인이 이런 (미술) 분야에서 형편없이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다른 나라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 음악이라는 것은 단조로운 박자를 두드려내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음계를 결합시킴으로써 변조와 和聲을 얻는 기술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책 79: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찾는 사람이 많지만, 중국의 그림이라는 것은 윤곽만 그리는 것으로, 색채를 쓰지 않고 검은 색만을 사용한다.”

[245] <中國誌> 20-21.

[246] <中國誌> 158.

중국의 물화 가운데 리치가 가장 탄복한 것은 도자기였다: “재질 측면에 있어서나 그 얇고 섬세한 제작기술 측면에 있어서나 유럽 도자기는 이에 비길만한 것이 없다. 가장 훌륭한 도자기는 江西省[247] 흙으로 만드는데, 이런 도자기는 중국 각지에 반출될 뿐 아니라 머나먼 유럽의 구석구석까지 수출되어서 화려한 겉보기보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극진한 애호를 받는다. 이 도자기는 아무리 뜨거운 것을 담아도 깨어지지 않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한번 깨어진 것도 놋쇠 철사로 묶어 놓으면 물을 담아도 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248]

[247] <中國誌> 영문판과 불문판에는 ‘Kiam'이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中國傳敎史>에 따른다.

[248] <中國誌> 14-15.

그 밖에 유럽인에게 신기하게 보이는 중국의 물산으로 대나무와 차, 그리고 옻칠을 소개했다:

 

이곳에 흔한 갈대의 한 종류로 포르투갈인이 ‘bamboo’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원통 모양을 한 것으로 무쇠처럼 단단하다. 다 자란 것의 둘레는 어른의 양손으로도 감싸 쥐지 못할 정도가 된다. 속이 비어 있고, 토막들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지만, 그 매듭이 몹시 튼튼해서 조그만 가옥의 기둥으로 널리 쓰일 정도다. 날씬한 줄기는 창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가 되는 등, 그 용도는 백 가지가 넘는다.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것이지만 워낙 많이 산출되기 때문에 전국의 수요에 응할 수 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목재라고 할 수 있다.”[249]

[249] <中國誌> 15.

 

어떤 종류의 덤불에서 딴 잎으로 마실 것을 만드는데,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근지역에서 ‘Cia’라고 불린다. 사실 똑같은 덤불들이 우리 유럽의 들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봄철에 잎사귀를 따서 그늘진 곳에서 말리고, 마른 잎사귀에서 우려낸 찻물을 식사 때도 마시고 친구가 찾아올 때 대접하기도 한다. 그런 때는 담소가 계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차를 권한다. 뜨거운 상태에서만 마시는데, 마신다기보다는 홀짝댄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씁쓸한 맛이 과히 나쁘지 않고, 자주 마시면 몸에 좋은 것으로 보통 생각한다. 찻잎에는 등급이 있는데, 한 근에 금 한 량 하는 것에서부터 두 량, 세 량 하는 것까지 있다.”[250]

[250] <中國誌> 17.

 

또 한 가지 세밀히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나무줄기에서 뽑아내는 특이한 성질의 수액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우유처럼 보이지만, 그 성질이 아교처럼 끈끈하다. 중국인들은 이 수액을 원료로 해서 산다라크 수지처럼 목재 표면에 바르는 물질을 만드는데, 이것을 ‘Cie’라고 한다. 이 물질을 목재에 바르면 온갖 색깔을 다 띨 수 있고 거울처럼 빛나는 광택을 가지기 때문에 눈으로 보기에 질감이 현란하고 손으로 만지기에 기분 좋게 매끈하다. 이런 표면처리는 튼튼하기도 해서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이 수액을 수출한다면 괜찮은 사업이 될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시도한 사람이 없다.”[251]

[251] <中國誌> 17-18.

 

제조기술에 대해 언급한 곳도 여러 군데 있지만, 양조, 건축, 제지 등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문화상의 차이 정도밖에 느껴지지 않는다.[252] 중국 공예기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나름대로 논한 것이 눈길을 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나라 사람들이 검소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어서 장인들이 더 좋은 가격을 얻기 위해 제작하는 물건에 최선,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인들의 정성은 보통 웬만한 수준의 물건으로 만족하고 마는 고객의 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장인들은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고객의 천박한 안목을 현혹시키는 얄팍한 재주만으로 넘어가려 든다. 이런 현상은 관리들이 물건을 주문하면서 물건의 진짜 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값을 치르는 경우에 더 심한 것 같다.”[253]

[252] <中國誌> 12, 16, 19-20.

[253] <中國誌> 19.

 

리치가 전한 중국의 사회상에는 어두운 면이 많다. 이것은 당시의 중국이 왕조 말기의 부패상태에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 입장에서 대상 사회의 문제점을 두드러지게 관찰하고 표현한 까닭 또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회에서 온 사람의 눈에 비친, 이해하지 못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지나치게 어두운 색조로 비쳐진 것도 있을 것이다.

리치가 가장 애달픈 감정을 담아 적은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여러 현상들, 매음, 축첩, 노예, 유아살해, 거세(환관을 만들기 위한), 형벌 등이다. 리치는 무엇보다 중국사회의 淫佚한 풍조를 개탄했는데, 더러는 성직자의 엄격한 관점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드러나 보인다. 早婚의 풍속까지도 리치는 음일한 풍조의 한 모습으로 보았다:

 

한 가지 문제는 음일한 풍조다. 여러 가지 물질을 풍부하게 가지고 누리는 이 여성화된 민족에게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다. 이 방면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너무나 절제가 없어서 성년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기다리지를 못한다. 심지어는 12(‘20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인 듯), 흔히 14, 5세가 되면 결혼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일찍 시들어버려서 평생토록 생식을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이 정도로도 부족해서인지, 그들은 첫째 아내를 버리고 재취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둔 채 첩을 두기도 한다. 몇을 두는지는 부양능력에 달린 일이지, 아무런 제한이 없다. 따라서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까지 처첩을 두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황제와 황족들은 몇 백, 몇 천의 첩을 두기도 한다.”[254]

[254] <中國傳敎史> 71, 불문판과 영문판에는 빠져 있는 부분임. 트리고의 번역에서 뺐던 것 아닐까 추측된다.

 

음일한 풍조에서 빚어진 또 하나의 현상은 아내를 취할 능력이 없는 남자가 여자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말하자면 비부쟁이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부모에게 팔려 노예가 되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개탄했지만, 유럽의 노예처럼 절대적 구속을 받는 신분이 아님은 리치도 인정하였다. 리치의 말이 기묘하게 들리는 것은 이들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의 노예로서 중국 밖으로 끌려간다. 그래도 적은 숫자의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사탄의 노예질에서는 벗어날 기회나마 가지게 된다며 중국인 노예의 약취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255]

[255] <中國誌> 86.

기독교 개종 여부를 노예 신분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한 것을 보면 리치는 중국인의 육신보다 중국인의 영혼을 더 아꼈던 모양이다. [“육신보다 영혼을 더 아꼈다는 표현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의 토론 중 배운 것이다.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을 놓고 토론자들의 이견이 첨예하게 맞설 때 사회를 보던 최석우 신부가 아마 주교님은 조선인의 육신보다 조선인의 영혼을 더 아끼셨던 모양이라는 멘트로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肇慶에서 선교사들은 마카오의 노예 탈출 방지에 한 몫 단단히 했다:

 

선교소 위치는 또한 마카오에서 도망하는 노예들에게 도움을 주기에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마다 몇몇 노예들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중국인들 틈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고자 했지만, 그렇게 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탈주자들은 보통 민병들에게 검거되었는데, 민병이 정규군보다 더 용감하고 전투력도 우수한 까닭은 포르투갈인과 왕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중국인이 두려워해 마지않는 일본인이나 카피르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인, 또는 자바 쪽 섬 출신으로, 중국인보다 훨씬 호전적인, 사납고 야만스러운 성질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민병들이 잡아 총독에게 데려간 탈주자 중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답게 처신하라는 훈계와 함께 방면해서 원 주인에게 돌려보낸다. 보통은 돌려보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 까닭은 중국의 죄수 노릇이 포르투갈인의 노예 노릇보다 훨씬 더 끔직스런 것임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쌍방이 모두 이득을 본다: 노예는 종교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노예주는 값비싼 노동력을 되찾는 것이다.”[256]

[256] <中國誌> 204.

 

가난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 문제는 유아살해였다. 특히 계집아이들이 이런 수난을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리치는 이런 행위가 남의 눈도 가리지 않고 버젓이 행해지는 것을 개탄했다. 불교의 윤회설로 인하여 인명을 가볍게 여기고 환생을 통해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리치는 분석했다.[257] 중국인이 자살을 많이 하는 까닭도 같은 데 있다고 리치는 보았다:

[257] <中國誌> 86-87.

 

앞의 것들과 비슷한 성격이면서도 더욱더 야만적인 풍습은 자살을 하는 것인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거나 큰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것보다도 더욱 어리석고 더욱 비겁한 동기는 미워하는 사람을 골려주기 위해 제 목숨을 끊는 일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공적인 장소나 증오하는 상대의 집 문 앞에서 목을 매다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그 밖에는 강물에 뛰어들거나 독약을 먹는 것이 많이 쓰이는 방법이며, 이유는 별별 사소한 것들이 다 있다. 자살자를 절망에 몰아넣은 죄로 자살자의 부모에게 고발당한 사람이 관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 자기 자신 자살을 저지르는 길 밖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관리들이 자살이 개입된 사건을 맡지 않으려 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며, 이로써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건져지는 것이다.”[258]

[258] <中國誌> 87.

 

유럽인의 눈에 또 하나 충격적으로 비쳐진 것은 환관을 만들 생각으로 사내아이를 거세시키는 일이 북중국에 많았던 사실이다.[259] 환관에 대한 리치의 태도를 앞 장 4절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불교 승려 다음으로 리치가 증오한 부류였다. 이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으리라고 보이는 것은 男娼의 존재인데, 트리고 판에는 옮겨져 있지 않다: “(妓女의 존재보다) 더 불쌍한 일이면서 이 민족의 타락 정도를 뚜렷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정욕을 발산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人性에 역행하는 길까지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률로도 금지되지 않으며, 모두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아,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들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고 도처에서 행해지는 데도 아무런 제지가 없다. 이러한 敗俗이 성행하는 北京과 같은 도시에는 몇 줄의 큰 거리에 妓女처럼 화장한 이 人妖들이 가득하다.”[260]

[259] <中國誌> 87.

[260] <中國傳敎史> 71-72.

중국 형벌은 원칙에 있어서는 온건하지만 실제 운용에서 가혹한 것으로 리치는 파악했다. 韶州에서 주민들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선교소에 침입한 주동자들이 처음에 知府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 년 이상 시간을 끌며 여러 차례 覆審을 거친 뒤 결국 가벼운 처벌로 끝나는 것을 보며(23) 중국의 刑事제도가 상당히 신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관리가 자의적으로 笞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의 운용이 가혹하게 될 수 있다고 고찰했다.[261]

[261] <中國誌> 87-88. 리치 가까이에서 笞刑을 맞은 끝에 죽음에 이른 경우가 적어도 세 차례 있었다. 같은 책 158-159: 마르틴이라는 이름의 한 패덕한 개종자가 사기행각 끝에 루지에리를 간통혐의로 誣告했다가 들통나서 태형을 당한 끝에 죽은 일. 같은 책 403: 북경의 고승 達觀이 황제에 대한 不敬 혐의로 태형을 받다가 죽은 일. 같은 책 489: 修士 黃明沙廣州에서 간첩 혐의로 심문받다가 죽은 일.

리치가 중국사회의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한 것은 중국인들이 진리를 존중하는 마음이 극히 옅고, 모든 행동에 눈치를 몹시 살피며,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문제였다.[262] 관리들이 언제 어떤 누명을 씌워서 재산을 빼앗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재산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고,[263] 심지어 황제조차 백성들 사이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황족들을 마치 무서운 적처럼 경계했다고 적었다.

[262] <中國誌> 88.

[263] <中國誌> 206: 총독이 선교사들을 肇慶으로부터부터 쫓아낸 것도 선교소 건물을 빼앗으려는 욕심 때문인 것으로 기록했다.

 

리치의 중국 문물에 관한 서술이 비단과 도자기 등에 치중된 것을 보면 무역의 관점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그 선교사업의 근거가 마카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카오 포르투갈인 사회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휘한 발리냐노의 黑船무역에 대한 관심이 중국 선교사업에도 연장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264] 그리고 유럽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도 필요한 서술 방향이었다.

[264] 발리냐노가 선교사업의 재정적 근거로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의 黑船무역에 깊이 관여한 것은 그 정당성을 놓고 교회 안에 논란을 일으켰던 일이다: C Boxer, Fidalgos in the Far East (The Hague, 1948): 91-136, G Elison, Deus Destroyed (Cambridge-MA, 1973): 102-106.

중국의 사회현상에 관한 리치의 기록을 보면, 선교사 입장에서 이교도의 사회를 더럽고 위험한 것으로 그리려는 의도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세밀히 그린 필치를 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이해력이 뛰어난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당시 중국인들의 퇴폐풍조와 앞 절 끝에 그린 치안의 불안 같은 것은 탁월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Spence가 리치를 종교인으로보다 “Renaissance Man”으로 부각시키는 관점에 이런 면에서는 상당한 공감을 느낄 수 있다.[265]

[265] J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New York, 1983)에 수시로 제기되는 관점이다.

 

 

Posted by 문천

 

2절 국가로서 중국 인식

 

리치의 시대 이전에 중국에 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서술이 유럽에 나와 있던 유일한 예가 마르코 폴로(1254-1324)<동방견문록>이다. 1275년경에서 1292년경까지 쿠빌라이 칸의 조정에서 지낸 마르코 폴로는 제노아 감옥에서 동료 수인인 작가 루스티첼로의 도움을 받아 25년에 걸친(1270-95) 아시아 여행의 기록을 남겼다.[216]

[216] 마르코 폴로와 ‘Cathay'라는 이름이 얽힌 곡절에 대해서는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Vol 1 (Chicago, 1965): 30-48 H Yule & H Bernard, (東亞史硏究會 編譯) <東西交涉史>(원제는 Cathay and the Way Thither, 東京, 1944) 284-384를 볼 수 있다.

<동방견문록>은 당시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인쇄술이 아직 없던 상황에서 수없이 많은 부수가 필사되었고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독자들은 이 책을 실제 여행에 근거를 둔 역사나 지리의 참된 정보라고 보기보다 허무맹랑하면서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았을 뿐이다. 이 책 원고는 열두 가지 언어로 무려 140여 종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어서 마르코 폴로의 원본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15세기 말엽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비롯한 항해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 책의 지리학적 가치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인 ‘Cathay’라는 나라가 실재하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고, 리치가 중국에 들어갈 때까지도 ‘Cathay’가 중국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만약 ‘Cathay’가 존재한다면 중국보다 북쪽이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결국 중국이 바로 ‘Cathay’라는 사실을 리치가 밝혀냄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기록의 사실성이 판명되고 지리적 자료로서 가치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리치가 활동한 시기에서 삼백여년 앞서 元朝 치하의 중국을 그린 이 책은 明朝 말기의 중국에 대한 안내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기록 방법도 학구적,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신기한 면모를 나열하는 흥미위주였고, 마르코 폴로가 傳聞한 내용 중에는 정확치 못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인식에 있어서 <동방견문록>의 한계는 저자가 한자문명에 정면으로 접하지 못한 점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인식하는 출발점이 된 것은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고 하겠다.

리치가 중국에 들어갈 당시 중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Cathay’를 중국 아닌 다른 나라로, 또는 실재하지 않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카테이가 바로 중국이라는 사실을 리치가 밝혀냄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곧 중국을 묘사한 것으로 인정이 되었고, 따라서 중국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타타르인이 중국을 정복할 때 타타르 왕은 북경에 수도를 두고 ‘Campalu’라고 불렀다. 베니스인 마르코 폴로는 타타르 지배시대에 이 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타타르인과 함께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기록을 통해 중국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타타르인이 부르는 대로 나라 이름은 ‘Catai’, 수도 이름은 ‘Cambalu’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에 포르투갈인이 아 나라의 명성을 유럽에 전할 때는 ‘China’라는 이름을 썼는데, 샴 지역 주민이 부르는 것을 따른 것 같다. 그리고 수도 이름은 모든 중국인이 부르는 대로 ‘Pekin’이라 했다. 그런 때문에 우리 지리학자들이 이웃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들을 머릿속에 그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름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217]

[217] <中國誌>(불어판) 392-394.

 

리치는 북경에서 西域 사람을 만날 때마다 카테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카테이가 중국의 또 하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하게 되어서 그 의견을 인도와 유럽의 상급자들에게 편지로 알렸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카테이를 찾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리치의 친구인 로돌포 아콰비바를 비롯해 몇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크바르 황제의 초빙으로 모굴 제국의 궁성에서 몇 해 머문 일이 있었다.[218] 모굴 제국 동북쪽에 카테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교회와 사제들이 있고 기독교 전례를 지킨다는 이야기를 이 때 이 선교사들이 들었다고 한다.

[218]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St Louis, 1986): 85-86, 150-151 M Harney, The Jesuits in History (New York, 1941): 150-151, 225-226.

예수회의 동인도순찰사 니콜로 피멘타는 이 이야기에 고무되어 벤토 데 고에스를 시켜 카테이를 탐사하게 했다. 고에스는 모굴 궁성에 여러 해 살면서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한 수도사였다. 리치의 추정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당시까지 중국에서는 기독교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카테이가 중국과 다른 나라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1603년 초에 인도를 떠난 고에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서북쪽 모퉁이의 肅州에 도달한 것은 1605년 말. 그 동안 고에스는 카테이가 바로 중국임을 확인했고, 선교사들이 북경에 자리를 잘 잡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고에스는 肅州에 머물면서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16073월에 중국인 교우 鐘鳴禮가 선교사들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는 중병에 걸려 있었다. 십여 일 후 그는 눈을 감았다. ‘카테이정체 확인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것이다.[219]

[219] <中國誌> 499-521.

리치는 중국의 위도를 북위 19(海南島)에서 42(만리장성) 사이, 경도를 카나리 군도 기준으로 동경 112(雲南省)에서 132(황해 연안) 사이로 기록하였다. 카나리 군도의 본초자오선은 현행 그리니지 본초자오선보다 17도 가량 서쪽이었으므로 리치의 경도 표시는 오늘날의 동경 95도에서 115도 사이로 환산되는 것이다.

위도 측정은 기술적으로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리치의 표시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경도 측정은 훨씬 복잡한 작업이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 작업조건의 제약 속에서 정확한 측정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220] 리치의 경도 표시는 실제보다 7도 가량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0] 이때 경도 측정은 행성들 사이의, 또는 행성과 달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측정하여 관측시각과 맞춰 계산하는 방법을 썼는데, 1499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개발한 것이다: D 부어스틴, (이성범 역) <발견자들>(원제는 The Discoverers, 서울, 1986): 384-385. 이 방법에는 정밀한 관측기구와 함께 정밀한 시계와 행성운동의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리치를 비롯한 초기 중국 선교사들은 일월식 시각을 측정하는 방법을 썼는데, 이 방법은 아무 때나 측정할 수 없는 대신 정밀한 관측기구(시계를 제외하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점이 편리한 것이었다.

경도가 전체적으로 7도 가량 치우쳐 있었던 것은 중국에 관한 당시의 지식수준에 비추어 큰 결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크기가 남북으로 23도의 위도에, 동서로 20도의 경도에 걸쳐 있다는 상당히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유럽인들이 의식하던 유럽의 크기보다 더 큰 것이었다.

중국 인구에 대해서는 1579년판 <廣輿圖>丁數58,550,801로 되어 있는 것을 인용하고, 이 숫자에는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징세대상이 아닌 군인, 환관, 왕족 등이 빠져 있다는 것을 해설했다. 1600년경의 중국 인구는 15천만 정도로, 같은 시기의 유럽 전체 인구는 1억 정도로 추산되는데,[221] 리치는 이런 윤곽을 대략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221] C. McEvedy & R.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New York, 1978)를 따름. 당시의 중국 인구에 대해 Ho Ping-t‘i,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 1368-1953 (Cambridge-MA, 1959)에는 비슷한 수치가 추정되어 있고 Mark Elvin,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Stanford, 1973)에는 2억 정도로 추정되어 있다.

일반적 사실에 관해 정보 부족이나 경험의 한계로 인해 균형을 벗어난 인식을 하는 곳도 많다. 예를 들어, 면화가 중국에 재배된 지 40년 밖에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비단 짜는 것이 유럽 상품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222] , 수로의 교통망에 탄복해서 배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223] 이것은 그가 여행하고 거주한 지역이 중국의 동부와 남부에 국한되어 있었던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지엽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국 인식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 이전 유럽인들과 다른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사실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222] <中國誌> 13.

[223] <中國誌> 12-13.

 

<中國誌> 16장에서 리치는 중국 정치제도의 특징을 서술했다. 중국에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이해수준이 확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永樂帝洪武帝의 조카라고 한다든가, 중국의 모든 법이 왕조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고 한다든가 하는 등 지엽적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통치체제의 윤곽은 상당히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리치의 서술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은 중국의 체제를 유럽과 대비시킨 곳들이다. 무엇보다 리치는 중국인들이 평화를 좋아하는 점을 주목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거의 무한한 영토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풍성하게 가진 이 나라, 주변의 어느 나라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추고 있는 나라임에도, 황제도 국민들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정복의 야욕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유럽 사람들과 아주 다르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남들이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가. 4천여 년에 걸친 중국 역사를 열심히 검토해 본 결과, 이런 정복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중국인들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 일도 찾아볼 수 없었음을 밝혀야겠다.”[224]

[224] <中國誌> 55.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전쟁에 출동하는 길이나 훈련에 나가는 경우만 예외다. 그리고 적은 수의 고급관원들은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릴 수 있다. 그들(중국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 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225]

[225] <中國誌> 58-59.

또 한 가지 유럽과 대비시켜서 리치가 감탄하는 것은 중국의 문민우위 전통이다: “모든 영역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학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군인들은 학인들을 존경하고 아무 여지없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따른다. 생도들이 스승의 꾸지람을 받듯이 군인들이 학인들에게 조련을 당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쟁에 관한 정책을 세우고 군사문제를 결정하는 일도 학인에게 맡겨져 있고, 황제는 군사지도자보다 학인의 의견과 권고를 더 귀담아 듣는다. 사실에 있어서 전쟁에 관한 의논에 참여하는 군사지도자의 수는 극히 적고, 그런 기회마저 극히 드물다. 이러한 정서의 근원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학문의 연마를 통해 고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확장에 거의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군사기술보다 학문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 있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226]

[226] <中國誌> 55-56.

질서정연한 관료체계가 또한 리치의 감탄을 자아낸다. 상하간과 동료 간의 엄격한 예절, 그리고 모든 관직의 3년 임기제와 고핵제도를 세밀하게 묘사했다.[227] 그리고 감찰을 맡은 廷臣들이 책임감과 용기를 가지고 고관이나 심지어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공익을 추구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 예로 만력 초에 태자를 폐위하려다가 廷臣들의 반대로 인해 중지했던 일, 稅監으로 파견된 환관들의 횡포에 지방 관리들이 몸을 던져 저항한 일 등을 적어 놓았다.[228]

[227] <中國誌> 56-57.

[228] <中國誌> 49-50, 343-344. 지방관의 저항을 기록한 데는 리치의 큰 협조자가 된 馮應京을 특히 염두에 두었을 것 같다.

그러나 황제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여자가 가장 우대를 받으며, 어느 여자에게서든 첫 번째 얻는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것은 황제와 황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 다 같이 적용되는 관습이다한 것을 보면[229] 嫡庶의 구분은 잘 모르고 있던 것 같은데, 아마 당시 태자의 자리를 놓고 갈등을 빚던 당사자 尙洵尙洛이 둘 다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던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한 것인지.

[229] <中國誌> 75.

황제제도의 이념에 대한 리치의 인식은 중국인의 표준적인 인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황제위는 우리 유럽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또는 다른 황족에게 세습된다. 고대의 임금 몇은 자기 아들이 통치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준 예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능한 임금을 견디다 못해 임금의 권능을 박탈하고 품성과 용기가 뛰어난 다른 사람을 그 대신 임금으로 모신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찬탈한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는 일반 중국인의 태도는 칭송할만한 것이다. 학인들 사이에는 烈女不嫁二夫, 忠臣不事二君이라는 말이 통한다. 이 나라는 워낙 넓어서 국경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먼데다가 해양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전 세계가 이 나라 안에 들어 있다고 상상한다. 역사가 생긴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그들은 자기 임금을 天子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을 절대자로 모시기 때문에 天子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230]

[230] <中國誌> 42-43.

리치의 기록 가운데는 당시 중국의 치안상태를 외국인의 눈으로 살핀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도시의 밤에는 수천 명 순라꾼들이 징을 치면서 정기적으로 거리를 돈다. 그러나 이렇게 순라가 돌고 성문을 꽁꽁 잠가 놓아도 밤도둑이 집을 터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 까닭은 순라꾼 자신들이 도둑들과 한통속이기 때문이며, 이런 도둑질이 자주 일어나는 결과로 순라꾼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다시 고용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도 경비를 서는 것이 집털이를 막기 위해서보다 적국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면 중국인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곳 중국에서는 큰 나라 한복판에서 더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밤마다 성문을 잠그고 열쇠를 守令이 보관해야 한다.”[231]

[231] <中國誌> 81-82.

리치의 기록에 중국 경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엄청난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감탄한 대목들이 있고,[232] 재정 규모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한 곳이 있다: “해마다 일억 오천만()을 넘는 租稅關稅, 그리고 그 밖의 歲入은 황궁의 寶庫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화폐로 통용되는 은자는 정부 금고로 들어가고, 미곡으로 납입된 조세는 정부 창고로 들어간다. 황제의 가족과 그 친척들, 궁성의 환관들과 일꾼들을 위한 풍족한 생활비가 모두 이 국고에서 지출된다. 이런 비용은 황실의 광영과 위엄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도록 넉넉히 책정되지만, 하나하나의 지출항목이 모두 법률로 결정되고 조절된다. 토목과 군사를 비롯해서 모든 정부기관의 비용이 이 국고에서 지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규모는 유럽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세입을 가지고도 온갖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는 국고의 수지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세금들을 부과하기도 한다.”[233]

[233] <中國誌> 45-46.

그밖에 중국의 물산이 다양함을 기록한 곳이 있다: “이 나라는 동서로나 남북으로나 워낙 넓은 영역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경계 안에 이처럼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종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또 없으리라는 것을 마음 놓고 장담할 수 있다. 다양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열대작물에서 온대작물, 한대작물에 이르기까지 농산물 종류도 다양하다. 중국인 스스로 작성한 地理誌들을 보면 여러 성 토지의 비옥도와 산출하는 다양한 작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감히 단언하건대, 유럽에서 자라나는 모든 작물이 똑같이 중국에서 자라난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설령 한두 가지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유럽에 없는 다른 작물들로 충분히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234]

[234] <中國誌> 10-11.

쌀을 비롯한 곡류, 그리고 각종 채소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사람의 식용 뿐 아니라 가축 사료로까지 사용된다는 것, 2모작이나 3모작이 통상 행해지는데,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할 뿐 아니라 농부들이 부지런해서 다모작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육류로는 소, 돼지, 염소, , 오리, 거위 등의 고기가 풍성하게 생산되는 외에 말고기, 개고기, 노새와 당나귀 고기까지도 식용으로 시장에 나오는 것을 기록했다.[235] 그리고 바다와 민물에서 나는 물고기가 매우 많은 것도 기록하고 있어서[236] 적어도 리치의 눈에 당시 중국인이 절대적인 식량부족의 위협은 받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235] <中國誌> 11-12.

[236] <中國誌> 13.

금속 사용에 있어서도 야금과 주철 등 기술이 유럽보다 뒤떨어지지 않음을 기록했다. 다만 금의 가치가 유럽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 은이 화폐의 본위로 되어 있지만 가치 변동이 심하고 화폐 위조가 용이하기 때문에 많은 불편이 있다고 적었다.[237]

[237] <中國誌> 14.

마테오 리치가 본 중국의 경제면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시장, 그리고 절대적 빈곤이 없는 안정된 물질조건을 가졌으면서도 적극적 경제활동이 도출되지 못하는 상태, 요컨대 잠자는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가 중국의 정신면을 바라봄에 있어서 이성의 빛을 바탕으로 훌륭한 도덕과 문명을 가졌으면서도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하느님의 나라로 보는 시각의 틀이 경제면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