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횡령과 독직에 관한 기사가 종종 나오고 있다. 간부급이 연루된 규모로 보아 평상시의 산발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붕괴에 따른 모럴 해저드 현상의 확산 정도가 아니라, 구 지배체제 핵심부에 의한 전면적 조직범죄로까지 보인다.


(1) 매일신보 1945년 10월 08일

 

종로 보안서에서는 6일 전 경기도 지사 生田淸三郞을 비롯하여 경기도청 내의 일본인 부장과 각 과장 20명을 검속하고 취조 중인데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모르나 업무횡령과 독직사건이라고 한다.


(2)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전 경기도경찰부장 岡久雄 이하 일인 경찰관과 일부 반역자들이 결탁하여 영등포 鍾紡창고에서 막대한 수량의 광목을 빼앗아 내어 혼란기에 있는 경제 상태를 더욱 혼란시키고 사사로이 배를 불렸다는 사건은 기보한 바이다. 종로 보안서에서는 그 동안 이들을 엄중 취조하던 중 여죄 일절도 판명되었으므로 16일 공갈 수뢰의 죄명으로 원 경기도 경제과 小野寺完爾, 谷本義國, 猪狩利喜三, 西村復雄을 구속하여 송국하였다. 그리고 平林幸一, 川面均은 기소유예, 李英介는 불기소로 되었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원 경기도 경제과장 淸水는 뒤이어 그 행방을 수색 중이다.


(3) 중앙신문 1945년 12월 07일

군정청 법무국장 매트 테일러 소좌의 5일 발표에 의하면 전 일본인 관리가 공금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법무국내에 특별범죄수사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었다 한다. (...)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는 전 일본인관리의 공금횡령사건이 30여건이나 되어 동위원회 보고에 의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되리라고 한다.


(4) 서울신문 1945년 12월 16일

전 총독부 체신국장 伊藤泰吉과 전 경무국위생과장 阿部泉 이하 다섯 명의 업무횡령사건의 공판은 작 15일 오전 10시 서울대법원 대법정에서 李仁 대법관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이날 법정 방청석에서는 왜놈 관리들의 최후까지 착취를 꾀하여 사복을 채우려는 단말마의 발악의 죄를 우리들의 손으로 처단하는 광경을 보고자 아침부터 밀려든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더욱이 培材中學校 학생 50여 명이 특별방청하여 종시 이 통쾌한 광경을 보고 있음이 눈에 띠었다. 먼저 위생과장 阿部의 죄상을 심리하고 阿部의 증인으로서 鍋田 외 1명에 대한 심문이 있은 후 대법관으로부터 심리는 끝났으나 무슨 할 말이 있거던 말하라는 말에 阿部는 눈물을 흘려가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방청석에서는 이 가긍하고도 통쾌한 것에 웃음소리가 나오곤 하였다. 이어서 전 체신국장 伊藤이와 체신부 회계과장 이하 4명에 대한 업무행정의 범죄를 추상같고 준열한 대법관의 질문 앞에 심리가 오후까지 계속되어 일단 심리를 마치었는데 언도는 머지않아 하리라 한다.


(5) 동아일보 1945년 12월 19일

40년 동안 우리 3천만동포를 쥐어 짜 먹기에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총독부 일인 고급관리들은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다가 속속 우리 검찰의 손에 검거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또한 전 총독부 회계과장 上野武雄과 동 출납계장 上山敏雄은 6,4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17일 特別犯罪審査委員會에 검거 구속되었다. 이제 영어의 몸이 된 上野는 上山과 결탁하여 가지고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공금 6,400만원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安田銀行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한 후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경성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일본으로 비밀히 탈출하려는 직전에 이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항복 방송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다. 38선 이북에서도 소련군 민정부가 설치되는 9월 하순까지 일본인의 역할이 계속되었고, 이남에서는 11월 중순까지 미군과 일본인의 공동지배 상황이 계속되었다. 식민지배의 유산 중에는 8월 15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식민지배가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인의 무책임한 파괴와 범죄 행위를 “나쁜 놈들이니까 끝까지 나쁜 짓을 했군.” 정도로 막연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혼란을 틈탄 범죄 행위에 미군과 한국인의 몫도 있었다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되겠다.


예컨대 경제 혼란의 대표적 현상인 식량난을 놓고 일본으로의 미곡 밀수출을 문제 삼곤 했다. 일본 쌀값이 국내의 열 배 이상 되기 때문에 모리배들이 쌀을 빼돌려 국내에 식량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면 그것이 어찌 모리배들만의 잘못이겠는가. 농민들에게 쌀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국내 시장 운영에 먼저 문제가 있는 거지.

 

식량난을 몰고 온 직접 원인은 미곡시장의 일체 제한 규정을 철폐하고 자유매매를 선언한 10월 5일의 군정청 일반고시 제1호였다. 조선의 식량정책은 1939년 말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1943년 8월 ‘조선식량관리령’ 발포 이후로는 엄격한 배급체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10월 들어 군정청은 이남 지역의 작황을 낙관하면서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이것이 미곡시장의 투기화를 불러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 다음 이듬해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포해야 했다.


점령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미곡시장 자유화처럼 민생에 영향이 큰 사안에 섣불리 손댄 까닭이 무엇일까? 이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한민당계 지주-자본가 집단의 로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국식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확인한다는 명분이 따랐을 것이다.


자금력이 대규모 폭력을 정치에 끌어들인 문제를 어제 지적했는데, 폭력이란 인간사회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다른 인간관계를 압도할 만큼 대규모로 조직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한국에 엄청난 규모의 유휴자금이 존재했다는 것이 그런 조건이었다. 이 시기 한민당 측에서 보여준 현금동원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채권이 동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업이 정체되어 있던 상황에서.


해방을 전후한 통화량의 급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 5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 통화량이 몇 달 사이에 30여억원 늘어났다고 한다. 강준만은 이것을 “패전한 일본인들이 미군 진주가 지연된 기간을 이용하여 재한 일본인들의 귀국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 탓에 빚어진 일”로 보았다. (<한국현대사산책 1> 184쪽)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에서 이 돈의 출구를 살펴보았지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맨 위의 인용 기사 중 (5)번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정병욱의 연구는 ‘합법적’ 출구를 찾는 데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와 다른 ‘불법적’ 출구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총독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 둘이 공모해서 6천4백만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전국 통화량의 1%에 육박하는 이 금액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 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야스다은행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했다고 한다. 특별위로금으로 지출했으면 괜찮을 것을 착복하려고 빼돌려서 죄가 되었다는 말인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의 개인적 착복인지, 아니면 윗사람들 시키는 대로 했다가 총대를 멘 것인지도 이 기사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소에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돈이 황당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착복이더라도 자금의 불법 유출이 횡행하는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시점에서 돈의 움직임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의 일본인 고위 관리의 입장에 내가 있었다면 어떤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몇몇 나치 거물처럼 거금을 챙겨 남아메리카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싸 들고 고향에 돌아갈 길도 없었다.


나 같으면 내가 아는 조선인들 중 능력은 우수하되 품성이 저열한 인간들에게 돈벼락을 때려줬겠다. 그래야 우리가 떠난 뒤 조선 정치가 개판이 되고, 조선 백성들은 구관이 명관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에 따르면 초기 미군정의 재정 정책은 일본인의 조언에 따라 이뤄졌다고 한다. 군표 대신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미군정의 은행권 남발을 유발, 이전의 통화 증발을 물타기한 것이다. 덕분에 고위 책임자들이 모두 아무 처벌 없이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정청 재무국 촉탁으로 통역을 담당하느라 잔류했던 한 조선식산은행원 출신자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재무국장 고든과 두 명의 보좌관 로빈슨, 스미스로 구성된 미국측과 미즈타(총독부 재무국장), 호시노(조선은행 부은행장), 야마구치(조선식산은행 이사)로 구성된 일본측의 통역에 전념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이 6명 사이에서 한국 재정과 금융에 관한 지배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호시노는 미군정의 군표발행 계획을 혼란만 줄 뿐이라며 반대하고 필요하다면 조선은행권을 찍으라고 권유했다. 이후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136쪽)

 


 

Posted by 문천

 

 

 

 

1. 1945년 한민족의 독립 자격은?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에서 조선왕조의 멸망은 일본의 야욕 없이도 진행되어 온 일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일본의 항복도 한민족 독립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뒤를 잇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 일본 지배 때문에 막혀 있던 상황이 끝나 국가 건설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만, 민족국가 건설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1945년 세계의 진로는 연합국이 쥐고 있었다. 주요 연합국(미국, 영국, 중국) 정상회담에서 전쟁 후 조선 독립을 약속한 194311월의 카이로선언이 있었다. 소련도 이 선언을 추인했다. 그러나 막상 일본이 항복한 후 연합국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대립의 길로 가면서 조선은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되고 말았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 몇 주일 전에 연합국 외상회담(미국, 영국, 소련)에서 오스트리아의 전쟁 후 독립을 약속한 모스크바선언이 있었다.

 

영국, 소련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 야욕의 첫 희생자인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 정부는 1938315일 독일이 강행한 오스트리아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날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를 3국 정부는 무시한다.

3국 정부는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인 자신, 그리고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주변 나라들은 이 부활을 통해 항구적 평화의 유일한 조건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약속과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마지막 문장에 유의할 점이 있다.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독립의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연합군이 오랜 수세로부터 공세로 전환하려 애쓰고 있던 이 시점에서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독립 약속은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의 균열을 노리는 책략을 담은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에 10, 조선에 5년의 신탁통치 방침을 연합국이 결정한 데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데 대한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가 아니라 강대국의 세력 개편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배제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위축되는 한편에서 미국과 소련이 득세했다. 폴란드는 독일에 대한 항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지만 소련에게 걸리적거리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국토를 빼앗기고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환원시키려는 압력에 저항해서 처절한 독립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것이 해방당시 세계의 현실이었다. 많은 조선인이 항일운동에 피와 땀을 쏟았지만 연합국이 인정할 만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일본 항복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환호 대신 탄식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광복군을 국내에 투입하려는 계획이 미수에 그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국내의 항일운동은 전쟁 중의 극렬한 탄압으로 붕괴되거나 마비되어 있었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도 전향한 사람이 많았고 전향을 거부한 사람들은 투옥이나 은신 상태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있었다고 하지만 연합국에게 인정받을 만큼 확실한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2. 미국과 소련의 조선 점령 의도

 

2차 대전 연합국에게 가장 큰 전리품은 독일과 일본이었다. 전쟁의 주역으로 나설 만큼 생산력을 비롯한 국력이 큰 나라들이고, 전범국이기 때문에 점령자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항복(19455)을 앞두고 연합국 정상이 모인 얄타회담에서(19452) 독일 처리의 기본 방침이 합의되었고 항복 후 포츠담회담에서(19457) 구체적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독일은 미---4개국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나중에 미--불 점령지역은 서독이 되고 소련 점령지역은 동독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원자폭탄의 출현으로 예상보다 몇 달 빨리 항복했고, 때문에 독일 항복 때처럼 연합국 간의 합의가 이뤄져 있지 않았다. 소련의 지분이 문제의 초점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의 최대 피해국이었는데, 독일과의 항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었고, 독일 항복 후 3개월이 지난 뒤에 일본 공격에 합류하기로 얄타회담에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소련은 이 약속대로 8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바로 이 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1주일 후에 일본이 항복했다.

일본과의 전쟁만 놓고 본다면 소련 역할이 미미했지만 2차 대전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일본 점령에도 소련이 상당한 지분을 가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소련이 지분 주장에 강력하게 나서지 못한 것은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 목적이 일본 항복을 앞당기는 데보다 소련을 위협하는 데 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전쟁이 몇 달 더 계속될 때 늘어날 희생보다 원자폭탄에 의한 희생이 더 컸다는 주장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소련 참전 전의 연합군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Allied Powers) 이름으로 미국이 사실상 일본을 독식하게 되었다. 소련은 만주국 영토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종전 시점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뒤지는 데다 원자폭탄 때문에 군사력도 뒤져 있어서 미국이 강요하는 양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은 모든 협상력을 동유럽 공산화에 집중했다. 서쪽으로부터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공격을 받았던 러시아에게는 동유럽에 방패를 장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얄타회담 때까지 미국을 이끌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합국 간의 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노선에 따라 소련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후 트루먼 정부는 차츰 국가주의(nationalism) 노선으로 기울어져 갔다. 다른 모든 산업국이 큰 파괴를 입은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력이 이후 20년간 세계를 압도하게 되는데, 그 위에 핵무기까지 독점한(소련은 1949년 가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전략적 우위를 갖고 유일 패권을 추구한 것이었다.

미국의 전 세계적 패권 추구에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은 방어적 대외정책을 취했다. 동유럽 공산화에 모든 힘을 쏟으면서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세력에게도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점령했던 만주도 고스란히 국민당정부의 중화민국에 넘겨주었다. 한반도의 북반부 점령도 자기네에게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는 소극적 목적에 그쳤다.

한편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발판으로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매진했다. 일본에서는 자본 세력과 천황 이하 지배세력을 전범재판에서 최대한 보호하고 친미국가를 만들어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체제 거점으로 만들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소련과의 타협을 꾀하는 국무부 중심의 국제주의 노선과 소련과의 갈등을 키우려는 군부 중심의 국가주의 노선이 처음에는 엇갈리고 있다가 1947년 중국의 공산세력 확장에 영향을 받아 점령 지역을 위성국가로 만드는 분단건국을 지향하게 된다. 1946년 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두 나라의 현실적 이득을 위한 버티기로 교착되었는데, 1947년 여름의 제2차 위원회에서는 파탄을 위한 미국의 고의적 노력이 분명해졌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조선 건국 문제에 자국 이익을 앞세운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반면 소련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소련은 거리도 가깝고 경제 개발 수준도 자본주의에 적합지 않은 조선에 무리한 압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자기네에게 불리하지 않은 정권이 형성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먼 곳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3. 분단의 내인론과 외인론

 

한반도 분단건국의 근본 원인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었느냐 외부에 있었느냐 하는 외인론과 내인론이 엇갈려 왔다. 근본적 원인이 내부에 있더라도 바로 외부의 문제들을 촉발하게 되어 있고 외부에 있더라도 바로 내부 문제들을 유발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좁게 들여다봐서는 판별이 어렵다. 그러나 한민족의 긴 역사에 비추어볼 때 외인론이 타당하게 보인다.

10세기의 고려 건국 이래 한민족은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유지해 왔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할 때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할 때도 민족국가는 유지되었다. 심지어 고려 왕국을 없애고 원나라 직할로 해달라는 고려 일부 세력의 청원을 받은 원나라 조정에서 그 청원을 기각할 만큼 반도의 민족국가는 자연스러운 존재로 인정받아 왔다. 20세기 초의 식민지화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였고, 일본의 압력만 해소되면 민족국가의 복원이 당연한 일이었다.

내인론에서는 좌우익 대립을 원인으로 들지만, 정치적 대립이 없던 시절이 언제 있었던가. 당쟁이 아무리 격렬하던 때라도 모든 대립은 국가 내의 대립이었다.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반역은 극히 드물었고, 그나마 민족국가의 해소가 아니라 권력체제의 전복만이 목표였다.

물론 식민지 상태를 겪어본 20세기 중엽에는 왕조가 유지되던 시대와 다른 생각도 얼마간 떠돌고 있었다. 일본 통치에 협조하며 특권을 누려본 사람들은 일본 아니라도 다른 외국을 위한 매판 역할을 찾을 수 있었고, 공산혁명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은 유산계급의 착취기구인 국가를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친일이 지탄받던 도덕적 기준이 해방 전에도 사회에 유지되고 있었고, 공산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먼 장래의 혁명을 위해 당장 민족국가를 도외시할 마음이 없었다.

해방공간의 현실에서는 좌우익의 주도권을 모두 민족국가에 대한 애착이 없는 극단파가 장악했다. 양쪽 극단파 모두 민심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을 수 없었으므로, 정상적 상황에서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주변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점령군의 힘에 기대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좌우익 극단파의 득세 과정을 반민자’(반민족행위자) 처리 과정에 비쳐볼 수 있다. 극우파는 반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극좌파는 반민자 집단에 대한 단호한 처단 주장을 통해 형성되었다.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반민자의 신속한 처단을 주장하되 절제 있는 처단을 통해 무차별적 옥석구분을 피하고자 했다.

이북에서는 극좌파의 주장에 따라 가차 없는 처단이 이뤄졌다. 친일파 처단이 미흡했던 이남에서 이것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온 조치가 아니었다. 이북의 반민자 집단이 처단을 피하기 위해 이남으로 건너와 극우파의 자원을 보태준 문제도 있거니와, 이북에서 그 후 전쟁이나 천리마운동 같은 모험적 정책을 견제할 보수파가 사라짐으로써 인민의 고통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맞았다.

한편 이남에서는 친일파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처단은커녕 일제시대보다 더 큰 권력과 재력을 차지했다. 매판세력의 역할을 미군정이 일본 통치자들보다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않은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항복 후에 엄청난 양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항복 시점 통화량이 약 50억 원이었는데 몇 주일 동안 약 36억 원을 더 찍었다. 화폐 발행은 미군 진주(98) 후까지 계속되었고, 이 때 찍은 화폐 중에 불량품이 많아 상인들이 잘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미군정에서 보장해 주기까지 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몇 주일 사이에 통화량의 70% 증가는 끔찍한 결과를 몰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늘어난 돈은 친일파의 손에 뭉칫돈으로 남아 있었다. 박흥식이 어떤 사건으로 조사받을 때 일본 항복 직후 그가 총독부 측에서 1천만 원의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빙산의 일각이다.

1123일 임정이 귀환한 후 부호들이 제공하는 7백만 원을 받느니 못 받느니 옥신각신한 일이 있다. 역시 빙산의 일각이다. 김구가 귀국 이튿날 친일파 처단 문제를 묻는 기자들에게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고 답했다. 산술에서는 A+BB+A가 같은 것일 수 있어도 인간사회의 경로의존성은 어쩐단 말인가. 당시의 민족주의자들을 실망시킨 이 엉뚱한 대답이 나온 데도 친일파의 자금력이 한 몫 했을 것 같다.

친일파는 자금력과 경찰력을 미군정에게 보장받았다. 그 자금력으로 룸펜화된 대중을 정치폭력에 동원할 수 있었다. 건전한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다. 민족사회 외부의 힘이 군정의 형태로 작용한 결과였다.

 

 

4. 한반도의 냉전은 언제 끝나나?

 

남북한의 분단건국은 미-소 간 냉전 때문이었다. 두 나라가 각자의 점령지역을 자기 영향권으로 만들기 위해 극단적 공산주의자와 친일파 집단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으니, 민족사회 내의 좌우대립이란 것이 두 나라의 대리전이었던 셈이다.

-소 냉전은 1990년대 초에 끝났다. 그러면 외인(外因)이 해소된 것 아닌가? 외인이 사라진 후에도 분단 상태가 20여 년간 계속될 뿐 아니라 평화 정착 노력조차 성과를 잘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냉전구조가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냉전구조라 함은 자본주의체제의 심화와 확장을 향한 압력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의 교착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도 자본주의체제 도입을 향한 것이었지만, 민족사회 내부에 뿌리를 굳건히 내리지는 못했다. 조선인 유산계층은 거의 지주로만 구성되었고 기업 활동은 미약했다. 그래서 해방 당시 안재홍은 전 민족이 동일 예속동일 해방을 겪었기 때문에 민족사회 내의 계급 갈등이 최소화된 상태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의존체제는 일본의 통치체제에 비해 한국 내의 자본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그래서 군사독재 하에서 자본권력이 형성되어 군사권력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체제 운영에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1세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식이 이 상황을 보여주었다. 자본권력이 개혁적 성향을 보인 면도 일부 있지만 전체적으로 수구세력의 온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재벌체제가 국가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1991년까지 세계적 냉전의 주체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소련은 사라지고 그 뒤를 이은 러시아는 냉전 주역으로서 면모를 모두 잃었다. 미국은 아직도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세계 각지의 갈등과 긴장을 일으키고 키우는 역할을 수시로 맡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의 절반을 자유진영으로 묶어놓고 통제하던 힘은 잃었다. 세계 차원의 냉전은 분명히 끝났다.

지금 한반도 긴장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에 놓여 있고 남한의 역할은 주변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피상적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은 냉전기 반공주의 같은 구조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중국 견제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위한 부수적 수단으로 흔히 해석된다.

나는 <냉전 이후>(2016)에서 1990년대 남북관계를 돌아보며 남한의 수구세력이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면을 거듭해서 살펴보았다. 미국에게는 199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계속할 동기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할 동기가 엇갈려 왔다. 그에 비해 북한의 개방을 가로막으려는 남한의 정책에서 더 강한 동기와 뚜렷한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미국의 어느 극우파보다도 한반도 긴장 완화를 꺼리는 마음이 강하다. 이해관계가 크게, 그리고 직접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구세력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24% 지지에 그쳤는데도 국회에서 38%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정책분야에서 우습지 않은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국회만이 아니라 언론, 관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과잉대표되는 체제를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해 놓았다. 비교적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수구세력의 과잉대표 상황을 부분적으로 완화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지난 20여 년간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가로막는 데 미국보다도 남한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 하는 탄식이 한 동안 서울 거리에 메아리쳤다. 민족 통일은커녕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70년 전 조선 인민이 원치 않는 분단의 길을 걸은 것은 남 탓때문이었다고 나는 확언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역량이 자라나고 외세의 압력이 이만큼 줄어든 지금에 와서도 민족의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 탓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평화, 나아가 민족 통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고 이 사회를 사회다운 사회로 만드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Posted by 문천

Scholarship is not sitting at the table, reading texts and underlining points to memorize. It is standing on it, trying to look beyond the texts and think more widely. The table is only a platform for the scholarship.

 

The table is a device for injecting the currently prevailing ideology into your mind. "Independence of mind" is achieved by stepping on it. Then you can start anew. Change and resistance will become possible.

 

"Resistance is none other than creation, and creation none other than resistance".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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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