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8. 10:44

 

A journey consists of a departure and an encounter. A departure is walking out from one's own realm, and an encounter is getting associated with strangers. But neither is the real essence of a journey. It is a return, a return to our honest selves and to our sore wounds.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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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김기협: 1948년 7월 <신천지>지에 기고하신 “기로에 선 조선민족” 중 1945년 말경의 심경을 되짚은 대목이 있습니다.

 

“(임정 귀국 이후) 1주일이 지나 벌써 민중은 불안을 품었고, 1개월이 되어서는 초조하였었다. ‘남북통일-좌우합작’이 구호처럼 들렸고, 임정 내부 좌우 세력이 포섭되어 있으니만치 좌우협상이 상당히 되려니 하였으나, ‘인공’은 스스로 양보치 않고, 임정은 민족주의 진영 총지지의 기세도 있어 법통으로 굳게 지키어 스스로 걸어 내려와 타협할 수 없으매, 인공 측의 주장하는 양자 동시해체, 평지재건 식의 논법과는 조화될 길 없었다.”(<민세 안재홍 선집 2> 265쪽)

 

‘해방의 해’ 1945년이 끝나 가는 시점에서 독립 노선의 확고한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무엇에 불안을 품었고 무엇에 초조함을 느꼈는지 더 풀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며칠 되지 않아 불안을 느낀 것은 친일파 문제에 대한 백범 선생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착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 말씀했죠. 표현을 신중하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것은 신중하게 하더라도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는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홀연히 닥친 해방 앞에서 민족의 진로에는 크나큰 혼란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강압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에서 각 개인과 집단이 서로 다른 소신과 취향,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중심으로 온 민족이 최대한 뭉침으로써 혼란의 위험을 극복하기 바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민족적-반민주적 요소를 배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요.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임정이었습니다. 임정이 국내 사정을 잘 모른다 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친일파 문제 하나에 대해서만은 확고한 태도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혼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도록 임정이 정국 통일을 향한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는 데 초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단적인 문제가 인공과의 관계였죠. 임정이 민족주의의 대표라면 인공은 민주주의의 대표였습니다. 인공 운영방법에 미흡한 문제, 무리한 문제가 여러 가지 있기는 해도, 민중 속에서 자라나는 민주주의 풀뿌리를 수렴하고 있던 것이 인공입니다. 인공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임정이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인공을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풀어낼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몽양은 임정과 인공의 동반해체를 제의하면서도 인공 내에서는 조직과 부서를 먼저 없앨 것을 주장했습니다. 임정의 우선적 권위를 존중하자는 것이었지요. 임정 측이 인공의 가치를 원천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몽양의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인공 주석 취임을 거부한 상황에서 인공의 명목상 수반인 몽양의 부서 해체 주장은 인공 내에서도 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김기협: 선생님께서는 ‘민족통일전선’을 계속 중시해 왔습니다. 9월초부터 이끌어온 국민당이 4대 정당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데도 민족통일전선을 위해서는 해체 용의가 있다는 것을 선생님 개인 의견 차원을 넘어 국민당의 공식 방침으로 밝혀 왔죠. 정당이란 특정 범위의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목적을 함께 추구하는 활동인데, 통일전선을 위해 해체한다는 것이 정당의 존재 의미와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통일전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부터 문제가 없을까요? 정치란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절충하는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일’한다는 것이 요구의 다양성을 부정함으로써 ‘인민의 정치’나 ‘인민을 위한 정치’ 의미를 제한하는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안재홍: 이 나라에는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가 이제 생겨나고 있는 참입니다. 정치가 궤도에 올라 있는 나라의 정당이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 부러운 일입니다만, 지금 우리에게는 더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가 있습니다.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는 답답합니다. 각자 서로 다른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절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가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들을 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서 기술도 발전시키고 전통도 세워놓은 나라들입니다.

 

일본인의 압제가 없어졌다 해서 우리끼리의 정치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의 틀부터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요구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각자가 꼭 필요한 최소한만을 요구한다면 모든 사람의 요구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겸양과 절제 없이 각자 최대한을 요구하면 정치의 틀 자체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정치의 틀이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각자의 요구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과 평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각자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틀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리에만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파를 배격하자는 민족주의 원리에도, 모든 사람이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민주주의 원리에도 인민의 95% 이상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당은 바로 그런 원리들이 확실히 세워지기 바라는 동지들의 모임입니다. 더 이상의 욕심이 없습니다. 그 원리들을 세우기에 더 좋은 길이 있다면 당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도 그 까닭입니다.


 

김기협: 선생님이 특별정치위원회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한 12월 23일자 담화문을 <자유신문>이 보도하면서 선생님의 견해를 “中協의 기획은 그 방법의 졸렬로 실패하였을지 몰라도 中協이 기도하는 바 민족통일전선 결성은 特別政治委員會의 출발로 더욱 발전하였다는 견해”라고 소개했습니다. “방법의 졸렬”이란 표현이 선생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강한 비판이고, 담화문 내용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죠. 그래도 기자가 선생님 생각을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독촉중협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죠?

 


안재홍: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이 박사가 귀국 직후 초당파적 정치 통합의 뜻을 표명할 때부터 나는 이것을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지름길로 보고 극력 지지했습니다. “독립촉성”이란 이름도 내가 제안한 것이죠. 그때까지 지지부진하던 정당 통합 운동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의 관계이던 한민당과 공산당 양쪽이 모두 적극적 참여 의사를 보인 것이 이 박사의 탁월한 영도력 덕분이었습니다. 한민당 측은 군정 당국자들의 극존대를 받는 이 박사를 거스를 수 없었고, 공산당 측은 인공 주석으로 추대할 만큼 민족지도자로서 이 박사의 명망을 존중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두 당의 참여를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가장 어려운 과제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독촉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역시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당의 참여 의지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지적들을 많이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꿍심이 있기는 공산당이나 한민당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꿍심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면서 대동단결의 큰 틀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박사에게 내가 바란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한민당의 꿍심에는 맞춰주면서 공산당의 꿍심은 그냥 묵살해 버렸습니다.

 

독촉 추진 과정에서 이 박사는 한민당 대표 노릇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명 전형위원 임명에 한민당 다섯 명이 말이 됩니까? 애초에 내켜하지 않던 몽양을 내가 양주 집에까지 찾아가 설득해서 참여시켰는데, 몽양 앞에서 내 낯이 화끈거리더군요.

 

공산당 쪽에서는 이 박사 자신에게 꿍심이 있어서 일을 그렇게 끌고 왔다고 비난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군정청에서 원하는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서두르다 보니 방법상에 졸렬한 점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런 중대한 민족 사업을 놓고 군정청의 요구를 너무 앞세웠다는 점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박사가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분인데, 너무 나쁜 쪽으로만 해석해서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입니다.

 


김기협: 선생님이 이 박사나 임정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역할에 기대를 크게 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독립운동 세력인 독립동맹의 환영준비회에서 국민당이 이탈하는 성명을 12월 24일 발표합니다. 국민당이 우익 정당으로서 좌익 세력인 독립동맹과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안재홍: 참 난처한 일입니다. 그런 오해를 피할 수 없지요. 국민당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경할 만한 대상을 깍듯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투쟁 경력과 노선에 대해 국민당 동지들과 저는 큰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김두봉 씨 등 독립동맹 인사들의 향후 활동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탈 성명에서 우리는 “환영회의 주최역인 조선공산당은 동환영회에 정치의도를 가미하는 것 같다. 독립동맹의 혁명투사 환영이 민족적 자연의 순정인 범주를 벗어나 정략적 취미를 가하게 됨에는 我黨으로서는 차라리 그로부터 이탈하여 그 처지를 해명”한다고 했습니다. 12월 8일자 <해방일보>에 보도된 김태준 씨의 회견에서 임정과 광복군을 깎아내린 것이 민족운동가의 금도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12월 19일 박헌영 씨 담화에서(<해방일보> 12월 21일자) 이를 답습해 독립동맹을 임정 공격에 이용하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해외 독립운동에는 중시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든 일을 해왔다는 도덕적 가치도 중요한 것이지만, 보다 실제적인 가치들도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외교관계에 필요한 발판을 해외 독립운동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에는 임정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에는 독립동맹이, 미국과의 관계에는 이 박사 등 재미 활동가들이,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에는 김일성 씨 같은 분들이 좋은 역할을 맡아주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정치 환경의 경험입니다. 국내에 있던 우리는 식민지체제만을 겪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정치 환경을 빚어 나갈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정치체제를 다양한 위치에서 겪어온 분들의 경험이 잘 활용되어야 합니다.

 


김기협: 임정 귀국 한 달이 지나도록 좋은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도 임정에서 꾸리는 ‘특별정치위원회’에는 큰 기대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건준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겪었고, 이어 독촉에 기대를 걸었다가 다시 실망을 겪었습니다. 이번 특별정치위원회로 인해 또 실망을 겪게 될 걱정은 없는가요?

 


안재홍: 실망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두려워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나는 변변찮은 사람이지만, 내가 희망을 걸고 기대를 거는 것이 상대방이 좋은 일을 하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확실한 반증이 없는 한 나는 상대방을 믿고 기대를 걸려 합니다.

 

특별정치위원회에 특별한 기대감을 가지는 것은 꼭대기에서 만들어내는 하향식 기획이 아니라 바닥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김원봉,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등 앞장서는 분들이 임정에서 ‘비주류’로 통하는 이들이죠. 그들이 앞장서고 백범 선생과 우사(김규식) 선생 등 지도부가 뒷받침해 준다면 임정 전체의 힘찬 움직임이 될 것이고 임정의 지도력이 극대화될 것을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중(조소앙)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습니다. 임정에 존경하는 분들이 많지만, 경중 그 사람에게는 한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30년 전 도쿄 유학 시절 마음을 허락한 그 친구와 함께 상해로 갈 의논을 하곤 했지요. 내가 먼저 갔다가 할 일을 못 찾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간 그 친구는 할 일을 찾았어요. 이번에 돌아온 것을 보니 20여 년 전 보던 그대로,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 그 친구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쁨입니다.

 



 

Posted by 문천

 

11월 29일 몽양심포지엄 시작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곱상한 부인이 앞 자리에 앉아있었다. 알고 보니 우사 선생의 손녀 김수옥 여사였다. 명함을 받았는데 내게는 드릴 명함이 없어서 민망했다. 이튿날 메일을 보내 명함 드리지 못한 데 미안한 마음을 알리면서 아버지 일기에 우사 선생이 나온 장면을 적어 보냈다.

 

​1950년 7월 27일

​6-25 직전에 무슨 마음이 내키어 용출 군에게 부탁하여 단파 아닌 것을 하나 사둔 것이 이즈음은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아침저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를 듣고 또 자수자들의 전향성명도 방송으로 들을 수 있다. 모두들 원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에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다는 김효석의 그 지나치게 비굴하고 치사스러운 주책덩어리의 내용에 비기어 안재홍, 조소앙 씨 등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오히려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다. 이는 그 개인의 인끔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래서 중립이란 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모씨는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만을 쓴다는 풍설이 파다하였으니, A에게 아첨 잘하는 사람은 세상이 뒤바뀌면 또 B에게 아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김규식 박사의 방송은 그 어조조차 침통하였고, 또 그가 모씨를 못마땅해하는 말들은 일부러 어떤 편에 듣기 좋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의 폭발인 것 같아서 듣는이로 하여금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오랜만에 다시 적으면서 생각이 일어난다. ​'중립'이란 "무엇이다" 하는 긍정적(positive) 표현이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 하는 부정적(negative) 표현이다. 부정적 표현을 어째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일까.

 

에릭 홉스봄은 20세기에 "극단의 시대"란 이름을 붙였다. 그 극단의 시대를 가장 극단스럽게 겪은 곳의 하나가 우리나라다. 그러니 극단을 피하는 중립이 귀할 수도 있겠다.

 

한 걸음 더 생각해 보면, 당시의 '중립'은 극좌와 극우를 피하는 길이었다. 극좌와 극우에 "극"이 붙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정치란 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성패가 달린 것인데,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나는 길이 어떻게 득세할 수 있었는가? 점령군의 위세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단건국의 근본 원인이 민족사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고 하는 '외인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외압이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에서 외압이 특별히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로운 외압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통시대에도 외압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내면화된 시스템의 존재 때문에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학을 비롯한 중요한 지적 성취가 제도권 밖의 학자들의 손으로 이뤄진 것이 이 시스템을 통한 압력을 덜 받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우리 사회에는 해방공간 당시의 외압이 내면화된 채 그대로 남아있어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근년에 키워 왔다. 양심적인 성품의 지식인들도 제도를 통해 주입된 관념에 묶여 시야가 현실에 이르지 못하고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전에 가르침을 얻던 좋은 글들도 서양식, 계몽주의적 가치체계에 너무 얽매여 우리 사회의 현실과 겉도는 게 아닌가 회의감이 요즘 들어서는 일어난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게 된 필요조건 하나가 일찍 제도적 조건을 벗어난 것 같다. 대학에 계속 남아 이런저런 아카데믹 크레딧에 매달려 있었다면 학술제도의 구조적 제약에 관한 생각을 이런 식으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생각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것인지 객관적 평가를 받을 길은 없지만, 한 지식인으로서 나는 이만한 생각이라도 떠올리게 된 것을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근 30년 제도권을 벗어나 있으면서 어두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생활이 궁핍한 거야 일찌감치 安貧의 자세를 갖췄지만, 제자 키우지 못하는 것이 갈수록 안타까웠고, 싫은 일 못하는 내 딜레탕티즘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도 근년 들어서는 내 생각을 적극 받아들이는 후진들도 나타나 주고, 한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성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홀로 선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당 태종이 위징에게 소원을 말하라 함에 “신으로 하여금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도록 해 주소서.”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발 좀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고달프게 따질 필요 없도록.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태종이 물으니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좌한 것이 양신이고 걸주(桀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 충신이라 답했다고 한다. 상상 속의 태평성대에나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딱한 사람이다. 완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는 고달픈 자세를 면할 길이 없다.

 

나는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한 사람이다. 위징 이야기를 꺼냈지만 감히 거기다 나 자신을 비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립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웃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혼자 서 있게 되었고, 그런 바에야 독립성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애썼을 뿐이다. 

 

퇴각로에서는 더더욱 혼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남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같은 생각 가진 이들을 잘 챙겨야겠다. 신영복 선생 글 옮기는 일에 마음이 끌린 것도 그 까닭이다. 나와 있는 좋은 이야기들, 앞으로는 열심히 살펴서 잘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