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1> 吳나라를 도운 越나라의 派兵

기사입력 2003-10-02 오전 9:08:10

  춘추전국시대에 많은 나라들이 서로 싸움을 벌였지만, 그중에서도 적대감이 가장 강했던 나라는 춘추 말기 양자강 하류에 자리잡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였다. 그래서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를 보면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하는 말도 생겼다.
  
  와신상담(臥薪嘗膽)도 두 나라 사이의 치열한 쟁투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오나라 합려(闔廬)왕이 월나라 구천(勾踐)왕의 공격을 받아 죽은 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왕은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국력 회복에 힘쓴 결과 2년만에 월나라를 깨뜨리고 설욕에 성공했다. 망국의 위기에 빠진 구천은 부차의 용서를 간청해 치욕스러운 조건으로 겨우 나라를 유지했다. 그리고는 맛난 고기를 마다하고 쓸개반찬으로 삼으며 부흥에 힘써 20년만에 부차를 죽음에 몰아넣고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천의 부흥 노력은 눈물겨우리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왕자와 대신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온갖 가혹한 감시와 제약을 받는 가운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실력을 키워 나갔다. 월나라에 대한 오나라의 경계심을 풀어 구천에게 복수의 기회를 준 것은 부차의 교만과 야심이었다. 오나라 발흥의 주역으로 합려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오자서(伍子胥)가 부차에게 구천을 경계하라는 충언을 올리다 올리다 못해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한 것은 구천이 항복한 지 9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구천은 계속 은인자중하며 기회가 더욱 무르익기만을 기다렸다.
  
  부차는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를 위해 동북쪽의 강자 제(齊)나라와 자웅을 가리고 싶었다. 그런데 제나라가 오나라와 사이에 있는 노(魯)나라를 침공하려 하자 약한 노나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출병할 기회를 잡았다.
  
  노나라가 제나라의 공세 앞에 위기에 처하자 모국의 안위를 걱정한 공자가 언변이 좋은 단목사(端木賜), 즉 자공(子貢)을 보내 노나라를 돕게 했다. 자공은 오왕 부차를 찾아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와 싸울 것을 유세했다. 부차는 월나라가 배후에 있어 불안하니 월나라를 완전히 제압해 놓은 뒤에 출병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자공은 자기가 월왕 구천을 설득하겠다고 나섰다.
  
  구천을 만난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복수할 뜻이 없는데 상대방이 의심하게 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복수할 뜻이 있는데 상대방이 알게 하는 것은 화를 입는 길입니다. 일을 벌이기 전에 소문을 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 세 가지를 걱정해야 합니다.” 이에 구천이 크게 감사하며 대책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군대를 뽑아 출병을 도움으로써 오왕의 뜻을 북돋워 주고 귀한 보물과 공손한 말씀으로 그의 기분을 맞춰 준다면 그는 틀림없이 제나라와 싸우러 나설 것입니다. 그가 이기지 못하면 임금의 복이 될 것이요, 이긴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진(晉)나라와 싸울 것이니, 정예를 제에서 소진하고 주력이 진에 묶여 있는 동안 임금께서 그 빈틈을 들이친다면 오나라를 뒤엎을 것입니다.”
  
  구천은 자공의 말에 따라 3천의 군대와 귀한 무기 수십 벌을 부차에게 보냈다. 그러자 부차는 과연 대군을 끌고 북방으로 출병, 제나라에 대승을 거두었으나 뒤이어 진나라를 공격하다가 패전을 겪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그가 북방에 머물며 진나라와 패권을 다툰 지 3년, 드디어 구천이 5천의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 수도를 공격, 나라를 지키고 있던 오나라 태자 우(友)를 죽였다. 부차는 서둘러 귀국했지만 군대도 피곤하고 재정도 바닥이 난 상태에서 구천과 정면대결을 벌이지 못하고 월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후 오나라는 점점 약해지고 월나라는 더욱 강해져, 9년 후 부차가 자살하고 오나라가 망하기에 이른다.
  
  부차의 제나라 정벌은 노나라의 위험을 구원한다는 뜻에서 당시의 ‘계절존망(繼絶存亡)’ 이념에 합당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유엔의 승인을 받을 만한 정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속마음에는 천하의 패자가 되려는 야심이 있어 노나라 구원은 핑계였을 뿐이다. 이 속마음을 간파한 구천이 파병을 자원함으로써 이를 더욱 부추겨 부차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으니 ‘오월동주’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부대의 이라크 파병을 놓고 찬반 양론이 모두 너무 명쾌하게 나오는 것을 보며 복선이 깔렸던 파병의 사례를 떠올려 본다. 찬성론자에게 묻고 싶다. 한미 동맹관계에는 다른 모든 것을 도외시할 만한 가치가 들어 있는 것인가? 흥정도 하지 않고 서둘러 파병을 결정하는 것이 경제에 얼마만한 도움이 될 것인가? 또한 반대론자에게 묻고 싶다.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다른 곳의 참극을 전혀 모른 체하고 살 수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 우리나라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고 옳게 여기는 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인가?
  
  어떤 조건으로 출병해 어떤 역할을 맡느냐를 따져야 할 것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짓을 거드는 역할이라면 절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엔의 지휘 아래서든 우리의 독자적 작전권 위에서든 미국의 만행을 억제하고 이라크 국민을 도울 수 있는 길이라면 설령 얼마간의 희생이 예견되더라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동맹관계를 위해” 따질 것도 따지지 않고 서둘러 파병을 결정한다는 것은 국익에도 배치될 뿐 아니라 인류 평화를 해치는 길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스스로 저질러 놓은 짓을 뒷감당 못해 끌어들이는 판인데, 미국이 자기 한 짓을 반성할 틈도 없이 부화뇌동하자고 드는 맹목적인 불가피론자들은 혹시 미국 간첩 아닌가? 국정원에서 조사해 보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0>

기사입력 2003-09-29 오전 10:11:47

  근대 이전 유럽에서 유대인의 이미지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로크, 월터 스코트의 “십자군의 기사”에 나오는 아이자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돈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인종으로 통상 인식되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많은 유대인이 새로운 학문을 앞장서서 익히고 새로운 여러 전문분야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질투하는 마음이 종래의 경멸감을 바탕으로 유럽사회에 널리 퍼졌는데, 19세기 후반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이 반(反) 유대 정서가 정치에까지 반영되어 반 유대주의 문제를 일으킨다. 드레퓌스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유대인의 시오니즘은 반 유대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존중받는 민족으로 유대인을 만들자는 것이 시오니즘의 골자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이 곡절 끝에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 전망이 세워지지 않은 시절에 반 유대주의가 없는 신천지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이 많다. 그래서 미국은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며, 인구에 비해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를 세우는 것과 함께 존중받을 만한 민족성을 함양하는 것이 시온주의자들의 과제였다. 샤일로크와 아이자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우수한 유대인이 전문직종에 집중해 나약한 민족으로 인식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근로자’와 ‘전사(戰士)’의 이미지를 키우는 데 힘을 쏟게 된다. 흔히 ‘노동당’으로 번역되는 제1 야당은 근로자의 이미지를 찾는 노력에 뿌리를 둔 정당이므로 ‘근로당’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편 집권당인 리쿠드당은 전사의 이미지를 추구하던 군사조직에서 뻗어나온 정당이다.
  
  노동당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온건하고 리쿠드당이 강경한 데도 이 전통이 작용한다. 근로자로서 유대인은 아랍인과 어깨를 나란히 사이좋게 일하고 싶어한다. 반면 전사로서 유대인은 아랍인을 굴복시켜 저항을 없앰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얻으려 한다.
  
  시오니즘은 제국주의 시대 유럽에서 태어났다. 온건한 근로 시오니즘은 배타적이고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분위기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펼쳐진 데 반해 호전적인 전사 시오니즘은 제국주의 원리를 그대로 본받아 유럽에서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뒤까지도 그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영국이 제국주의 패권을 누리고 있던 시절에 이스라엘의 건국 방침을 세워준 데는 아랍세계 가운데 유럽인의 국가를 만들어 제국주의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다. 2차대전 후 영국이 패권을 잃자 새로운 패권자 미국이 이스라엘의 후견인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랍인의 바다 속에 섬처럼 떠 있는 이스라엘은 원초적으로 갈등의 핵이다. 그래도 건국 후 50여 년을 지내면서 갈등을 아주 없애지는 못할망정 갈등을 포용하고 살아갈 만한 지혜가 쌓여 와서 노동당의 주도하에 “땅 대신 평화(Land for Peace)” 정책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리쿠드당이 집권하면 다시 호전적 정책으로 돌아가는 일이 십여년째 반복되고 있다.
  
  긴장상태 때문에 미국의 원조를 필요로 하고, 또 미국의 원조를 계속 받기 위해 긴장상태를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의 모순은 끝날 때가 되었다. 빼어난 전투력보다 뛰어난 생산력에 의지해 지구촌의 건설적인 구성원이 되려는 국민의 염원이 자라났기 때문에 노동당의 평화정책도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 샤론 정부의 강경책이 호전적 시오니즘의 마지막 발버둥으로 끝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공군 조종사들의 민간인지역 폭격 거부 움직임이 좋은 징조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29>

기사입력 2003-06-07 오전 10:24:22

  “민족주의를 무슨, 오락으로 아나 보죠?”
  
  연변을 방문하는 일부 한국인의 과도한 민족주의 과시를 회고하던 연변의 중견작가 우광훈씨(50세)의 이 말은 분노라기보다 탄식이었다.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한 한국인은 한중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연길에 와서 택시 기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윽박질러 택시에 태극기를 꽂고 할 일도 없이 시내를 빙빙 돌았다고 한다.
  
  이런 돌출행동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수그러들었지만, 같은 심리상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우씨는 말한다. 만주가 옛날에 우리 민족의 판도였다느니,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간도는 우리 땅이라느니 하는 주장이 중국 당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조선족 정책에 불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지적조차 ‘패배주의’라고 매도하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가 그는 묻는다.
  
  중국 조선족은 현실 속에서 늘 ‘민족’을 의식하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연변자치주에서도 조선족 인구비율은 40% 전후에 불과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고,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중국어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 고민이다.
  
  대표적인 문제의 하나가 자녀교육이다. 조선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중국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조선족 학교에 다니며 중국어를 덜 익힐 경우 진학과 취업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나 꼭 중국 명문대학을 나와 중국사회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자기 문화를 지키며 그 속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조선족 사회가 잘 발전해, 그 안에서 일 잘하는 것이 민족사회를 떠나 이민족들 사이에서 출세하는 것 못지않게 보람있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의 민족주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적 발전으로 귀결된다.
  
  한편 한국내에 사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떠한가? 대다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을 접할 일도 없고 외국어를 쓸 필요도 없다. 대통령에서 노숙자까지 모두 같은 민족이다. 따라서 ‘민족’을 의식할 현실적 필요가 없다. 정치를 걱정하는 데도, 돈벌이를 궁리하는 데도, 먹고 마시고 노는 데도, ‘민족’이 실질적 변수로 등장하는 일은 별로 없다.
  
  현실에 자극받지 않는 민족의식은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민족’은 거룩한 관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하는 사람도 ‘민족’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는 처신을 삼가야 한다는 관념을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민족의식은 현실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고민을 덜 하고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을 찾는 실제적 노력이 그들의 민족주의다. 중국의 국력을 키우는 데 공헌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의 투자유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타협주의? 패배주의? 타협도 좋고 패배도 좋다. 조선족 자제 중 빼어난 인재들이 민족사회를 떠나 사는 길을 강요받는 이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혼동되기 쉽다. 전세계 8천만 가까이로 추산되는 한민족 인구의 60%가 남한에 살고 있고, 경제주체로서도 다른 어느 곳의 한민족 집단보다 월등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 속에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인이 한민족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 조선족이든, 러시아 고려인이든,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한민족의 일원으로 행세하려면 뛰어난 민족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한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닥쳐오는 세계화의 시대, 통일의 시대에 이런 민족주의가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이겠다. 그런데 다른 문명권들이 블록화의 길을 걷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웃 나라들을 깔보고 미워하려고만 들며 블록화를 거부하는 독선이 바람직한 자세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체제를 겪어 온 한민족 집단들을 포용해야 할 통일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관념과 표준에 벗어나는 것을 일체 배격하는 편협성이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민족주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한국인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 조선족은 중국의 통치권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각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키워 왔는지는 서로 배울 일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거룩한 관념이 아니라 괴로운 현실로 끌어안고 씨름하는 자세는 단연 한국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