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던 아내가 혀를 쯧쯧 찬다. "1등이 의사 노릇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다 불똥이 내게로 날아왔다.

 

"여보, 당신도 학교 때 1등 했다던데, 그래서 잘하는 게 뭐가 있어요?"

 

심사가 편치 않을 때 잘못 건드리면 무조건 역린이다. 눈치를 살피며 눙치고 들었다. "내가 당신 남편 노릇 하나는..."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가로챈다. "꼬래비지!"

 

"아니 여보, 꼬래비라니! 그래도 그거 하나 잘하려고 밤낮으로 애쓰는데..."

 

좀 너무했다 싶은지 조금 물러서 준다. "어차피 하나뿐이니까 꼬래비면서 1등이죠."

 

1등도 체질에 맞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아무 데나 잘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일찍 시들해지고 오히려 짐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남편 노릇만이 아니라 하는 일도 "1등이면서 꼬래비" 식으로 하게 되었다. 제도에 의지하는 조직활동을 등지고, 가치를 내 스스로 찾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30년 전 대학 떠난 얼마 후 조직활동 등진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하이텔과 천리안으로 '전자통신'을 할 때였는데, 어느 동호회의 한 차례 소동에 말려든 일이 있었다. 지인 (통신상의) 한 분이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십자포화에 걸려 있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지인과의 관계는 드러내지 않고 나름대로 객관적인 논평을 올렸더니 흥분이 많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중 극렬분자 한 사람이 내 뒷조사를 해갖고, 원래 문제를 일으켰던 지인과 한통속이라고 몰아붙인 뒤에 내 이력까지 까밝혔다. "어느 대학 교수로 있다가 제풀에 그만뒀다고 하니, 아무래도 조직활동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조직활동 능력을 사람 평가의 큰 기준으로 삼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했다.

 

"제가 조직활동 못한다고 보신 것은 맞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개님은 조직활동밖에 못하는 분 같군요."

 

그분은 지금도 조직활동 열심히 하고 있겠지. 광화문?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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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지폐가 널리 쓰였는데 왜 유럽에서는 그러지 않았을까? 학생 시절 어쩌다 이 문제로 토론을 벌이던 끝에 한 친구가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거기는 종이가 없었잖아!”

 

12세기까지 지폐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답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종이가 없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나?

 

제지술은 진입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은 기술이다. 종이가 없던 사회에서 종이를 구경하고 그 좋은 점을 알게 되면 모방하기가 어렵지 않다. 식물성 재료를 빻아 섬유질을 분해한 다음 물에 섞었다가 체로 걸러내 말리면 된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재료를 선택하고 공정을 설계하는 데 먼 길을 걸어야 하지만, 일단 종이 비슷한 것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과 교류하는 사회에서는 종이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중국 왕조에서 내보내는 외교문서 대부분이 종이에 작성되었고, 황제의 하사품 중 중요한 품목 하나가 종이였다.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문헌을 곁들인 새 역사>에 재활용지로 만든 수의(壽衣)가 연구 자료로 많이 활용된 데서도 종이 사용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105년에 발명된 제지술이 751년 탈라스(怛羅斯, Talas)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세계에 전파되고, 12세기 이후에야 유럽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처럼 유용하고 모방하기 쉬운 발명품이 이웃 문명권으로 전파되는 데 왜 수백 년씩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일단 이슬람권 전파를 보면, 6세기 반의 시차를 줄여 볼 여지가 있다. 2세기 초에 제지술이 발명되었지만 종이의 사용이 크게 확장된 것도, 황제의 하사품에 종이가 들어간 것도, 7세기 당나라 때의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당나라가 상대한 것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에게는 종이의 용도도 적고 식물성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종이를 사용했을 뿐, 제지술 자체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탈라스 전투는 새로 일어난 이슬람제국과 당 제국 사이의 최초의 정면대결이었다. 아바스 제국은 당나라 황제에게 선물(하사품)로 받는 종이로 만족할 수 없는 큰 잠재적 수요를 갖고 있었고, 또한 독자적으로 제지술을 발전시킬 재료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s#/media/File:Battle_of_Talas.png (지금의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크스탄 사이에 있는 탈라스 지역에서 아바시드-티베트 연합군과 당나라 군대가 751년에 충돌한 탈라스 전투는 중화제국의 서방 확장을 끝낸 계기로 일컬어진다. 당나라 사령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라 해서 우리 사회에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제국이 성립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에서도 보편화된 지 오래지 않은 제지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이슬람권에 서쪽으로 접한 유럽 기독교권에 제지술이 전파되는 데 장장 4세기의 시간이 걸린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종이의 재료도 흔한 유럽에 제지술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종이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종이는 다양한 용도를 가진 물품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기록이다. , , , 점토판, 파피루스, 죽간, 양피지 등 정보의 축적과 전달에 사용되었던 다른 어떤 재료도 따를 수 없는 정보 매체로서 큰 역할을 종이가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Paper#/media/File:Various_products_made_from_paper.JPG (종이의 다양한 용도)

 

문명 발달 수준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정보처리 기술이다. 복잡한 내용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언어가 문명 발생의 기반이었다. 정보를 보관하고 축적할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 다음 단계 문명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정보의 대량 전파를 가능케 한 인쇄술이었다. 중국에서는 비단에 목판으로 무늬를 찍은 22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종이에 찍은 목판인쇄물은 7세기 중엽부터 나타난다. 이슬람권에서는 제지술 도입 후인 9-10세기 중에 인쇄술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내가 16세기 이전 유럽 문명을 매우 저급한 수준으로 여기게 된 것은 1985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방문했을 때부터다.(첫 서양 체류 때였다.) 코르도바는 8세기부터 이슬람제국 통치하에 있다가 13세기에 기독교세계로 수복(Reconquista)’된 곳이다. 8-9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일각을 허물고 대성당을 지어서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Mezquita-Catedral de Córdoba)’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모스크 건축의 우아함에 대비되는 대성당 모습의 사나움에 충격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빠져 지내던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osque%E2%80%93Cathedral_of_C%C3%B3rdoba#/media/File:Mezquita_de_C%C3%B3rdoba_desde_el_aire_(C%C3%B3rdoba,_Espa%C3%B1a).jpg (8세기의 문명과 16세기의 야만이 한눈에 대비되는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media/File:Granada-Day2-33_(48004306883).jpg (그라나다의 헤네랄리페 분수.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에 이어 이 분수를 보면서 이슬람 미술의 깊이를 실감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럽-서양을 흠모하던 마음이 뒤집히면서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다. 그러나 8-12세기에 중국과 이슬람권이 제지술을 공유하고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유럽이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유럽의 훗날의 위세를 덮어놓고 새로운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아직 제지술을 배우기 전의 유럽은 중국이나 이슬람권과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갖지 못하고 이슬람문명의 외곽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3세기 몽골인의 세계정복과 19세기 유럽인의 세계정복 사이에 통하는 점도 꽤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중심부(core)-반주변부(semi-periphery)-주변부(periphery)3중 구조로 설명했다. 선진국-중진국-후진국의 통속적 관념을 넘어 그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밝힌 것이다. 세계체제론이 큰 각광을 받은 데는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함의가 크다는 이유가 있다. 종래의 관념으로는 어느 나라든 좋은 (자본주의) 정책을 잘 수행하면 모두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세계체제론에서는 구조적 제약을 지적한 것이다. 이 점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차우두리와 아부-루고드가 월러스틴 담론의 뼈대를 수긍하면서도 넘어서야 할 한계로 지적한 것은 한 마디로 유럽중심주의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추동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만을 진정한세계체제로 보는 데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항해시대 이전 인도양의 교역망에서도 세계체제의 특성이 충분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애쓴 것이다.

 

15세기 이전의 인도양 교역망이 치밀하게 발전해 있었고, 그 교역을 둘러싼 금융업 등 자본주의 제도들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 연구에서 확인하면서 뒤따르는 의문이 있다. 인도양뿐이었을까? 두 사람 모두 인도양과 특별한 연분을 가진 연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도양으로 눈길이 먼저 간 것은 아닐까?

 

세계체제론을 유럽중심주의의 굴레에서 풀어내는 데 참고가 될 사례는 13-14세기의 인도양 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일 먼저 비슷한 시기의 내륙아시아를 살펴보고 싶다. 인도양 못지않게 인적-물적-사상적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이 지역에 특별한 연분을 가진 사람들 중에 차우두리나 아부-루고드만큼 학문적 세계체제중심부에 자리 잡은 연구자가 없었다. 그래서 인도양이 먼저 것은 아닐까? 1990년대 이후에는 내륙아시아 지역에 관해서도 이 시각에서 참고할 만한 연구가 나오지 않았을까?

 

토머스 올슨의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 서론 한 대목을 읽으며 바다와 초원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생각해 본다.

 

유목민을 시야에 담을 때 상황의 전개에 대한 유목민의 역할은 통상 “소통”과 “파괴”라는 두 개의 상투적 표현으로 정리된다. 전자의 의미는 유목민이 원거리 교통과 통신을 보장하는 광역 평화체제(pax)를 만들어 여러 정착문명의 대표자들이 (마르코 폴로처럼) 유라시아의 여러 문화권을 돌아다님으로써 전파의 촉매가 되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의미는 반대로, 흉포한 군사력으로 접촉을 막고 문화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4-5쪽)

 

바다에도 소통파괴의 양 측면이 있다. 항로가 열리기만 하면 멀리 떨어진 사회들 사이의 접촉을 쉽게 해주는 소통의 축면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참혹한 재난을 가져오는 파괴의 측면이 있지 않은가. 여러 문명권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그 사이의 공간이 바다와 초원이었다. 그 공간의 파괴력이 문명권들을 떼어놓고 있었지만 조건에 따라 소통의 경로가 되기도 했다.

 

초원은 바다와 달리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두 문명권 사이에 접촉이 일어날 때 유목민이 단순한 택배업자와 달리 제3의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올슨은 강조한 것이다.

 

하나의 문명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문명권을 세계로 인식했다. ‘천하라 부르든 움마(Ummah)'라 부르든 사람들이 세계로 인식하는 영역 내에서는 장기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종의 세계체제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하나하나의 체제마다 중심부와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있었을 것이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라는 이름 자체가 중심부중심주의’, 중심부가 역사 추동의 주체이며 주변부는 끌려 다니는 객체라는 선입관을 보여준다. 유목민의 역할을 생각하며 나는 중심부, 외곽, 배후지로 바꿔서 부르고 싶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내부 유라시아경계지역(borderlands)'을 각 문명권의 외곽(periphery)’으로서 산업이 미개한 배후지(hinterlands)’와 구분하는 것이다. 외곽의 유목민은 인접한 문명권에 어느 정도 소속되어 있지만 완전히 매인 것은 아니다. 위치와 상황에 따라 둘 이상의 문명권에 함께 속할 수도 있다. 문명과 접촉이 적은 배후지는 미개발 자원의 상태로 남아있다.

 

토머스 쿤이 말하는 정상상태(normal state)’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순환이 문명의 역사에도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의 정상상태에서는 중심부가 역사를 추동하고 외곽의 유목민은 종속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이르러 총체적 변화를 겪을 때는 유목민이 주도적 역할을 맡기 쉽다. 기존 문명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다른 문명을 받아들이기 쉽고, 배후지의 자원을 동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흥기는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