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님 말씀하시곤 하는 "염하는 마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쓰러지실 때 갖고 계시던 책을 우리 집에 갖다놓았었죠. 돌아가신 후에도 뒤져보지 않고 그대로 모셔놓고 있었습니다.
이번 이사를 계기로 제 책은 크게 줄였습니다. 꼭 지킬 이유가 있는 책 외에는 가급적 떠나보낼 마음으로... 인연 닿은 연구소 두 군데 보낼 책 보내고... 이가 고서점에서 가져갈 만한 책 가져가게 하고... 또 한 고서점에서 추려가게 하고... 그러고도 길 못 찾은 책은 폐지로 버렸죠. 절반 넘게 떠나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책은 정리하지 못했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어떤 책을 어떤 뜻으로 지니고 계셨던 건지 촌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그 책이 이제 제 서재의 절반을 점령한 상황이 되니 비로소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제딴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지킨다는 것이지만... 남기신 책이 저렇게 짐으로만 남아있게 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제대로 모시는 길이 아니었다는 생각. 그래서 다른 할일 제쳐놓고 그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버릴 책은 버리고, 기증할 책은 기증하고, 지킬 책은 지키도록.
한 학인으로서, 그리고 불제자로서 어머니가 지니고 계시던 책 중에는 아끼시던 책도 있고 필요로 하시던 책도 있고 어쩌다 짊어지고 계시던 책도 있지요. 그 책들의 의미를 정밀하게 판단할 수는 없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파악해서 갈 길을 잡아 드리는 것이 물려받은 사람의 도리이겠습니다. 거기서 "염하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가신 분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대로 남기는 길을 찾는 마음. 마냥 그대로 지키겠다고만 하는 것이 떠난 분에게도 도리가 아니군요.
고서점 이 선생에게 경의를 느낍니다. 책 가져간 뒤에 전화를 주셨더군요. 아버지 책(<조선역사>) 갖고 있는 것 하나를 제게 갖다주고 싶다고. 제게서 책을 가져가는 가운데 마음에 감흥이 있으셨나 봅니다.
제가 불원간 들러서 받아가겠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제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선생님이나 정 선생님이 지나는 길 있으면 받아놓아 두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업 하는 분이 무한정 기다리시게 하기도 미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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