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를 석권한 몽골 군사력의 장점은 어디에 있었는가? 기마병의 위력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보다 덜 알려진 또 하나의 장점은 공성술(攻城術)이었다. 페르시아와 러시아 지역에서 기마병은 익숙한 존재였고 그만큼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금나라로부터 “싸우면서 배운” 투척기 등 공성술은 처음 당해보는 서방 세력에게 절대적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과 이슬람권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의 투척기가 발전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53년 훌레구의 페르시아 정벌 때는 중국인 투척기 기술자 1천 호를 데려갔고, 1272년에는 훌레구가 시리아 기술자를 보내 양양(襄陽) 공격을 돕게 했다고 한다. 토머스 올슨 <몽골제국의 상품과 교역> 9쪽)

 

13세기의 중국에는 공성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다른 문명권으로 쳐들어가 그 기술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몽골군은 중국 발명품을 서방으로 가져가 그 가치를 마음껏 발휘한 것이었다. 공성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기술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70년에 걸친 정복 기간 동안 여러 문명권의 기술과 제도 중 쓸모 있는 것을 꾸준히 채용함으로써 몽골군은 막강한 전투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방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방법도 그 기간 중 진화를 계속했다. (Linda Komaroff 편 <Beyond the Legacy of Genghis Khan>에 실린 John M. Smith, Jr.의 "Julegu Moves West: High Living and Heartbreak on the Road to Baghdad", pp. 124-128)

 

문명권의 외곽부는 중심부와 달리 문명의 일부 요소만을 누린다. 그래서 외곽부의 유목민은 중심부의 농경민에게 ‘야만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목민이 누리는 문명의 ‘불완전성’이 오히려 농경사회에 대한 우위를 뒷받침해줄 때가 있다.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이르면 변화에 쉽게 적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단계에서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배후지로부터 확보할 조건도 외곽부가 유리하다. 중화제국과 북방 ‘오랑캐’ 사이에 수백 년을 주기로 밀고 밀리는 형세가 뒤집히기를 거듭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흥기에서 새로 나타난 현상은 중국과 이슬람권, 두 개 문명권의 영향을 함께 받으며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문명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영역을 확장해 왔고, 특히 이슬람권은 7-8세기 ‘이슬람 팽창’을 통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여러 고대문명권을 통합해서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자리 잡고 중국과 함께 유라시아대륙의 양대 문명권을 이루고 있었다. 

 

두 문명권의 확장에 따라 양자 간의 접촉도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751년의 탈라스 전투 이후 직접 충돌이 없었던 것은 중화제국의 후퇴 때문이었다. 안록산의 난(755) 이후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약화되었고, 5대10국(906-960)의 혼란을 정리하고 송나라가 일어선 뒤에도 서북방은 요-금과 서하에게 가로막혔다. 이 기간 중국과 이슬람권 사이의 교류에서는 남방 해로의 역할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해로는 인도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힌두-불교 문명권을 지나가야 했고, 그 때문에 양대 문명권 간의 직접 교류보다는 말레이반도-말라카해협 일대를 분기점으로 하는 중계무역이 주된 양상이 되었다. 요컨대 양대 문명권 사이에는 교류의 잠재적 수요가 커지는 데 비해 교류의 실현이 미흡한 상태가 오래 계속된 것이다.

 

물리학 강의실에서 듣던 ‘3체 운동(three-body problem)’이 생각난다. 뉴튼 물리학에서 움직이는 두 물체 사이의 중력관계는 고전수학으로 충분히 표현된다. 그러나 세 개 이상 운동체(예컨대 해와 지구와 달) 사이의 관계는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수학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문명 간 교류에도 마찬가지로 관계의 주체가 둘일 때에 비해 셋이 될 때 그로부터 파생되는 변이(variation)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 아닐까. 그중에는 돌연변이(mutation)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는 것 아닐까. 8세기 이래 중국과 이슬람권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 발전해 왔는데,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을 중심으로 한 유목민 세력이 양쪽 문명권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 3체 운동을 이루는 제3의 운동체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몽골제국은 동쪽에서 얻은 자산으로 서쪽을 압박하고 서쪽에서 얻은 자산으로 동쪽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명 간 중간세력의 흥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육로의 중간에 위치한 유목민만이 아니라 해로의 중간에 있던 해양세력도 비슷한 기회를 맞지 않았을까? 7세기 말에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인도에 다녀오는 길에 오래 체류한 스리비자야(Srivijaya)가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해양세력이었다. 스리비자야에게는 경쟁세력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크게 확장되지도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단계에서는 해양보다 초원이 세력 확장과 활동의 확대에 적합한 지정학적 조건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Posted by 문천

1206년에 대몽골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1227년 죽기 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초원제국을 일으켜놓았다. 서방의 서요(西遼, Qara Khitai)와 호라즘(Khwarazm, 花剌子模)을 격파하고(1218-1220) 카스피해 연안까지 진출했으며, 남쪽의 서하(西夏)를 멸망시켰다(1226). 흉노, 돌궐 등 종래의 어떤 초원제국보다 넓은 판도가 확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방대한 초원제국도 몽골제국 팽창의 첫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50년 후(1279) 남송(南宋) 정복이 끝날 때는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이 그 판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인도와 유럽, 그리고 이슬람세계가 완전히 석권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실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할 정도다.

 

이 설명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최고 통치자 대칸(Qaghan)의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다. 초대 칭기즈칸(1206-27)에서 5대 쿠빌라이(1260-94)에 이르기까지 계승 때마다 제국이 상당 기간의 마비 상태에 빠지고 내전을 겪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1229-41)가 물려받을 때는 그래도 순탄한 편이었지만 쿠릴타이(Kurultai) 절차를 거치는 데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 정복 사업 등 적극적 정책들은 보류 상태에 있었다.

 

오고타이 사후 그 아들 구육(1246-1248)이 물려받는 데 5년이나 걸린 데서 그 승계가 명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육의 뒤를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1251-59)가 물려받는 데는 3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 칭기즈칸 가문이 두 개 진영으로 갈라졌다. 톨루이 계와 조치(맏아들) 계가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오고타이 계와 차가타이(둘째 아들) 계가 이에 맞서는 대립이 길게 이어졌다.

 

대칸의 계승이 거듭될 때마다 몽골제국 지도부의 분열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오고타이 계승 때는 쿠릴타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만 정복 사업이 중단되었지만, 구육과 몽케의 계승 후에는 제국의 통합성이 약해졌다. 쿠빌라이 계승 때는 두 개 쿠릴타이가 따로 열리며 내전이 일어났고, 제국이 4개 칸국(汗國, Khanate)으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국가 규모가 커지면 왕위 계승을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지도자 개인의 능력(완력과 지혜)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에 능력 위주로 후계자가 결정되고, 왕조가 세워진 뒤에도 형제 계승이 많다. 그러나 많은 후보자 중에서 선택할 경우 더 유능한 인물이 뽑힐 가능성은 크지만,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정통성’의 기준을 세워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도를 안정시키게 된다. 중국 고대 상(商)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 계승이 많았지만 주(周)나라에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신하가 군주를 선택하는(擇其君)’ 것은 반역의 죄목이 되었다.

그러나 장자 계승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도 적지 않았다. 한(漢) 고조(전206-전195)가 죽고 15년간의 혼란 후 문제(전180-전157) 이후에야 계승이 안정되었고, 당(唐) 태종(626-649)은 형제들을 죽이고 부황을 겁박해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송(宋) 태조(960-976)도 아우 태종(976-997)에게 계승되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에서도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 즉위 과정에서 장자 계승 원칙이 유린되었다. 불확실성이 큰 창업(創業) 단계에서는 이념적 정통성보다 현실적 역학관계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족장회의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던 쿠릴타이의 전통에 계승 과정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럴싸하지 않다. 칭기즈칸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조직 원리를 만들거나 채용했다. 남송(南宋)과 금(金)나라는 물론이고 서요와 서하에서도 황위의 장자 계승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으니, 좋아 보였다면 얼마든지 따라했을 것이다. 자신이 후계자를 지정하고 쿠릴타이가 추인하도록 하는 방법은 그가 정한 것이었다. 추인의 과정은 계승의 타당성을 모든 구성원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쿠릴타이 석상에서 후계자를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대하는 길은 참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후계자 옹위 세력은 쿠릴타이 기간 동안 군대, 영토, 재산 등의 재분배로 참석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칭기즈칸이 정한 계승방법이 그 자신의 계승에서는 꽤 원활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형제간의 선택이 아니라 4촌간의 선택이 되면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길을 찾기 어렵게 되어 내전의 위험까지 일어난다. 

 

모든 구성원은 아니라도 대다수 구성원을 만족시킬 길이 있다면 이 계승방법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급속한 확장이 많은 구성원을 만족시킬 자원을 늘려주고 있는 한, 계승과정에서 불거지는 갈등은 구조조정의 열쇠로 순기능을 발휘했다. 쿠빌라이가 형인 몽케를 계승할 때 동생인 아리크 보케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남으로써 이 계승방법의 한계가 드러났다. 쿠빌라이 이후는 장자 계승 제도가 채용되었으나 그 대신 4개 칸국에 대한 ‘대칸’의 통치권이 줄어들어 ‘몽골제국’은 실질적 분열 상태로 들어섰다.

 

몽골제국이 능률적인 계승방법을 채택해서 계승에 따른 혼란을 줄였다면 더 큰 제국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상적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200년대에서 1270년대까지 몽골제국은 파격적인 팽창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거듭거듭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대칸 계승 때마다 한 차례 휴식기는 새로운 상황에 맞추는 제국의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휴식기가 없었다면 제국의 팽창기가 60년 넘게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2020. 9. 7. 21:57

 

중국과 중국어에 익숙해지기 위해 틈날 때 중국 드라마를 찾아 본다. 사극을 우선적으로 보게 된다. 내용도 쉽게 파악되고, 말도 좀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중국 드라마가 한국을 벤치마킹한다는 인상을 대강 받는데, 더러 대작을 마주칠 때가 있다. 마음먹고 만들 때는 한국과 차원이 다른 자원 투입을 하는 것 같다. 한 무제를 각색한 "漢武大帝"가 그런 예다.

 

연전에 그와 또 차원이 다른 작품 하나가 나왔다. "랑야방". 남조 양나라 무제를 각색한 건데, 너무 재밌어서 보고 또 보기를 너댓 차례 했다. 지금도 한국 중화방송에서 또 내보내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 또 하나 작품을 보며 깜짝 놀라고 있다. 송나라 인종의 조정과 후궁을 그린 "淸平樂"인데, 판타지에 걸친 "랑야방"과 달리 정통 사극이다. 내가 놀라는 것은 흥행성보다 깊이있는 작품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치사상이 현실에 작용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송나라는 문화가 크게 꽃피우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약세를 보인 역설적인 모습으로 알려진 시대다. 특히 인종 때는 서하의 칭제로 그 약세가 특히 두드러진 시기다. 그런 시기에도 황제와 신하들이 (그리고 황후도!) 좋은 정치를 펼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월~금 10시에 중화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다. 앗! 보러 갈 시간이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란드인이 된 기쁨  (1) 2023.06.10
"1등이면서 꼬래비"  (0) 2020.09.05
Robertson Davies, Kurt Vonnegut...  (0) 2018.12.20
"殮"  (1) 2018.12.16
"옛날 노인, 범 안 잡은 사람 없어"  (0) 2018.12.0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