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인도 등 인도양의 인접 지역에 여러 고대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에 인도양의 해상 교역은 일찍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러 문명 유적에서 종종 발굴되는 먼 지역의 물품으로 그 시기 교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교역은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자급자족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타 지역 물품에 대한 수요가 작았고, 선박과 항해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단계에서 해상운송의 비용과 위험이 컸다. 그래서 장거리 교역의 대상 품목은 소량의 사치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잉여생산율의 확대와 도시의 성장에 따라 식량, 직물 등 생필품까지 교역 대상이 되고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해상 교역이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다가 인도양에 안정된 교역망이 자리 잡고 교역량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는 계기가 7-8세기의 이슬람혁명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차우두리와 아부-루고드의 견해가 일치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도시가 교역의 거점으로 일어난 것처럼 큰 경제권을 배후지로 가졌거나 장거리 항로의 요충에 위치한 항구들이 교역의 거점으로 자라났다. 이 거점들이 모두 통일된 정치조직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운송비용이 줄어든다. 교역로의 유지 등 제국 차원의 비용만 징수하면서 지방 세력의 착취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같은 제국에 속하지 않더라도 같은 문명권에 속해서 말이 통하는관계라면 그에 버금가는 조건을 누릴 수 있다. 이슬람의 확산은 인도양 연안의 넓은 지역에 이런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아부-루고드는 인도양을 아라비아해(아프리카 동해안과 인도 서해안 사이), 벵골만(인도 동해안과 말레이반도-수마트라섬 사이), 남중국해(동남아시아와 중국 주변)의 세 개 해역으로 구분한다. 13-14세기에는 중국에서 아라비아 지역까지 세 개 해역을 관통하는 항로는 확립되지 않고, 각 해역의 분절점인 인도 동남-서남 해안 지역과 말라카 해협 일대에서 중계무역이 성행했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Indian_Ocean#/media/File:1658_Jansson_Map_of_the_Indian_Ocean_(Erythrean_Sea)_in_Antiquity_-_Geographicus_-_ErythraeanSea-jansson-1658.jpg (네덜란드인 얀손이 1658년에 그린 인도양 해도. 세 개의 해역이 유럽인들에게도 명확히 구분-인식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항로의 분절 현상이 계절풍 때문이라고 아부-루고드는 설명한다. 계절에 따라 항해가 가능한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이웃 해역으로 항해를 계속하려면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항구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바람의 방향이 항해를 힘들고 더디게 만들 수는 있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돛의 방향을 조정해서 역풍에 가까운 바람에서도 추진력을 얻는 기술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항해의 수익성이 충분하다면 한 차례 항해에 몇 해씩 걸리는 항로도 성립된다는 사실을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대항해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절풍의 제약은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부수적 조건으로 생각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Sailing#/media/File:Points_of_sail--English.jpg (완전한 역풍인 A 범위에서는 배가 나아갈 수 없지만 비스듬한 역풍인 B 범위에서는 돛의 방향을 그에 맞춰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바람의 방향대로 나아갈 때는 배의 속도가 풍속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요트 경주에서는 속도를 올리기 위해 바람에 비스듬하게 배의 방향을 잡는 것이 기본 기술이다.)

 

필립 커틴은 8-9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까지 인도양을 관통하는 항로가 활용되고 있었다는 견해를 보인다. 그 항로가 얼마나 많이 활용되었는지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지만 계절풍에 대한 그의 고려는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의 교역자 집단이 700년경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이제 페르시아만의 상인들이 중국까지 관통하는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한쪽 끝에 당 제국이, 다른쪽 끝에 아바스 제국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던 8-9세기에 이 항로는 널리 활용되었다. 계절풍 이용 방법을 약간 바꿈으로써 이런 항해가 가능해졌다. 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배가 9월에 페르시아만을 내려가 이제 익숙해진 돛 방향의 조정 기술(quartering tack)을 써서 북동풍을 뚫고 인도 남부로 건너간다. 그 뒤에는 남서풍으로 바뀐 계절풍을 이용해서 12월경까지 벵골만을 가로질러 남중국해에 들어서면 남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을 이용해서 4-5월 중에 광둥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가을에 북풍을 받으며 회항에 나서면 인도양에 북동풍이 시작할 때 들어설 수 있고, 4-5월 중에 페르시아만에 도착하게 된다. 이 일정에 따르면 초여름의 험한 날씨를 피하면서 왕복 1년반의 항해기간 중에 몇 개 항구에서 교역활동을 위한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배의 수리 등을 위해 반년의 휴식을 갖더라도 배 한 척이 2년에 한 차례씩 왕복할 수 있는 항로다. (<Cross-Cultural Trade in World History 세계사 속의 문명 간 교역> 108)

 

아부-루고드가 말하는 세 개 해역은 13-14세기에 서로 다른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서쪽의 아라비아해는 이슬람문명, 중간의 벵골만은 힌두문명, 그리고 동쪽의 남중국해는 불교문명과 한자문명이 어울려 있었다. 상인과 선원들의 활동은 각자의 문명권 안에서 편리하고 안전했다. 이방인의 세계로 항해를 계속해 나가 큰 이득을 바라볼 수 있더라도, 이득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되면 해역의 분기점에 자리 잡은 (양쪽 문명권과 모두 소통할 수 있는) 중계업자들과 거래를 끝내고 돌아가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교역이 더욱 활발해지고 교역량이 커지면서 문명권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활동도 늘어나고 그 활동을 통해 문명 간 융화 현상도 일어났다. 남송(南宋)의 해운 담당 관리 조여괄(趙汝适)이 남긴 <제번지(諸蕃志)>에 서아시아와 동아프리카 지역의 사정과 물산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도양의 문명 간 접촉이 13세기 초까지 벌써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도 이런 추세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13-14세기까지 인도양은 아직 하나의 바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 개 해역 하나하나가 교역의 무대로서 지중해 못지않은 역할을 이미 키워놓고 있었고, 하나의 더 큰 무대로 통합되는 길에 들어서 있었다. ‘유럽 패권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아부-루고드의 관점은 이 연구로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본다.

 

 

Posted by 문천

 

학술계의 유럽(서양)중심주의를 반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담론이 1970년대에 나왔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The Modern World-System (근대세계체제)>(4, 1974-2011)와 에드워드 사이드의 <Orientalism>(1978).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세계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살피는 길이 되었고,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은 근대학술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어떤 굴레에 묶여 있었는지 드러냄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두 개 담론을 아울러 수용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 두 가지가 1980년대에 나왔다. 키르티 차우두리의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1985)과 재닛 아부-루고드의 <Before European Hegemony (유럽 패권 이전)>(1989). 두 책 모두 근대 이전 인도양의 교역망을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이다.

 

차우두리는 서문에서 페르낭 브로델의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ippe II (펠리페 2세 시기 지중해와 지중해세계)>(1949)를 모델로 삼았음을 밝혔다. 브로델은 새로운 연구방법을 추구하던 아날학파의 대표적 연구자로, 월러스틴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차우두리가 브로델의 방법론을 계승하되 그 적용 대상을 인도양으로 옮긴 데는 브로델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차우두리의 의지는 그가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로 어느 정도 설명된다. 아부-루고드의 경우에도 개인적 이유로 비슷한 의지를 설명할 여지가 있다. 그 부군이 사이드와 함께 팔레스타인 출신의 양대 지성으로 꼽히는 이브라힘 아부-루고드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도 학술계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길이 이른바 3세계와 특별한 연고를 갖지 않은 학자들에게는 몹시 어려웠던 사정을 돌아볼 수 있다. 차우두리는 초년의 탁월한 동인도회사 연구를 발판으로, 아부-루고드는 도시사회학자로서 카이로 등 이슬람권 여러 도시를 관찰하고 연구한 경험을 발판으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

 

아부-루고드는 차우두리와 달리 브로델에 대한 비판의식을 분명히 한다. 아래 인용 중 세계-경제(world-economy)"는 브로델이 설정한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브로델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무의식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착오를 피할 수 없었다. “유럽에서 최초의 세계-경제는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사실, “여러 개 세계-경제가 ... 유럽이라는 지리적 영역 안에서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는 사실, 또는 “유럽의 세계-경제는 13세기 이후 몇 차례 모습을 바꿨다”는 사실을 모두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그는 내가 보기에 요점이라 할 내용을 놓쳤다. 12-13세기에 유럽이 지중해를 지나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거쳐 인도양, 말라카해협과 중국에 이르는 장거리 교역체계에 끼어들어 세계-경제의 ‘하나’를 빚어내기 전에 다른 곳에는 여러 개의 세계-경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세계-경제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유럽이 차츰 손을 밖으로 뻗쳐 더듬어보기 시작했을 때 재부(財富)가 아니라 허공만 움켜쥐었을 것이다. (<유럽 패권 이전> 11-12쪽)

 

7-18세기의 1천여 년 기간을 다룬 차우두리의 책에 비해 13-14세기의 1백년 기간을 다룬 아부-루고드의 책이 16세기 후반을 다룬 브로델의 책과 더 잘 비교된다. 그리고 몽골제국 성립 시점에 문명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려는 내 과제에도 적합한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13세기에 여러 문명권이 어울려 새로운 현상을 빚어내고 있던 두 개의 큰 마당 중 하나가 내부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였고, 또 하나가 인도양이었다. 바다 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아부-루고드의 안내를 따라가 본다.

 

Posted by 문천

 

문명(civilization)’의 기본 의미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문화(culture)'도 비슷한 뜻을 품은 말이다. 두 개의 말을 구분해서 쓰는 데는 사람마다 꽤 차이가 있는데, 나는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경우에 문명이란 말을 쓰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의 메커니즘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접한 두 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갖고 있을 때, 한 쪽이 다른 쪽을 부러워해서 따라 할 수도(동화 assimilation) 있고, 더 큰 힘을 키운 쪽이 자기네 방식을 다른 쪽에게 강요할 수도(정복 conquest) 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몇 개 지역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초기 농업에 적합한 자연조건(기온, 강우량, 지형)을 가진 곳의 인구 증가에 따라 인접한 사회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동화와 정복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합쳐지게 된 것이다.

 

각 문명권은 바다, 산악, 건조지대 등 농경이 불가능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상호 접촉이 극히 적은 반면 농경지가 연결되어 있는 하나하나의 문명권이 그 안의 사람들에게 세계(world)’로 인식되었다. 하나의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empire)'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룰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문명권으로서 정체성은 그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제국이란 말에도 혼란이 있는데, 나는 하나의 문명권을 포괄하는 정치조직이란 뜻으로 제한해서 쓰려고 한다.)

 

문명권의 위치와 규모는 일단 지리적 조건으로 결정된다. 그러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 발전으로 농경지가 확장되면서 문명권이 커지고, 인접한 문명권의 통합도 이뤄지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유역은 별개의 문명으로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그 사이에 큰 지리적 장벽이 없기 때문에 접촉이 점차 늘어나다가 7-8세기 이슬람혁명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혁명 다음의 문명권 지각변동이 13세기의 몽골제국이었다. 그 사이 문명권의 분포를 개관한다면, 동아시아에 중국문명권이 있고 남아시아에 힌두문명권이 있었으며, 이슬람문명권이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유럽에 기독교문명권이 있었다.

 

몽골제국이 여러 문명권의 상당 부분을 정복해서 이룩한 역사상 최초의 다문명제국에서 문명권 통합의 추세를 읽을 수는 없을까? 김호동은 문명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를 시야에 담는 세계사의 탄생이 몽골제국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한다.

 

필자는 세계사에서 ‘근대성’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느냐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 논의들을 재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 아부 루고드의 제안을 제외한다면, 연구대상이 되는 시대는 대체로 ‘대항해의 시대’가 시작되는 15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우리는 ‘대항해의 시대’가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던 13-14세기는 ‘대항해의 시대’와 그 이후에 나타난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세계의 출현을 논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몽골 시대가 남긴 영향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실상 별다른 영향이나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농경지대와 정주문화를 중시하고 유목의 세계를 소홀하게 여기는, 편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과거의 전통적인 관점 때문일까?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199-200쪽)

 

20세기에 보편화된 근대적 학술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이라서 유럽중심주의의 편향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유럽 패권 이전을 살피는 역사학에서도 그렇다. 모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유럽 전통에서 찾으려는 심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객관적 시각을 지키려 애쓰는 학자들조차도 유럽사를 보는 틀에 모든 지역의 역사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주제가 근대성(modernity)'이다. ’근대라는 시대를 유럽의 발명품처럼 여기고 모든 인류가 이 새로운 시대의 혜택을 받기 위해 유럽의 특성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근대화의 바람이 20세기를 휩쓸었다. 근대문명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근래 늘어나면서 근대성의 의미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확대-심화되고 있다.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을 문명권 간의 장벽 제거, 세계화라는 밑바닥 의미에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 이뤄져 온 과정이다. 7-8세기 이슬람혁명도 문명권 통합이란 의미에서 이 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3세기 몽골제국에서는 더 진전된 단계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