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는 7세기 초 수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운하의 이로움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인식되어 전국시대부터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북중국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대(大)’운하는 남북조의 대립을 끝낸 수나라가 천하제국의 통일성을 담보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약도

 

 

당나라 말기에서 5대10국까지 혼란기에 남중국과 북중국 사이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군벌(절도사)이 할거한 북중국과 달리 남중국은 쇠퇴해 가는 당나라의 마지막 밑천으로 남아 있다가 과도한 착취에 항거하는 일련의 민란을 통해 무너져갔다. 5대10국 중 ‘5대’는 북중국에서 꼬리를 물고 천자국(天子國)을 자칭한 단명한 왕조들이었고 ‘10국’은 대부분(北漢을 제외하고) 남중국에 할거한 지방 세력이었다.

 

남북을 다시 통합한 송나라에게도 운하체제의 정비가 중요한 과제였다. 송나라의 수로 정비 사업에서 눈에 띄는 것 하나가 2중 갑문(閘門)의 발명이었다. 조지프 니덤은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중국의 과학과 문명> 제4부 3권 351쪽에서 이 발명이 984년 송나라 관리 교유악(喬維岳)에 의해 이뤄진 사실을 밝혔다.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대운하만을 놓고 보더라도 수면의 표고차가 약 40미터에 달한다. 다른 수로에는 표고차가 더 큰 곳도 있다. 그 때문에 수로 곳곳에 물살이 빠른 곳이 있는데, 종래에는 그런 곳을 지날 때 인부들이 기슭에서 밧줄로 배를 끌고 지나갔다. 많은 물이 계속 흘러내리지 않으면 배가 바닥에 부딪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갈수기에는 막힐 때가 많았고 평시에도 통과가 힘들고 오래 걸렸다. 2중 갑문의 발명은 이로 인한 ‘병목 현상’을 해소함으로써 수운 체제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2중 갑문의 구조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문명이 빚어낸 초대형 구조물로 명성을 떨친다. 그런데 대운하는 하나의 독립된 구조물이 아니라 중국의 방대한 수로 체계를 대표하는 한 부분이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의 수로 체계는 세계 최대-최고의 내륙 교통망이었다. 7세기 이후 남중국 경제와 문화의 눈부신 발전은 수로 체계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옛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대운하의 구간

 

 

 

관광자원이 된 대운하의 모습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늘어나더라도 잉여생산물을 처분할 시장이 원활하지 않으면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나라 이후의 남중국에서는 수송비가 극히 저렴했기 때문에 시장 기능이 극대화될 수 있었고, 농민은 자급자족의 틀에서 풀려나 생산성 제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상업 활동은 소수 상인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대다수 서민의 일상이 되었다.

 

금속화폐 사용에서 금화, 은화 등 귀금속이 주종이던 다른 지역과 달리 중국에서는 동전이 압도적이었다는 사실도 중세 중국경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액권인 금-은화는 전문 상인들의 대규모-장거리-귀중품 교역에 주로 사용되고 소액권인 동전은 서민의 일상적 경제활동을 뒷받침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송나라의 탁월한 문명수준에 관해서는 문학-예술-상업-기술-제조업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나와 있어서 어떤 것을 인용할지 판단이 어려울 정도다. 꽤 오래 전에 나온(1959) 자크 제르네의 인상적인 논평 한 대목을 소개한다.

 

13세기의 중국은 놀라운 정도의 근대성을 보여주었다. 전폭적인 화폐경제, 종이 화폐, 결제 제도, 고도로 발달한 차와 소금 관련사업, 대외무역의 큰 비중, 그리고 지역별 생산의 전문화 등이 눈에 띈다. 상업의 큰 영역들을 무소부재의 국가가 장악하고 국가전매와 간접세로 세수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었다. 사회생활과 예술, 오락, 제도, 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중국은 당시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확연히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 밖의 어느 곳에도 야만인밖에 없을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H. M. Wright, tr.,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18-19쪽)

 

제르네가 보는 송나라의 ‘근대성’이란 무(武)에 대한 문(文)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의 양적 팽창보다 질적 발전을 택한 것이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노선이 지속되는 동안 경제와 문화가 한껏 발전할 수 있었다. 이 평화노선은 1276년 몽골의 무력에 짓밟혀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오히려 몽골제국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친 측면도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

 

중국의 왕조 중 오랑캐에게 정복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 혼란으로 무너지고 난 뒤에 오랑캐 왕조가 들어와 공백을 메운 경우가 많다. 명나라가 특히 분명한 경우다.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된 후 명나라 주력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오삼계(吳三桂)가 대치 중이던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5호16국(五胡十六國)도 한-위-진(漢-魏-晉)의 혼란이 수습되지 못한 끝에 용병 역할로 중화제국 안에 들어와 있던 오랑캐들이 정권을 세운 것이었고, 요-금(遼-金)도 중국의 혼란에 흡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나라는 제국 체제에 결정적 파탄이 없는 상태에서 오랑캐의 힘에 압도된 이례적인 경우로 보인다. 다른 오랑캐의 중국 정복과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중화제국과 중국문명 사이의 간격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중국문명 전체를 정치적으로 조직한다는 중화제국의 이념은 현실 속에서 완벽한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문명의 경계선은 제국의 국경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농경 지역만을 제국에 넣을 때도 있었고 주변의 유목 지역까지 포괄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융성할 때는 많은 유목 지역이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제국의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당나라 후기의 절도사 세력과 그에 이은 5대10국(五代十國)의 대부분은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오랑캐’를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송 태조가 즉위 후 옛 동료 장군들에게 병권 해제를 권한 일화는 군사력 중앙 집중을 꾀한 송나라의 기본정책을 보여준다. 조정 직할의 금군(禁軍)이 송나라 군대의 주축이 되었다. 군사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내 군대’를 내 세력으로 키우던 종래의 장군들 대신 월급쟁이 지휘관들이 군대를 관리하게 되었고, 그나마 최고위 지휘관들은 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중국의 경무(輕武) 전통이 이때 확정되었다.

 

제국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군벌(軍閥)’의 위상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조직의 특성을 문관들에게 침해받지 않고, 조직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전투에 임하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군대가 필요로 하는 독립성은 상황에 따라 제국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 안록산의 난(755) 이후 2백 년간 중국을 괴롭혀 온 이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영광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송나라의 이 선택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면 한 무제나 당 태종보다 더한 제국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 것을! 요나라와 금나라에게 굴욕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다가 몽골에게 멸망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득실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송나라에게는 군사적 열세와 강역의 축소를 감수할 만한 이득이 있었다. 요-금에 대한 세폐는 넓은 강역의 확보-유지를 위한 군사비에 비하면 약소한 액수였고, 강력한 군부의 존재로 인한 권력구조의 위험이 없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송나라의 노선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말하는 ‘재정(財政)국가’의 길이었다. 풍부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선택이었다.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학술, 사상, 상업, 문화를 한껏 발전시킨 송나라의 경제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양자강 유역의 농업생산력 발전이 그 근거였다. 농업기술 발달에 따라 강우량이 큰 양자강 유역의 생산력 발전이 북방보다 빨랐고, 송나라 때는 인구가 북방보다 더 많아졌다. 프란체스카 브레이는 <The Rice Economies 벼농사 경제지역>(1986) 203-206쪽에서 송나라 때 벼농사 기술 발전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던 사실을 설명했다. 1012년부터 참파 지역의 품종을 들여와 2모작을 시작하게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송나라 경제의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한편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준 것은 운하 중심의 수운(水運) 네트워크였다. 수운 네트워크는 황하 유역보다 회하-양자강 유역 남중국에서 크게 발달해서 중국의 실질적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가는 조건이 되었다. 1126년 수도가 금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황제 이하 온 조정이 통째로 포로가 되는 파국을 겪고도 남쪽으로 옮겨 제국 체제를 이어간 것은 남중국의 경제기반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

학생 시절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 서양의 흥기>(1963)를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바닥에 깔린 유럽중심주의가 불만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 “오랑캐의 역사” 작업에서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할 마음으로 다시 펼쳐보게 되었는데, 전에 못 본 글 한 꼭지가 붙어 있다. 1991년 재판의 서문으로 “25년 후에 되돌아보는 <서양의 흥기>”라는 글을 붙인 것이다.

 

1990년 시점에서 1963년 초판 내용을 반성한 이 글의 초점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다. 유럽의 후계자 미국이 온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1950년대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송나라 시대 중국문명의 힘과 중요성을 경시했던 것을 특히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다.

 

한 세대 전까지 내가 접하던 역사서술이 중국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 평가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으로 삼는다. 역사적 중국 강역의 한 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왕조라면 제대로 덕을 갖춘 황제 아래 강역이 온전하던 시대에 비해 열등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다. ... 자크 제르네(의 1972년 <Le Monde chinois>)에 이르러서야 초원지대에서 송나라 군대의 약세의 원인이 중국의 기술이 전통적 국경 밖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중국과 유목민 사이의 종래의 균형이 무너진 데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 균형의 붕괴는 칭기즈칸의 활동을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 파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xix 쪽)

 

이 고백에 접하며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50년 전 역사 공부를 시작하던 때에 비해 역사학계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많이 극복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학 밖의 다른 학술분야에는 이 변화가 아직 많이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단적인 예다. 유럽 패권으로 구축된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학설인데도 유럽의 전통 안에서만 문제를 고찰하는 경향은 가치관과 연구방법 자체가 유럽 전통에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맥닐이 송나라에 대한 평가를 특히 통절하게 반성하는 이유는 가치관이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최근 수백 년간 ‘국가 간 경쟁’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 시대의 ‘좋은 정치’는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치였다. 온 천하에서 폭력을 줄이는 과제 같은 것은 정치적 과제로 부각되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정치철학이 국가 이상의 분석 단위를 갖지 못한 사실을 자오팅양은 지적한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노승현 옮김 <천하체계> 29-30쪽)

 

송나라 때의 중국에도 국가주의가 있었고 애국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었다. 인종(仁宗, 1022-1063) 때 송나라 조정을 그린 연재사극 <청평악(淸平樂)>이 중화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당시의 정치상을 깊이 있게 다룬 일품이다. 인종 때는 서하(西夏)가 칭제(稱帝)하며 송나라가 위축된 시기인데, 그때도 유교 원리가 정치에 잘 반영되고 경제적 번영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 정책을 주도한 진회(秦檜, 1090-1155)가 최악의 간신으로 남긴 오명도 당시보다 후세의 평가로 이뤄진 것인지 모른다. 그가 죽은 50년 후 남송이 금나라를 공격할 때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2년 후 북벌이 실패한 후 회복되었고, 후세의 평가도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요나라 황손으로 금나라에 출사하다가 몽골의 조정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야율초재(耶律楚材)와 같은 실용주의도 그 시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것 아닐지.

 

북송 남송 가릴 것 없이 송나라의 문화와 예술은 전통시대부터 높은 평가를 누려 왔고, 근년에는 그 시대 경제와 과학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밝히는 연구가 많이 나왔다. 모든 방면에서 중국문명의 장점이 잘 발현된 시대로 이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문이 더 깊어진다. 이처럼 뛰어난 문물을 자랑하던 왕조가 군사적으로는 오랑캐에 대한 열세를 내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끝내 정복의 대상이 된 까닭이 무엇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