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원사(元史)>에 열전이 따로 없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원나라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1283년 일-칸국으로 떠난 후 원나라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열전에서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원사(元史)>의 여러 부분에 나오는 기록을 모아보면 열전 하나 만들기에 충분한 분량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이 라시드 알-(Rashid al-Din)<집사(集史, Jāmiʿ al-Tawārīkh)>에도 들어있다. <집사>는 올슨(<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2001)과 김호동(<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2010)이 모두 최초의 세계사로 지목한 책이다.

 

1248년 쿠빌라이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글을 배우게 한 귀족 자제 중에 볼라드가 있었다. 1260년 쿠빌라이 즉위 후 친위대 장교로 있다가 1264년 아리크 보케 심문에 참여한 뒤 관직으로 나아가 어사중승, 대사농, 어사대부를 지내고 1280년 중서성 승상의 직에 이르렀다. 그리고 40대 중반 나이에 사신으로 일-칸국에 갔다가 근 30년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올슨은 4개 부로 구성한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중 한 부를 볼라드에 바쳤다.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의 교류에서 그 역할을 매우 중시한 것이다. 그 역할을 통해 이뤄진 가장 크게 보이는 성과는 <집사>. -칸국 고관인 라시드가 편찬한 이 책에서 몽골과 중국의 최근 사정까지 소상하고도 정확하게 수록된 것은 볼라드의 공헌 덕분일 수밖에 없다고 올슨은 주장한다. <집사> 편찬에 많은 자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두 문명권과 초원지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볼라드의 경험과 식견이 뒷받침이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몽골과 중국에 관한 <집사> 내용 중 진짜 인사이더가 아니면 파악할 수 없는 미묘한 정보까지 많이 들어있음을 보면 올슨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볼라드의 아버지는 칭기즈칸 친위대의 간부이자 그 아내 보르테의 요리사였다고 한다. 요리사는 유목사회 지도자에게 최고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다. 볼라드가 소년기에 쿠빌라이의 자제들과 함께 공부한 일을 앞에 적었는데, 공부만 함께 했겠는가? 볼라드는 대칸 일족의 그림자와 같은 측근집단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아리크 보케 심문을 비롯한 민감한 사안에 관여하게 되었고, 관직에 나아가서도 일반 관리들과 달리 대칸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올슨은 또한 볼라드의 경력에 나타나는 통합-절충 능력을 중시한다. 그가 맡은 업무에서 예법(禮法)과 농정(農政)의 비중이 컸는데, 둘 다 중국문명의 핵심요소였다. 이런 업무에서 볼라드는 한인 관리들과 협력했다. 쿠빌라이에게 중용되어 2의 야율초재(耶律楚材)”로 일컬어지는 유병충(劉秉忠, 1216-1274)이 대표적 인물인데, 여러 번에 걸쳐 협력한 일이 있었던 것을 보면 협력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https://baike.baidu.com/pic/%E5%88%98%E7%A7%89%E5%BF%A0/712123/1/35e940df88244f5f48540346?fr=lemma&ct=single#aid=1&pic=35e940df88244f5f48540346 (유병충 초상. 승려로 지내다가 쿠빌라이에게 발탁되어 다년간 보좌하면서도 관직을 맡지 않고 있다가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후 근 50세 나이에 태보(太保)의 관직을 받고 장가도 들었다고 한다.)

 

올슨이 소개하는 유병충 등과 볼라드의 협력 사례를 훑어보면서, 어쩌면 볼라드의 통합-절충 능력이 당시 몽골 지도자의 대표적 덕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의 목표를 구체화하고 추진하는 역할은 한인 관리가 맡고, 볼라드는 진행을 순조롭게 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문명 수준이 낮은 유목민이 고급 문명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만 기대하며 전력을 기울이기보다, 진행이 늦더라도 안정된 자세를 지키면서 장기적인 성과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인 관리들이 각 방면 전문가였다면 볼라드는 관리자 역할을 맡은 셈인데, 관리자에게도 사업 내용에 대한 어느 수준의 이해는 필요한 것이다. 유병충은 중국사상의 전문지식 위에서 대원(大元)이란 국호를 제안한 것이고 쿠빌라이는 그 제안에 대한 의견을 볼라드 같은 사람들에게 듣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볼라드가 관리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다스릴 왕조의 청사진을 나름대로 뚜렷하게 그려놓고 있었을 것이다.

 

유목민 입장에서 정착문명을 지배할 정복왕조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 그것이 볼라드가 전문성을 가진 분야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쿠빌라이가 그를 일-칸국으로 보낸 뜻도 추측할 수 있다. 1260년 대칸에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대원 왕조를 선포하고 1283년까지는 남송 정복을 끝낸 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었던 반면 일-칸국에서는 1265년 훌레구(Hülegü)가 죽은 후 왕조가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3년은 아바카(Abaqa, 1265-82)의 뒤를 이은 동생 아흐마드(Ahmad, 1282-84)와 아들 아르군(Arghun, 1284-91)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최측근이면서 왕조 설계의 전문가 볼라드를 사신 명목으로 보내면서 왕조를 안정시키는 길을 도와주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Rashid_al-Din_Hamadani#/media/File:HulaguAndDokuzKathun.JPG (<집사>의 삽화로 들어있는 훌레구 칸과 도쿠즈 카툰 왕비의 초상. 케레이트 출신의 왕비는 네스토리아파 기독교인이었다.)

 

Posted by 문천

 

1271-95년 사이에 몽골제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남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렸지만, 대부분 독자에게 판타지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그가 그린 몽골제국, 특히 중국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이 당시 유럽인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을 가리킨 이름 ‘카테이(Cathay)’가 참으로 중국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조차 그 책이 나온 3백년 후의 일이었다.

 

폴로의 기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항해 때 그 책을 갖고 다녔다는 콜룸부스도 그중 하나였다.) 황당해 보이는 내용이 많지만, 지어낸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말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진입 이후 중국에 관한 유럽인의 지식이 늘어나면서 폴로의 기록 중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 많아짐에 따라 역사-지리 자료로서 <동방견문록>의 가치도 커졌다. (‘카테이’가 중국임을 확인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폴로의 직접 견문에 근거한 것이라는) 믿는 연구자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 이유들이 제시된다. 제노아의 감옥에서 폴로의 회고를 작가 루스티첼로가 글로 정리하면서 작가다운 기교를 부린 문제, 필사본의 확산과 번역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문제, 폴로가 겪은 내용과 들은 내용이 혼동된 문제 등이 많이 지적된다. 폴로가 중국을 실제로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고, 오히려 “그 시기에 그만큼 많은 분량의 정확한 정보를 일개 여행자가 모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스티븐 호는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재확인하는 책 <Marco Polo's China: A Venetian in the Realm of Khubilai Khan 중국에 간 마르코 폴로>(2006)에서 흥미로운 추측을 내놓는다. 폴로가 쿠빌라이의 친위대(Keshig)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165-168쪽) 몇 가지 중요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추측이다. 예컨대 폴로가 쿠빌라이를 여러 번 만났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왜 중국 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있다. 친위대 소속이라면 역사기록에 남을 만큼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도 황제를 자주 만났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의 4부 중 쿠빌라이 조정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제1부 내용에 다른 부분보다 온갖 오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이 추측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폴로가 친위대에 들어갔다면, 각지의 상황을 조사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을 수 있다. 서방 출신의 색목인(色目人)을 행정에 많이 활용한 원나라 관습에 비춰볼 때 ‘이방인의 눈’을 상황 파악에 이용한다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디를 다니더라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메모를 (머릿속에라도) 남기는 습관을 익히게 되었고, 따라서 초기의 기록보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폴로는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상인은 언제 어디서나 상인 입장에서 중요한 일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많이 기억한다. 그런데 <동방견문록> 제2부 이후의 기록 중에는 상인의 관점을 넘어서는 내용이 많다. 황제의 관심 범위가 폴로의 시선에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폴로의 관찰과 기억이 그런 폭과 깊이를 가지게 된 것 아니었을까?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저만큼 풍부한 내용을 당시 상황 속에서 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친위대원 마르코 폴로” 설은 이 의문도 풀어줄 수 있는 가설이다.

 

19세기 후반 근대적 ‘동양학’이 유럽에서 일어날 때 마르코 폴로의 실체 확인이 인기 있는 주제의 하나로 떠올랐다. 중국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고 <동방견문록>의 신뢰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의 흔적을 중국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일부 학자들이 <원사(元史)>에서 ‘발라(孛羅)’라는 이름을 찾아내고 흥분했다.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라 ‘po-lo’로 적히는 이 이름이 마르코 폴로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폴로 일행이 일-칸국을 방문한 1290년 무렵에 이 인물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 착각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는 원나라 초기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중서성 승상에 오른(1280) 고관이었을 뿐 아니라 쿠빌라이의 심복 가문 출신으로 아리크 보케 심문(1264)과 아흐마드(Ahmad) 사건 조사(1282) 등 민감한 과제를 맡을 만큼 절대적 신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1285년 아르군(Arghun) 일-칸의 책봉 사신으로 일-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근 30년 여생을 지냈다. 차가타이 칸국과의 군사적 충돌로 길이 막혀 귀국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석연치 않다. 해로도 있었고 육로도 그렇게 오랫동안 완전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책봉 사신으로 보낼 때 그의 장기 체류 방침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신분과 명예는 원나라에서 부재중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토머스 올슨은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에서 볼라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원나라와 일-칸국의 관계를 넘어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의 가교 노릇을 맡았다는 것이다. 폴로와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문명 간 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점, 큰 수수께끼를 남긴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폴로 못지않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인물을 통해 두 정복왕조 사이 ‘문명동맹’의 의미를 꽤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

 

금나라에 군사적 열세를 보이던 남송이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40여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몽골제국의 분열과 혼란, 서방 정벌에 치중한 사실, 기마전에 적합지 않은 남중국 지형 등을 흔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런 설명이 미흡하게 느껴진다.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정복이라면 세계 최대 보물창고인 남송이 어디에도 밀릴 수 없는 최고의 정복 대상이었다. 이 40여 년의 기간은 몽골 정복자들이 ‘정복’의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은 ‘업그레이드’ 기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250년대 이후 몽골의 남송 정벌은 거위고기를 먹으려고 죽이러 나선 것이 아니라 알을 낳게 하려고 생포하러 나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1246년 구육의 조정을 방문한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나 1253-55년 몽케의 조정을 방문한 뤼브루크(Willem van Rubroeck)의 여행기에 대칸을 비롯한 몽골 지도자들이 유럽에 관심을 보인 기록을 보면 다른 사회들을 알려고 애쓰는 그들의 자세가 뚜렷하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에게 우대를 받은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각지 지도층 자제를 모아놓은 친위대(Keshig)에도 여러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하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친위대 소속이었으리라는 추측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오고타이 시대(1229-41)부터는 몽골제국의 확장이 단순한 초원제국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복합적인 제국의 건설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바필드는 “칭기즈칸의 후계자들은 보편적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은 초원의 장악에 중점을 둔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의 손자들 대에 와서야 거대문명권의 정복이 시작된 것도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보인다(<Perilous Frontier> 198쪽). 그러나 오고타이가 야율초재(耶律楚材)를 등용한 것은 농업지역 경영의 뜻을 세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역시 몽케 시대(1251-59)에는 몽골 지도자들에게 정복의 의미가 달라져 있었다는 견해다.

 

1250년대까지 몽골 지도부는 초원과 농지 양쪽의 생산성 유지에 자기네 부와 권력이 걸려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몽케는 페르시아와 중국 정벌에 나서기 전에 조세 부담을 고르게 하고 군사 활동에 따르는 생산력의 파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바그다드 약탈 외에는 몽케 시대의 정벌이 칭기즈칸 시대에 비해 훨씬 파괴성이 덜했음을 올슨은 지적한다. 몽케는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파괴된 지역의 생산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도 거둔 것으로 보인다. (<A History of Russia, Central Asia and Mongolia> 416쪽)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의 충돌을 ‘본지파(本地派)’와 ‘한지파(漢地派)’의 경쟁으로 해석한 일본 연구자들도 있다. 초원의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과 중국의 고등문명을 접수하려는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새 길을 열려는 한지파에게는 익숙한 길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새 길이 이끌어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규모 확대에 따라 전통을 그대로 지키기 어려운 문제는 대칸 계승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칭기즈칸이 후계자를 지명하여 쿠릴타이의 확인을 받게 한 것은 그 단계에서 좋은 계승방법이었다. 쿠릴타이 기간 동안 제국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만족할 만한 체제 정비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는 원만한 조정이 어렵게 되었다. 집권(集權)과 분권(分權)의 모순되는 요구가 모두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인식되고 대책이 강구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가 실제로 택한 노선에 비쳐볼 수 있다. 몽케는 대칸 자리를 위해 조치 계의 바투(Batu)와 손잡았고 그 대가로 바투 세력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차가타이-오고타이 계에 대해서도 통제력 완화를 감수했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권과 중국의 정복과 경영에 몽골제국의 진로를 설정하고 3형제가 나서서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몽케가 그린 몽골제국의 미래는 자기 형제들이 장악할 두 문명권의 역량을 발판으로 초원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너무 일찍 (50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를 서두르는 플랜-B로 넘어가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리크 보케 외에는 몽케의 아들들을 위시한 톨루이 계 거의 모두가 쿠빌라이를 지지한 것을 보면 그의 즉위가 상당 범위의 합의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 같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계기로 몽골제국이 4칸국으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평면적 분열이 아니었다.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두 칸국(금장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과 달리 일-칸국은 대칸(원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는 입장을 오랫동안 내세웠다. 원나라와 일-칸국은 나란히 농경제국의 성격으로 바꾸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관계는 군사적 동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교류를 통해 두 문명권을 결합하는 방향의 노력이었다. 4칸국의 분열은 실제에 있어서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