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③

기사입력 2008-11-13 오전 7:44:20

개화파를 미화하기 위한 역사 서술

  <대안 교과서>는 2부 2장에서 5장에 걸쳐 개항 이후 합방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했다. <역사비평> 83호(2008년
여름호)에 실린 주진오의 '뉴라이트의 식민사관 부활 프로젝트'는 대략 이 부분에 대한 비평을 담은 글이다.

  주진오는 이 글의 4장에서 근대 변혁 운동에 대한 편향적 인식을 지적했다. 특히 문제 삼는 것은 개화파에 대한 일방적
미화, 집권 세력에 대한 악의적 비판, 민중의 저항 운동 무시의 세 갈래다.

  개화파의 미화는 정말 심하다. 개화파의 범위 설정부터가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받아들인 집단을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그 노선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전혀 없다. <대안 교과서>에 나타난 '개화파'는 모두 의인이며 현인이고, 그들의 실패는 모두 그들의 결함 아닌 외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특히 상자 기사를 이 목적에 활용한 방식은 집요하다 할 정도다.

  한편,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개혁적 의미를 최대한 부정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서술이다. 사건의 명칭을 "동학 농민 봉기"라 한 데서부터 이 의도를 알아볼 수 있다. 이 운동에 대해서는 개혁적 의미를 극대화한 "동학 혁명"이란 이름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학계에서나 사회에서나 "농민 운동"이 합당한 호칭으로 통해 오고 있다.

  내 책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을 다루지 않았다.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지만 내 책에 필요한 명쾌한 서술을 뽑아내기에 너무 복잡한 양상을 띤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 운동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광범한 계층이 참여했고, 지엽적인 폐단 시정으로부터 국가의
진로 설정까지, 다양한 요구가 뒤섞여 나왔다. 이 사건을 설명한다면 설령 폐정 개혁안 12개조처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 담긴 심각한 의미를 외면할 수 없다. 폐정 개혁안에 대한 의심만으로 이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극히 자의적인 서술이다.

  개화파의 미화와 농민 운동의 외면은 동전 앞뒷면이다. 교과서포럼은 개항기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를 자본주의 도입과 발전의 역사로만 이해한다. 일본을 모델로 하여 일본의
도움으로 추진하려 한 '개화'만을 역사의 바른 길로 여기니, 한국 민중의 견해와 요구는 그 길에 장애물로만 보이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그리고 고종의 역할을 신통찮게 보는 것은 나도 교과서포럼과 같은 관점이다. 나는 광무개혁을 "주체 없는 개혁"이라고 혹평했다. 주체라면 누구보다 고종이 주체 노릇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고종은 개항 이후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대응책을 찾는 군주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처해진 상황이 가져올 득실의 계산에만 급급한 책략가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조선 왕조는 개항 이전에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고, 1873년
대원군의 실각 이후로는 이에 대한 진지한 대응이 없었다.

  광무개혁의 의미를 크게 보려는 이들은 조선 왕조에게 자립의 의지가 있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을 당한 것으로 봄으 로써 침략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해서 병약한 사람 죽이는 것보다 살인죄가 중해지는 것이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조선 왕조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여지가 남아 있었고, 그 자발적인 선택이 일본의 침략 의도 못지않게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광무개혁을 같이 폄하하면서도 <대안 교과서>의 서술은 이상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광무개혁의 일환인 양전(
농지 측량) 사업이 근대적인 토지 사유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시주(時主)'라는 표현을 빌미로 황제가 '본주(本主)'였다고 소설을 쓰는 것. 한문을 배웠다는 사람이 글자 해석을 이처럼 자기 뜻대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 개항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변화의 압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늘 허덕여 왔다. 변화의 압박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온 것인데, 우리가 유독 쩔쩔 매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청나라에 매달리다가, 러시아에 매달리다가, 일본에 매달리다가, 미국에 매달려 온 주권의식 결여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프레시안

국권인가 왕권인가

  신라 통일 이후 한반도의 국가가 외부 세력의 침공을 받은 일은 얼른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서 항복한 완벽한 정복도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몽골만주족 정복자들은 고려와 조선을 없애는 대신 조공 관계를 맺는 데 만족했다. 반도국가를 문명한 나라로 존중했을 뿐 아니라 고유한 문화를 가진 이 지역을 힘들여 직접 통치할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주인이 된 원나라와 청나라는 고려와 조선에 대해 조공 관계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길목의 한반도를 확실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호란 때 청군이 조선 조정만을 목표로 진군한 반면 왜란 때 일본군이 반도 전역을 침공 대상으로 삼은 차이도 여기에 까닭이 있다.

  반도에 대한 섬의 관심은 섬에 대한 반도의 관심이나 반도에 대한 대륙의 관심보다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이 한국에 치명적 위협이 된 것은 두 나라의 위치로 인해 정해져 있는 조건이었다.

  메이지유신 초기, 아직 본격적 산업화가 많이 진척되지 않았던 1873년 무렵의 일본에서 반도 침략 논의가 일어난 것은 임진왜란과 별 차이 없는 수준의 동기에서였다. 징병제 실시로 역할을 잃은 사무라이 계급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홋카이도 개발에 옛 사무라이 계급이 대거 동원된 것도 같은 목적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은 후 일본이 근대적 산업화를 추진함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수요도 무르익어갔고, 근대국가 체제가 갖춰지면서 식민지 획득을 위한 수단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 때만 해도 일본은 아직 국가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치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1889년의 메이지헌법 제정과 1890년의 교육칙어 반포로 근대 일본의 국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1886년의 통화제도 안정 조치 이후 경제와 산업의 발달도 궤도에 올라섰다.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청나라가 패퇴한 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양성 과정에 들어갔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3국간섭'(1895)으로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견제했지만, 조선에 관해서는 아무 간섭이 없었다. 그후 합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식민지화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 열강은 러시아뿐이었다. 그 러시아마저 러일전쟁으로 물러서자 조선은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실질적 망국에 이르렀다.

  조선의 망국에는 두 개의 단계가 있었다. 일본의 지배 아래 떨어진 것은 마무리 단계라 할 수 있고, 그 앞 단계는 중국 중심 천하체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쇄국을 주장한 조선의 위정척사론자 중에는 일본과 서양을 배척할 뿐 아니라 청나라까지 오랑캐로 몰아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중국 중심 천하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당시 조선 지식층의 주류였다. 그들 중 견문이 앞선 사람들은 당시 청나라의 곤경을 이해하고 맹목적 쇄국 대신 선별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모색하고자 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에 보조를 맞추려는 것이었다.

  청나라 양무파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친중국 정서를 이용해 조선과의 전통적 특수관계를 자기네 고유자산으로 지키고 싶어 했다. 조선의 개방을 청국의 주도하에 진행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1881)도 그 표현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를 둘러싼 열강은 이른바 '만국공법'의 원리를 주장하며 이 특수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을 틈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조정에 직접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이 특수관계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열강에게 배운 외국 통제 방식이며, 전통적 천하체제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나라의 무력 개입은 일본의 '조선 독립'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일본에 기대어 개혁을 꾀한 갑신정변(1884)이 그 결과였다. 청나라의 양무를 따라가려는 온건파의 노력이 청군 주둔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자, 일본의 변법을 배우려는 급진파의 기세가 높아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자유주의 성향의 온건파가 동아시아 3국 간의 협력을 제창하는 '아시아 연대론'을 내놓아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고무했다.

  청군의 조선 주둔 이후 청나라의 정치 간섭과 경제 침투가 계속되는 동안 조선인들은 개혁 모델로서 청나라에 실망을 느꼈다. 결국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서 물리적 영향력만이 아니라 심리적 영향력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갑오경장(1894)은 일본군의 총칼 앞에 시작된 것이었지만, 10년 전 갑신정변보다는 진보적 조선인의 합의를 널리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로 돌아갈 길이 사라진 이제, 일본이 개혁의 유일한 모델로 남은 것이었다.

  갑오경장 당시 일본의 의도는 물론 일본의 영향력 확대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아직 태도가 엇갈려 있었다. 결국 현실화된 것은 무력 점령을 향한 군국파(軍國派) 노선이었지만, 조선과 청나라가 일본의 개화를 뒤따르고 자발적으로 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바라는 성향도 있기는 했다. 의도야 어떠했든 갑오경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이 따라하게 하는 쪽으로 추진되었다.

  '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민비의 자주성을 부각시킨 드라마도 있었지만, 갑오경장에 대한 민비의 저항을 자주독립 정신으로 미화하는 것은 정황에 맞지 않는다. 1873년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은 민비 세력은 집권을 위한 집권에 집착할 뿐, 국가 진로를 능동적으로 열어나가려는 노력을 보인 바 없었다.

  민비와 고종은 입헌국가를 향한 변화로 왕과 조정의 전제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청나라를 이긴 일본의 기세가 3국간섭 앞에 꺾이는 것을 보며 러시아에 의지해 일본의 압력을 견제할 길을 찾은 것뿐이었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 중 극동 지방에 가장 크게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가 러시아였다. 유럽의 후진국을 면하려 발버둥치고 있던 러시아에게 시베리아를 통한 태평양 진출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점적 발전 방향이었다.

  태평양 길목의 조선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마주쳤다. 청일전쟁 후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3국간섭으로 일본의 전리품을 제한한 것은 러시아의 외교적 승리였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895년 10월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다음 달 고종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실패하고,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1년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지리멸렬한 조선의 국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였다.

  이 기간 중 친일파 탄압이 있었던 것도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기보다 외세에 편승한 각축전의 일환으로 보아야겠다. 당시 고종을 옹위하던 친러파 가운데 나중에 진짜 저질 친일파들이 나타난 데서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1897년의 이른바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주체 없는 개혁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 등 열강이 바라는 이권 개발을 충실히 대행하는 기구가 되었다.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 임금만 '황제'로 승격하고 전제권력 강화에 도취해 수백 년 지켜온 국체를 무너뜨린 조치는 백성의 충성보다 외세의 도움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결과였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말까지 활동한 독립협회를 광무개혁의 한 주체로 보기도 한다. 독립협회는 당시 진보적 식자층의 애국심이 발현된 것이었지만, 또한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독립협회의 독립이란 이미 패퇴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확인하는 것이지, 당시 늘어나고 있던 일본과 러시아의 힘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지도자 대부분은 두 나라 사이의 줄타기에 협회를 이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바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러―일 간의 긴장은 결국 1904∼1905년의 전쟁을 통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열강의 묵인 아래 조선의 국권을 을사보호조약(1905)과 합방(1910)의 두 단계를 거쳐 소멸시켰다.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국권 상실을 슬퍼하고 일부는 적극적 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도 국권 수호의 궁극적이고 거국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을사보호조약에 항의한 헤이그밀사사건(1907)에 대한 책임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기는 했지만, 그 재위 40여 년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수호하려 한 것이 국권이었는지 왕권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②

기사입력 2008-11-06 오전 8:05:27

  '대안 교과서'는 2부 1장에서 '개항'을 설명하고 2장에서 개항 후 20년간 한국인들이 보인 반응을 설명했다. 아래 붙일 내 글에 대략 해당하는 범위다.

  개항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전체 수준에 비해 비교적 무난한 편이다. 그러나 개항이라는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일어난 일인지 보여주는 뚜렷한 시각이 없다는 점이 역시 이 책의 한계를 보여준다. 개항을 근·현대사의 출발점으로 볼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근대 진행의 흐름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열쇠다.

  열쇠는 두 개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세계사적 의미고, 또 하나는 제국주의를 맞이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기술적 한계라 할 것이며, 따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역사학자의 참여 없이 만든 이상 이 정도 결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제국주의의 의미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이 자본주의 이념을 중심축으로 삼은 이상 제국주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향후 서술의 기조를 밝히기 위해 요긴한 일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서세동점'이란
상투적 표현 아래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해체와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힘"이란 정도의 설명뿐이다.

  근·현대사를 자본주의의 역사로 보는 뉴라이트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 문제를 이처럼 소홀히 한 것이 왜일까? 두 가지 이유가 생각된다. 하나는 유럽 근대 문명의 '우월성'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설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서세동점의 침략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 개화파-식민통치-대한민국의 축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체로 찬양하는 향후 서술 방향과 모순될 것을 꺼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아래의 내 글에서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제국주의 침략의 성격을 밝히는 데, 그리고 이 침략에 처한 동아시아 3국의 상황을 비교해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산업혁명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있어서 획기적 변화였다. 이 변화의 문제점이 20
세기 후반에 와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기 전까지 '근대'라는 시대를 지배한 세계관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산업혁명의 혁혁한 성과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의 핵심은 바로 '근대화'의 강요에 있었다. '대안 교과서'가 개항기 이후 근대화의 한계와 문제점을 일체 무시하고 근대화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비역사적 자세는 서세동점의 의미에 눈 감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상황 비교 중 한국과 일본의 차이에 필연적인 면보다 우연적인 면이 크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일본이 개항한 1854년에 비해 조선이 개항한 1876년에는 제국주의 침략이 크게 격화되어 있었다는 점, 따라서 일본에는 개항에서 유신까지의 14년 방황기 동안 외부의 노골적 침략이 없었던 반면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이 바로 뒤따랐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 사이에 민족성의 차이나 전통 성격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본다.

  과거의 실패를 반성함에 있어서 내 쪽 결함을 분명히 하는 데 애쓰는 것이 반성의 의미를 깊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침략자의 침략 정당화를 위한 논리에 지나치게 휘말려 온 상황은 상식 차원에서 한 차례 정리하는 것이 좋다. 아직도 뉴라이트는 '소농사회' 학설로 식민사관 정체성론의 뒤를 잇고 있지 않은가.

  개항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뉴라이트는 근대화의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개화파의 노력을 부각시킨다.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국가 체제의 붕괴를 중시한다. 체제 붕괴라는 총체적 파국 속에서 개화파의 노력이 가지는 의미는 극히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근대화는 지금의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어차피 불가피한 진행 방향이었지만, 매판적 근대화와 주체적 근대화 사이의 차이는 엄연한 것이다. 근대화의 주체가 되기보다 근대화의 희생 대상이 되는 길을 바라본 자들까지 '근대화'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을 구분해 볼 줄 모른다면 지금의 세계화에서 휩쓸려 끌려가는 길과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

▲ 미국이 변하고 있다. '얼굴색'이 변하는 것뿐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 얼굴색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었는가? '통합'의 메시지가 국민을 투표하고 싶어하게 만들었다. 조선이 무너진 후 한 세기가 지나고도 '통합' 얘기를 속시원하게 나누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어느 시대에 묶여 있는 것인가? ⓒ프레시안

  적어도 16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기술 수준이 대부분 분야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근년 밝혀져 왔다. 르네상스 3대 발명품이라 하여 유럽의 근대화를 뒷받침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제지술, 나침반화약이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은 17세기 이후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 시대를 열고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반면, 동아시아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가 19세기에 유럽인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과 동아시아의 길이 엇갈린 까닭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유럽은 분열된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유럽이 원거리 무역을 발전시켰다는 점이 많이 지적되어왔다. 경쟁 때문에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으며, 원거리 무역 덕분에 산업 구조가 빠른 속도로 다각화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명나라와 조선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 유럽인은 대항해시대에 나섰다. 국가 간의 경쟁과 교회 간의 경쟁이 항해의 동력이었고, 물자 획득이 그 목적이었다. 당시 유럽인이 구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재물이었다.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뒤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만든 해상제국은 점과 선, 즉 기지와 항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문명이 아주 낮은 수준에 있던 '신대륙'과 아프리카 중남부에서 유럽인들은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식민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경영을 통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한 상태가 오래 계속됨에 따라 생산, 제조와 교역을 모두 대형화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산업혁명이었다. 그 결과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식민지 수요가 생겨나, 높은 문명 수준과 안정된 정치 조직을 가진 지역까지 침략해 식민지로 만드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것이 서세동점이었다.

  18세기에 식민지 경영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두 나라는 아메리카에서 단순한 착취 기구를 넘어서는 신형 식민지를 경영하며 산업혁명을 추진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가 뒤처진 후 영국의 단독 선두 자리가 굳어졌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궤도에 오른 산업혁명은 19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시작해 중부유럽을 거쳐 러시아, 미국 등 유럽 주변부로 번져나갔다. 막차를 탄 일본까지 포함해 새로운 산업구조를 세운 나라들은 국민국가 체제를 만들고 자국 산업을 독점적으로 뒷받침할 식민지를 찾아 나섰다. 이들이 제국주의 열강이었다.

  중국이 두 차례 중영전쟁(1840∼1842, 1857∼1860)을 겪고 일본이 개항하던(1854) 무렵까지만 해도 아직 식민지 쟁탈전이 그리 거세지 않은 상황이어서 열강의 개항 요구는 문자 그대로 통상 개방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질적 산업 구조에 노출된다는 것은 각국의 기존 체제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더욱이 이 요구를 동반한 무력 시위는 충격을 넘어서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두 차례 참패를 겪은 뒤에야 일으킨 양무(洋務)운동이 전쟁도 없이 개항한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에 비해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수십 년 후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 지적이 많이 있다. 이 대응 태세의 차이는 두 나라가 처해 있던 상황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청조 치하의 중국은 18세기 후반의 판도 확장을 통해 복합적 천하제국 체제를 막 완성해놓은 상황이었다. 그 체제에는 상공업 발전의 추세도 상당 수준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조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오랑캐의 하나로 여겨온 유럽인에게 군사적 패배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 어려웠다. 거듭된 패전 뒤 양무운동을 일으켰지만, 그 의미를 가능한 한 축소해서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달리 일본은 구체제의 한계가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서양의 충격을 맞았다. 1840년대 초의 덴포(天保) 개혁에서 바쿠후의 위기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 이 개혁마저 실패로 돌아가 바쿠후의 지도력이 신뢰를 잃고 각지의 다이묘(大名)가 독자적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개항 요구가 닥쳤다.

  따라서 개항은 쇄국의 주체였던 바쿠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고, 개항을 국가 변혁의 계기로 삼으려는 개혁 세력의 주류가 형성되어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것이다. 그들이 중국 지식층과 반대로 개항의 의미를 가능한 한 크게 보려 한 관점은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도 내부 구조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던 상태에서 개항 요구를 맞았다는 점은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죽은 후 반세기 넘게 계속된 세도정치 아래 현실 변화가 제대로 수용되기는커녕 국가의 기본 질서가 와해되어온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았다(1863). 농민 중심의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집권한 대원군은 국가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대원군 개혁의 핵심은 서원 철폐와 조세 평준화였다. 양반 신분이 사회 지도층으로서 애초의 의미를 잃고 개인적 권세와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원의 위상도 사림의 근거지로서 학술과 질서의 중심이라는 원래 의미를 잃고 집단 이권의 아성으로 타락하는 추세가 있었다. 대원군은 양반과 서원의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서민의 부담을 완화하는 동시에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북경조약(1860) 이후 중국에서 서양인들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을 엿보는 움직임도 몇 차례 있었다. 대원군이 그 대응으로 쇄국 정책을 편 것은 국가 체제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깥바람을 맞으면 나쁜 영향을 받기 쉽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서양인들도 조선 개항을 집요하게 요구할 절박한 동기가 없어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에 그치고 있는 동안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큰 위협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유신의 깃발을 올린 후 조선 진출의 필요가 떠올랐다. 유럽식 산업화를 추진하는 일본에게 대륙 진출은 배후지 획득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그 길목에 조선이 있었다.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에 직면한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무력시위를 통한 개항 압박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20년 전 미국에게 당한 함포 외교를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1875년 운요호사건 후의 조선 개항은 중국과 일본이 앞서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시대 상황에 따른 부득이한 일이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개항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 누가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이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조선은 국가 차원 대응의 초점을 잃었다. 조정은 대원군 집권 전과 같은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로 돌아갔다. 어떤 과제보다도 체제 유지를 더 앞세우는 정치였다. 대원군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효과적인 대응책을 내놓았으리라고 꼭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대원군 집권 기간 중 내정 개혁에서라도 보였던 목표 의식이 그의 실각 후로는 그나마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할 뿐이다.

  개항 후에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개화파'라 칭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청나라 모델과 일본 모델로 갈라져 화합된 힘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웃 나라 모델을 따르는 것을 넘어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닥쳐 있는 과제를 '나의 일'로 투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세도정치는 체제 유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새로운 과제의 인식과 해결 노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개화파가 세도정치의 틀을 깨뜨리려 시도한 일이 한 번 있었다. 갑신정변(1884)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일본 모델을 따른 것일 뿐, 하나의 정파를 넘어서는 폭넓은 동의를 모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한 정변이었기 때문에 길게 버티지도 못했고 남긴 효과도 미미했다.

  개항 이후 효과적인 대응책 없이 상당 기간 혼란을 겪은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일본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장 성공적으로 대응했다는 일본도 메이지유신의 방향을 잡는 데 개항 후 1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유신의 선봉으로 나서게 될 조슈(長州) 한(藩)은 개항 후 10년이 지난 1864년까지 외국 함선에 제멋대로 포격을 가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유신의 주체가 될 전국의 시시(志士)들은 바쿠후에 '양이(攘夷)'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바쿠후를 타도한 메이지유신은 '존왕(尊王)'을 앞세워 '양이'의 열정을 새 국가 건설의 과제로 끌어들이는 과정이었다.

  개항기 조선의 비극은 일본에게 주어진 14년과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데 있었다. 1860년대의 일본에 대해서는 독점적 야욕을 가진 열강이 없었지만 1880년대의 조선에게는 일본이 있었다.

  또한 일본에게는 '존왕'이라는 제3의 돌파구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대응책을 여러 주체가 시도해볼 여건이 일본에는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다는 데서 개항의 명암이 갈라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①

기사입력 2008-10-28 오전 7:36:19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연재를 시작하며

페리스코프를 다시 찾아주신 독자들, 반갑습니다.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를 끝내고 여러 분 곁을 떠난 지 벌써(?) 한 주일이나 되는군요.

사실은 여러 분 앞에 다시 나서기까지 사이가 훨씬 더 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상머리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뒤적이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이미 써 놓은 글을 독자들께 보여드리면 안 될까?" 바로 돌베개와 <프레시안>에 생각을 알렸습니다. 양쪽 다 동의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독자들 곁에 빨리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는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와 같은 지난 3월에 나왔습니다. 그 책을 쓸 때, 나는 뉴라이트에서 어떤 역사관을 내놓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책의 근·현대사 부분을 10회에 걸쳐 페리스코프에 옮겨 놓으면서, 각 회의 주제에 대한 뉴라이트 관점과 내 관점의 차이를 설명하려 합니다.

뉴라이트 얘기를 하던 중 저 자신이 보수주의자임을 밝혔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 역시 보수적 한국사관을 담은 책입니다. 기존 교과서와도 다르고, 뉴라이트 역사관과도 다른 이 관점을 근·현대사 범위에서 저 자신 다시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헌 글 게재를 허락해 준 <프레시안> 관계자들, 그리고 책 일부의 전재를 쾌히 승낙해 준 돌베개 관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의 보완으로 독자들께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합장.

개항기 조선의 위기는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

  <대안 교과서> 도입부(1부)는 2개 장으로 되어 있다. "1.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와 "2. 전통 사회의 구조와 유산"이다.

  1장에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의 공부 내용을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발전 △경제 성장의 의미 △국제 관계 속의 한국 △바람직한 통일의 모색, 네 가지로 제시했다. 과연 이 네 가지 주제를 어떤 각도에서 추구하는지는 앞으로 구체적 소재를 놓고 따져볼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어떤 주제가 제외되어 있는지 짚어 둔다.

  한민족의 문화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 분야는 구색을 위해 붙여놓은 부속물로밖에 취급받지 않는다. 그나마 외래문화의 도입에 서술이 치중되어 있고 민족문화의 전통이라는 측면은 완전한 외면을 받고 있다.

  뉴라이트 필진의 역사의식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식민지 정복자가 식민지 원주민 집단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런 시각으로는 전통시대와 근대 사이의 연속성을 충분히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개항기 이전의 상황을 개관한 2장에서는 3개 절 중 마지막 절에서 국제 관계를 다뤘을 뿐, 앞의 두 절은 '소농사회'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소농사회'는 뉴라이트 계열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하나의 학설로 제기한 것일 뿐, 역사학계에서 아직 본격적 검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농사회' 학설의 타당성을 앞장서서 논할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뉴라이트 외의 역사학자로부터 이 학설에 대한 반대만이 있을 뿐, 찬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지적해야겠다. 또한 이 학설이 뉴라이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캐치업' 이론으로 해석하기에 편리하도록 끼어 맞춰진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정황도 지적해야겠다.

  근대사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 상황을 최소한의 검증도 안 된 학설만으로 설명한 점에서 이 책이 교과서가 아니라 선전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도입부에서 확인해 놓은 덕분에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놀라 까무러칠 일을 면할 수 있었다.

  내 서술로 눈을 돌려보자. 상공업 발달이라는 탈중세적 현상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농업국가의 경직성을 나는 조선 왕조 쇠퇴의 기본 원인으로 제시했다.

  "기본 원인"이라 하는 것은 유일한 원인이란 뜻도 아니고, 궁극적 원인이란 뜻도 아니다. 하나의 역사 현상 속에는 여러 부문의 서로 연관된 요인들이 뒤얽혀 나타나고,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 중 어느 요인을 앞세워 내놓는가 하는 결정에는 그 현상의 전후 관계를 조명하기에 편리한 위치에 있는 요인이 어느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개항을 앞둔 조선의 상황을 설명함에 있어서 종래 유행한 관점에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동양적 원리의 필연적 패망을 말하는 정체성론. 지도층의 도덕성을 지탄하는 민족사관. 그리고 근년 많은 연구자들이 제기해 온 내재적 발전론.

  나는 내재적 발전론에 마음이 끌리기는 하지만, 아직 일반인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연구가 숙성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 것이 농업국가의 경직성이다. 앞으로의 연구 진척에 따라 더 효과적인 서술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개항 이후에 닥칠 산업-경제 분야 변화의 배경으로 이것을 내놓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생각했다.

  뉴라이트의 '소농사회' 학설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항해 나온 것이다. 아직까지 학계의 승인을 받은 범위가 좁을 뿐 아니라 너무 독단적인 내용이어서 앞으로도 별 발전의 소지가 없는 학설로 보인다. 그런 초보 단계의 가설로 교과서의 발판을 삼으려 하다니, '교과서'의 의미를 너무 우습게 보는 사람들 같다.

  개항 이후 드러난 위기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이 문명의 위기가 아니라 왕조의 위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의 위기가 아니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내재적 발전론에 그래서 끌리는 것인데,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는 아직도 명쾌하지 못한 구석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왕조국가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문명의 위기가 아니었다는 개연성을 제시하는 정도의 서술을 택한 것이다.

▲ "이명박과 강만수. 위기가 닥쳤다지만, 이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우리는 어떤 모험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 성공 가능성이 적다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투기의 진정한 기회는 실패 속에 있다." ⓒ뉴시스

조선은 어떻게 기울어져 갔는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군
지휘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 한 가지는 물자 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대규모 군대가 장기간 출동할 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일반 물자는 현지에서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화폐도 별로 쓰이지 않고 있어서 돈을 가지고도 물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란 전 조선의 경제 발전은 농업 생산력 향상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 생산력 향상에 힘입어 중소
지주층이 양반관료층으로 성장하면서 정통적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조정에서 향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구축했다.

  이 정연한 질서가 왜란으로 인해 깨졌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와 인구 이동만이 아니라 주둔 명군을 통한 화폐경제
학습 같은 새로운 경험들도 조선 사회의 유동성을 늘리는 데 작용했다.

  왜란 후 조선의 경제 변화는 사회유동성을 더욱 늘리는 상업 발달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중국과의 사이에도 사(私)
무역이 자라나 공(公)무역을 능가하게 되었고, 관영(官營)에 얽매여 있던 수공업도 시장을 상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밭에서도 상품작물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그에 종사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관청의 통제를 받던 조선
전기의 상업 제도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업 팽창이 17세기 이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 체제는 농본국가의 틀을 바꾸지 않았다. 모든 정책은 농업 위주로 논의되었고, 상업 활동의 확대는 억눌러야 할 병리적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위정자들은 인구 감소와
농민의 유망(流亡)을 늘 걱정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상업 활동으로의 이동이었다. 상업을 국부(國富)의 새로운 원천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상업 발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적극적 정책이 없었다.

  현실 변화에 대응한 17~18세기 재정 정책으로 대동법과 균역법이 있었다. 둘 다 인두세(人頭稅)에서
토지세로 비중을 옮기는 방향이었다.

  영세농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상업 발달에도 기여하는 정책들이었지만, 경제 구조의 변화를 재정 구조에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상업에서 발생한 재부는 국가 재정에 효과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토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 등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검은돈이 되어 정치구조를 왜곡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정조가 죽은 후 현실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상업 발달은 전국적 현상이었지만, 역시 서울과 그 주변지역의 변화가 제일 크고 빨랐다. 18세기 중엽 이후 근기(近畿)지역의 성호(星湖, 이익)학파와 서울의 북학파가 실학의 흐름에서 두드러졌던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농업 구조의 붕괴를
목도하던 성호학파 학자들은 농업 체제 회복에 개혁의 일차적 목표를 두었고, 상업 발달을 가까이서 체험하던 북학파 학자들은 능동적 상업 진흥 정책의 필요를 절감했다.

  성호학파의 중농정책과 북학파의 중상정책 사이에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었지만, 진취적인 정조의 조정에서는 함께 논의되어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될 기회를 누렸다. 1791년과 1794년 시행된 통공(通工) 정책은 제도권 상인의 특권을 줄임으로써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농업국가의 기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중상정책을 서서히 도입하는 방향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현실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왕실 외척 등 좁은 범위 권문세가에서 권력을 독과점하는 세도정치의 양상으로 접어들면서 조정의 논의가 공허한 명분론으로 좁혀졌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 안보상의
불안은 정국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계속 확대되는 상공업의 이권은 정경유착 현상을 부채질해, 정권을 지탱하면서 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상공업의 대부분은 국가에 파악되지 않는 음성적 경제 활동이 되었다"

  생산물의 교환은 모든 문명의 기본 현상이다. 교환 활동은 몇 가지
양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처럼 선물과 증여의 형태로 이뤄지는 자발적 교환양식, 약탈과 분배를 통해 이뤄지는 강제적 교환양식, 시장에서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상업적 교환양식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전반기 조선과 같은 농업사회에서는 국가의 강제적 교환양식과 민간의 자발적 교환양식이 어울려 경제의 틀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업적 교환양식의 비중이 커졌다.
태평한 세월이 인구를 증가시켰고, 인구 증가가 산업다각화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상업적 교환양식 증가의 의미를 무시했다. 국가가 수행하는 강제적 교환양식에 지장을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상업적 교환양식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지도 않고 국가정의 수입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국가가 파악하는 경제활동은 거의 농업생산뿐이었다. 상공업의 대부분은 국가에 파악되지 않는
음성적 경제활동이 되었다. 이 음성적 경제활동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던 터에 왜란과 호란이라는 외부의 충격을 받자 경제 구조가 뒤바뀌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한 가지 측면이 농업 인구의 감소였다. 종래의 노동집약적 경작방법 대신 노동력 대비 생산성이 높은 기술과 농법이 개발되고 채택되면서 1인당 경작 면적이 커지고 상당수 농민이 다른 경제 활동으로 빠져나갔다. 인두세에서 토지세로 방향을 바꾼
조세 개혁은 이 변화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라 할 것이다.

  농업 인구 감소의 뒷면에는 상공업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 상공업을 국가경제의 틀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17-18세기 조선에 닥쳐 있던 최대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향으로는 정조의 통공 정책 외에 뚜렷이 보이는 정책적 노력이 없었다.

  조선의 경제 구조 속에서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상공업의 비중이 늘어나는 동안 국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농업국가 체제에만 매달려 있었다. 때문에 상공업에서 발생한 재부는 국가재정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검은돈이 되어 국가질서를 와해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성행한 매관매직도, 양반 인구비율의 급격한 증가도 모두 이 검은돈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임금을 대신하는 목민관이 아니라 권력자를 대행하는 사업자"

  조선 국가 체제의 기반이었던 양반관료층은 19세기 들어 와해상태에 빠졌다. 인구의 절반을 넘게 된 양반층은 조세 회피의 수단일 뿐, 사회지도층으로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정조 때 박지원의 글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제 또한 관료
인력 수요의 열 배를 합격시키는 학위 인플레이션 속에 등용문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수없이 적체되어 있는 자격자 중 누구에게 어떤 자리를 주느냐가 권력자의 자의에 맡겨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관 자리를 놓고 매관매직이 성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향촌에 뿌리박은 사림의 정치적 의미가 사라졌으므로 수령들은 공론의 견제 없이 이권만을 목표로 마음껏 뛸 수 있었다.

  '별장(別將)'이란 원래 무관 관직 이름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관변의 이권을 도급받는 사업자들에게도 이 칭호가 주어졌다. 사행을 따라가는 무역상 두목들을 '무역별장'이라 불렀고, 은점(銀店) 등
광산 경영을 도급받는 별장들도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지방관도 마치 별장처럼 고을의 이권을 도급받아 뇌물로 자리를 얻고 상납으로 자리를 지켰으니, 임금을 대신하는 목민관(牧民官)이 아니라 권력자를 대행하는 사업자가 된 것이었다.

  총체적 위기가 분명해진 상황 앞에 조선 조정에서 고작 대응책이라고 매달려 있던 것이 3정(三政), 즉 조세 제도를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농업 인구의 감소에 따른 세입 축소의 위협은 진행되어 온 변화의 한 작은 갈래일 뿐이었다. 경제 구조 속에서 비중이 크게 줄어들어 있던 농업 분야에만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으려니 각종 모순이 깊어지기만 하고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학술계에서는 원리에만 매달린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자는 실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경제 구조를 비롯한 변화에 적응할 필요에 자극받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국가 정치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왜란 이후 사회경제 조건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왕조는 19세기 초에 이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