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⑨

기사입력 2008-12-26 오전 9:36:53

1987년 민주화 출범 이후의 상황은 '현대사'라기보다 '현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 이후 '탈냉전 시대'가 열렸지만, '탈냉전 체제'는 아직도 모색 단계에 머물러 있다. 남북한 사이의 관계도 첫 과제인 긴장 해소조차 시원스레 풀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의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사를 개관한 책이라면 아직 역사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한 현재 상황이라도, 지금까지의 서술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묘사를 시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안 교과서>가 6부의 4개 장에서 이 시기의 변화를 마치 현대사의 일부처럼 서술한 것은 역시 무리한 시도인 것 같다.

뉴라이트가 신자유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적 노선을 배경으로 역사를 보기 때문에 이런 시도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편향성 없는 역사 서술이라면 진행 중인 불확실한 현재 상황에 역사적 해석을 적용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일이다.

단적인 예가 경제 성장의 의미 해석이다. 현 정권의 성장 지상주의 정책을 부추기는 뉴라이트는 군사독재 시대의 경제 성장을 "기적의 역사"로 떠받들고, 분배에 겨우 눈을 돌리기 시작한 민주화 시대의 노력을 "좌파"로 몰아붙인다.

독재와 양극화를 포함해 어떤 병리적 현상이라도 성장 일변도 정책과 통하는 것은 국가 발전의 공로자로 떠받들고,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향한 어떤 노력도 이에 저촉되는 것은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안 교과서>가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 극우 정당의 수련교재라고 하는 것이다.

밑에 붙인 내 글 "새로운 세계"는 <밖에서 본 한국사>를 끝맺으면서 한국의 근·현대사에 작용해 한국의 '현재'를 가져온 역사의 흐름을 '세계화'의 관점에서 정리해 본 것이다. 그 책의 다른 부분도 본격적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역사 서술의 준비를 위한 사색을 담은 것이기에 '역사 에세이'란 부제를 붙였거니와, 특히 이 글은 근·현대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는 '사론'이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내 제안의 골자는 근·현대사의 윤곽을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전환'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전환은 문명의 탄생을 전후한 농업혁명 이후 인류가 겪은 가장 넓고 깊은 변화였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의미까지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으니, '역사'의 의미 또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로끼리 맞부딪치는 민족의 역사, 국가의 역사 대신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인류의 역사가 의미를 키워가는 과정 속에 우리는 서 있다.

농업혁명도 하나의 격렬한 변화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일단락되자 세계는 수천 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산업혁명 역시 한 차례 격렬한 변화의 과정을 마무리하면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접어들 것을 기대한다. 짧고 격렬한 패러다임 전환이 한 차례 이뤄진 후에 길고 안정된 정상상태가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격렬한 변화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환경과 자원의 위기 상황이 보여주고 있다.

200년 동안의 격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익숙해져 온 세계관 중에는 전환 과정 속에서는 유효했지만 정상상태 속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근·현대사를 살핌에 있어서도 이런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만 21세기의 역사관을 빚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는 20세기 세계관에 집착하는 정도가 아니라 19세기 세계관으로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그 세계관을 교육에 반영시키겠다고 취하는 방법은 근대 이전의 전제정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 왜 '쇠고기'가 문제가 됐나? 왜 '미국산'이 문제가 됐나? 국가 간, 계층 간의 갈등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역사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는 지금, 뉴라이트는 어떤 '시대정신'을 읽고 있는가? 뉴라이트의 정체가 올드리아트라면, 그들이 내거는 시대정신은 아마 '구시대정신'일 것이다. ⓒ프레시안

새로운 세계

  세계화(globalization). 1990년경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말이지만 그 무렵에 비로소 시작된 변화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전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하는 움직임이 냉전으로 인해 얼마간 지체되고 있었다. 냉전의 둑이 터지면서 이 흐름이 거센 물결로 사람들의 의식을 덮친 것이다.

이곳저곳 산골짜기에서 조그만 시냇물이 흘러나와 강으로 합쳐지고, 강들이 합쳐져 더 큰 강을 이루다가 결국 하나의 바다로 흘러드는 길.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이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금속기 사용 이전의 초기 문명은 시냇물 단계였다. 조그만 사회들이 바로 인접한 사회들 밖에 있는 더 큰 '세상'을 현실 세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단계였다.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문명의 흐름이 큰 강을 이루게 된다. 거대한 문명권이 이뤄지고 다른 문명권의 존재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 중 자기 문명권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은 극히 미미한 비중에 그치고 있었다.

인간의 활동이 자기 문명권 안에 머물러 있던 단계를 통상 '전(前)근대'라 한다. 문명권의 울타리가 무너져가는 단계인 '근대'와 대비시킨 말이다. 전근대 세계에도 문명권 사이의 교류가 있기는 했지만 각 문명권의 역사 흐름에 큰 작용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문명권 사이의 관계가 각자의 역사 흐름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과정이 근대 세계의 전개 과정이었다.

유럽인의 발길이 지구의 구석구석을 찾아 나선 것은 15세기 말 대항해시대 때였다. 그러나 고등문명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에는 18세기까지 유럽인의 활동이 별로 큰 충격을 주지 않았다. 18세기 중엽 이후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그 활동이 세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 후 200년 동안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문명이 꾸준히 퍼져나간 결과, 20세기 중엽의 세계에는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합쳐져 갈 기본조건을 대략 갖추고 있었다. 변화를 아직 덜 겪은 지역들이 '제3세계'로 남아 있었지만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사회는 없었다. 냉전체제에 얼마동안 묶여있던 이 흐름이 1990년대에 다시 격류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세계화'란 이름을 붙였다. 변화의 귀착점이 통합된 세계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산업혁명의 요점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로부터 세계화로 흘러온 이 변화의 출발점은 유럽의 산업혁명이었다. 변화의 매체는 산업과 경제였다. 19세기 유럽의 세계정복에는 칭기즈칸 같은 정복자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과 경제는 칭기즈칸의 기마대보다 더 강력한 침투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전 세계 모든 세력을 압도한 19세기 유럽의 군사력은 이 침투력의 끄트머리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산업혁명의 요점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있었다. 원시시대의 채집경제에서 시작해 인류가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을 바꿔 온 것이 문명의 역사다. 금속의 이용과 농업의 발명이 초기 문명 발전의 가장 큰 계기였다. 화석연료의 이용과 기계사용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은 농업혁명 이후 수천 년 만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연을 그대로 둔 채 이용하던 단계에서 자연을 바꾸는 단계로 넘어온 것이다.

산업혁명을 등에 업은 유럽인의 세계 정복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의 정복과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종래의 정복은 이미 있는 것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는데, 19세기 유럽인의 정복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인에게 궁극적 정복 대상은 자연이었다. 이민족 정복은 그들을 자연 정복에 동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을 미개인들에게 가르쳐주어 문명의 혜택을 일으켜주면서 자기네는 옆에서 약간의 로열티를 받는다는 것이 당시 유럽인의 일반적 믿음이었다. 피정복자들 중에는 이 믿음을 받아들여 정복에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근대문명의 침투력이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생산 방식, 조직 방식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불러왔다. 있던 도시들은 커지고 없던 도시들은 생겨나 변화의 주 무대가 되었다. 변화를 먼저 겪은 도시인은 정복자의 입장에 따라가 전근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농촌에 변화의 압력을 전했다.

"세계적 산업화의 가장 큰 위협은 생태문제에 있다"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시작해 오늘의 세계화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변화의 본질은 산업화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변화다. 너무나 큰 변화라서 인류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나온다. 지금까지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이 불안감을 부채질해 왔다.

산업화가 지금까지 일으켜 온 계급 모순, 민족 모순 등 부조리 현상은 대개 변화의 불균형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과정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산업화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다만, 이들 부조리 현상으로 인한 억압, 전쟁, 학살 등 인류의 고통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확대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가 고통만을 가져다준 것은 물론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변화의 과정에는 가치관의 변화도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의 가치를 엄밀히 평가할 기준이 없다. 그러나 보건 수준이 높아지고 평균수명이 길어진 것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다. 부작용이 있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축복은 축복이다.

평균수명의 연장은 인구의 폭발적 팽창을 가져왔다. 세계 총 인구가 10억 명을 돌파한 것은 18세기 말의 일로 추정된다. 20억 명에 도달한 것이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럽계 인구가 2억 명에서 7억 명으로 늘어나 인구 팽창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10년대에 20억 명을 돌파한 세계 인구가 갑절로 늘어나는 데는 불과 50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 후 40년 동안 다시 20억 명이 늘어났다. 이 폭발적 팽창의 주역은 제3세계였다. 출산률과 사망률이 모두 높던 전근대 상황에서 사망률만 갑자기 낮아진 결과였다. 팽창되는 인구를 대충 지탱해줄 식량 증산도 산업화를 통해 이뤄졌다.

세계적 산업화의 가장 큰 위협은 생태문제에 있다. 산업화가 시작될 때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는 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200여 년에 걸친 인류의 공격은 자연을 약자로 만들어놓았다. 자연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아껴야 할 내 자산임을 인간은 깨닫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각성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 인구의 압력이다. 수명의 연장과 인구의 증가는 산업화의 축복이면서 또한 모든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한민족은 19세기의 한민족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진 존재"

  한국 인구도 1906년의 첫 근대적 조사에서 1293만 명을 집계한 이래 계속해서 빠른 성장을 보였다. 1930년에 2000만 명을 넘었고 1945년 해방 때는 해외 인구 400만 명을 포함해 30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은 남북한과 해외 인구를 합해 800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100년 동안 6배의 증가다.

산업화 이전 세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04~0.05%로 추정된다. 19세기 이전 농업시대 한국에서는 이보다 약간 높은 증가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인구' 조에서는 1906년의 1293만 명으로부터 연 0.0518%로 역산하여 1392년 조선 개국 시점을 약 1000만 명, 660년대 신라 통일 시점을 약 675만 명으로 추산했다. 1240년 동안의 증가가 갑절에 미치지 못했다고 보는 이 추산은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000여 년 동안 갑절도 늘어나지 않은 한민족의 개체수가 최근 100년 동안 여섯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은 오늘의 한민족을 바라보는 데 기본적 고려사항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지켜 온 전통을 바라보는 자세에도 이 사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인 예로 매장풍속. 매장은 농업사회에서 토지와 인간을 맺어주는 중요한 풍속으로, 인륜의 근본으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시대보다 다섯 배 이상의 사람들이 해마다 세상을 떠나는 21세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지켜나갈 수 없는 전통이다. 도시생활의 확대도 여러 가지 전통을 약화시켜 왔다.

인구 증가를 필두로 한 상황의 변화 때문에 전통을 그대로 지키거나 복원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한민족이 지난 100여 년간 겪어왔고 지금도 겪어가고 있는 변화는 전 세계의 변화 속에 얽혀있는 한 부분이다. 이 변화를 통해 21세기의 한민족은 19세기의 한민족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의 공격이 인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변화 일변도로 매진할 수만도 없는 사정이 있다. 현대는 물론 변화의 시대다. 유럽의 산업화가 세계로 확산되어 온 200년 동안 변화는 가속을 거듭해 왔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발적 인구 팽창이 그 단적인 지표다.

그런데 근년 인구 팽창이 둔화되고 있다. 21세기 중엽에 약 100억 명선에서 세계 인구가 평형상태에 접어들 것으로 전문가들이 내다보고 있다.

인구의 안정을 설명하는 길은 여러 가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한 차례 정리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산업화는 자연을 타자(他者)로만 보며 공격적 태도로 출발했다. 이제 더 이상의 공격이 인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묶어서 보는 생태론을 이제 아무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인구 팽창의 둔화는 곧 변화의 감속을 뜻한다. 변화가 금세 중단되지는 않겠지만, "진보가 곧 미덕"임을 외치며 앞만 바라보고 뛰던 분위기는 이미 바뀌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는 더 많은 변화를 갈망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장만이 아니라 분배의 중요성도 의식하게 되는 데서 새로운 흐름의 조짐을 느낄 수 있다.

평형상태. '평형'은 평화와 균형을 떠올려주는 좋은 느낌의 말이지만 열역학에서는 끔찍한 의미를 품은 것이다. 21세기 중에 맞게 된다는 인구의 평형상태에는 열역학의 평형상태와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발전의 활력을 맛본 인간들은 변화의 길이 좁아지는 평형상태에서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마라톤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평형상태에 접근하는 세계에서는 남과의 싸움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하게 된다. 팽창상태의 세계는 플러스섬게임의 세계다. 승리자의 이득이 패배자의 손실보다 크다. 그런데 평형상태 세계의 게임은 제로섬게임이다. 남과의 경쟁에 기대이익보다 위험부담이 더 큰 게임이다.

"'질서'가 안정의 시대에는 막중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팽창시대에는 성장이 미덕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성장보다 안정이 더 중요한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안정이 중시되는 까닭은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 있다. 가장 중요한 한계가 인구의 한계와 자원의 한계다.

세계 인구가 100억 수준에서 안정되리라는 전망은 미시적 분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그 수준에 접근할 때 그에 따르는 부담을 극복할 길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증가가 억제되리라는 전망이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방법의 하나가 대규모 핵전쟁이고, 그 위협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어떻게든 강구되리라는 것이다.

에너지 저가(低價)체제는 20세기 내내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기반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화석연료의 소진이 목전에 다가온 지금까지 이 저가체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끝이 눈에 보이고 있다. 화석연료 소진은 환경 파괴와 함께 자원의 한계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지표다.

팽창시대에 중시되지 않던 '질서'가 안정의 시대에는 막중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20세기 초의 강대국들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데는 별 억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계 대전의 길로 빠졌다. 21세기 초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이라크를 요리하는 데는 훨씬 많은 억제력이 안팎에서 작용하고 있고, 또 늘어나고 있다.

남한에는 아직도 미국을 '맹방'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를 상대로 함께 싸우는 맹방인가? 북한을 상대로? 소련 소멸과 공산권 붕괴로 과거 맹방의 의미는 사라졌다. 미국의 지금 싸움은 다가오는 안정의 시대를 가로막기 위한 싸움이다. 미국에게는 팽창시대가 가져다준 특혜를 지키기 위해 시대변화를 막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핵무기를 마음 놓고 쓸 수 있게 해줄 미사일디펜스(MD) 구축이 이 경향을 대표하는 정책이다.

"안정의 시대에는 팽창시대처럼 큰 불평등이 용납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세계화의 기본 흐름은 산업화의 시대, 즉 팽창시대에 관성을 얻은 경제통합의 흐름이다. 이 흐름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입장에서는 인위적 질서를 배격하고 시장경쟁에 모든 것을 맡길 것을 제창해 왔다.

새로운 흐름이 지금 그 위에 겹쳐지고 있다. 시장만능의 경제통합이 대다수 인류에게 바람직한 상황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정치적 취향에 따라 판단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지만, 21세기 세계에서 가용자원이 줄어들 전망 앞에서는 폭넓은 동의가 모이고 있다. 엄혹한 자원조건 앞에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지 않고는 구조 전체를 위협할 참혹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흐름은 초기에 환경운동을 주축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NGO를 매체로 활동을 키웠으나 지금은 그 틀 밖으로 자라나 있다. 그 성장의 가장 큰 무대는 유럽연합이다. 산업화시대를 가장 철저하게 경험한 유럽 국가들이 상황 변화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경제통합 못지않은 정치통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자원의 한계에 부닥친 안정의 시대에는 팽창시대처럼 큰 불평등이 용납되지 못한다. 약자의 최소한의 생존조건이 바로 위협받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흐름 앞에 약화되어 온 국가의 역할이 불평등의 억제를 위해 새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 부각되는 국가의 역할은 절대주권을 표방하던 만국공법 체제의 국가와 다른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의 첫째 사명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이었으나 이제 협력이 더 중요하게 된다. 2007년 남한 대통령 선거에서 대부분 후보들이 외국과 경쟁하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아마 5년 후 선거에서는 극우파 후보만이 그런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다.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21세기 인류의 최대 과제다. 분단의 극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민족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과제다. 분단 극복을 통해 한민족은 어떤 국가를 가지게 될 것인가. 가용자원이 줄어드는 저성장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저성장 시대의 전통을 지금까지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