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西士신분의 확립

 

리치가 韶州에 처음 왔을 때부터 보좌하던 알메이다는 1591년에 병사하고, 그 뒤를 이은 페트리스도 1593년에 역시 병사했다. 중국선교단장으로 마카오에 주재하고 있던 산데는 1591년에 韶州를 한 차례 시찰했고, 리치는 1593년 초 肇慶에 출두한 길에 마카오에 나가서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발리냐노와 중국 선교의 방향에 대해 광범위한 의논을 나누었다. 이때 논의된 중요한 내용은 승려의 복장에서 儒士의 복장으로 바꿀 것과 새 기지를 개척하는 일이었다.[82]

[82] <中國誌> 258-259.

 

예수회의 순찰사 신부가 일본으로부터 중국(마카오)으로 돌아왔을 때, 리치 신부는 (중국)선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그 기반을 전파하고자 하는 복음의 위대함에 걸맞도록 넓고도 튼튼하게 만들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미 선교소에서 신부들의 호칭으로 이라는 부끄러운 말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부들은 (승려들과 같이) 독신생활을 하고, 절에서 살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그 호칭 자체가 어떤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데도 장애가 되었다. 신부들과 중국 승려들의 기능 몇 가지가 비슷한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다른 대상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치 신부는 순찰사 신부에게 신부들에게 수염과 머리카락을 기르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자들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을 위해 좋은 길로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승려)에게는 면도를 깨끗이 하고 머리를 짧게 치는 것이 정해진 규칙임을 설명했다.

그는 또한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신부들로 하여금 교육받은 중국인들과 같은 服飾을 하도록 하고, 관리들을 방문할 때 입을 비단 두루마기 하나씩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런 두루마기를 입지 않으면 관리들이나 지식층과 동격으로는 도저히 인정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끝으로 리치 신부는 자기 자신이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기지를 열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을 순찰사 신부에게 설득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짧은 기간에 두 선교사의 목숨을 앗아간 韶州의 불건강한 환경. 이것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기지를 가지는 장점은 선교사업의 안정성을 늘려주고, 한 기지에 불운이 닥치는 경우에도 전체 사업의 성패가 결정적인 위협을 받지 않으리라는 점. 순찰사 신부는 이 청원들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모두를 승인해 주고, 요청 하나하나에 대한 정식의 보고서를 로마의 (예수회) 총장 신부와 교황 성하께 보낼 일을 스스로 맡았다.”[83]

[83] <中國誌> 258-259. ( ) 안은 문맥에 따라 필자가 보충한 것임.

 

이 새로운 방침을 실천하기 위해 약 2년의 준비기간을 가진 후, 韶州의 선교사들은 1594년 말부터 儒衫을 입기 시작했고, 리치는 1595년 봄에 처음으로 廣東省을 떠나 南京으로 길을 떠났다. 이제 중국 선교는 마카오와 직접 관련이 없는 內地로 무대를 넓히게 되면서 復飾을 비롯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 현장의 고유한 상황에 적응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기 몇 십 년 전부터 활동했던 일본에서는 불교 승려들이 민간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중국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하고 종교인의 신분을 밝히는 복장을 처음부터 채택했던 것인데, 실제로 겪어 보니 중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승려의 권위가 아주 낮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테오 리치는 肇慶韶州에서 약 십년 기간을 지내는 동안 補儒易佛論’,[84] 儒家를 도와주면서 불교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예수회의 기본전략으로 채택될 방침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불교와의 차별화를 또한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그동안 활동해 온 광동지역에서는 服飾을 바꾼다고 해서 일반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가 없었다. 활동영역을 廣東省 밖으로 넓힐 필요는 이런 측면에서도 시급했던 것이다.

[84] 徐光啓<天主實義> 내용을 검토한 다음 去佛補儒라는 말로 소감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中國誌> 448.

 

韶州의 신부들은 점차 이 새로운 복식에 익숙해졌고, (중국인) 친구들은 이것을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이제 자기네 격식에 따라 신부들을 자기들과 동격으로, 그리고 더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는 자기네 승려들에게는 그렇게 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관리들과 상류층 중국인들은 언제나 신부들에게 경의를 가지고 대했는데, 이것은 신부들이 자기네 성직자들과 달리 뛰어난 학식과 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반면 이런 점을 알아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평민들은 승려란 다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상류층 사람들로 하여금 관습에 어긋나는 복장을 한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예절과 품위에 벗어나는 일이라도 없을까 하는 걱정으로 신부들을 동격으로 대하지 못하게 한 데는 신부들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學人, 즉 지식층은 그 사는 곳이 어디이든, 신분에 어울리도록 그 나라의 관습을 따르고 그 관습이 정해 주는 복장을 취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중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廣東省의 영역 안에서는 이라는 지긋지긋한 딱지를 신부들이 떼어버릴 수 없었다. 다른 에서는 도착하면서부터 學人계층과 같은 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하고도 유용한 일이었다.”[85]

[85] <中國誌> 259-260.

 

1595년 봄 리치는 병부시랑으로 임명되어 北京으로 가고 있던 石星의 일행에 끼어 마침내 廣東省 밖으로 여행할 기회를 맞는다. 石星이 리치를 일행에 끼워 준 동기는 그 아들의 병에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 석연치 않다. 일단 출발한 뒤에는 이 아들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오지도 않는다. 아무튼 리치는 石星의 일행에 끼어 南京까지 가서 면식이 있는 남경 工部侍郞 徐大任에게 의지하려 하였으나 는 리치를 엄하게 꾸짖어 남경에서 쫓아냈다.[86]

[86] <中國誌> 260-272.

徐大任의 노여움을 피해 南京을 떠난 리치는 韶州南京의 중간에 있는 江西省省都 南昌에 자리잡았다. 그의 南昌 정착을 도와준 사람은 石星 관계로 알게 된 王繼樓라는 醫員이었다. 그는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분이 넓어서 리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시랑이 리치의 南昌 정착을 도와주라고 자기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낸 것처럼 거짓 선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87]

[87] <中國誌> 276.

이 의원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어서 리치는 다시 관리들에게 줄을 댐으로써 南昌의 거주 허가를 받으려 애썼으나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중에 외국인의 존재가 이런저런 야릇한 소문을 南昌 성내에 뿌리게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강남 순무 陸萬垓가 리치를 찾아 관아로 불러들였고, 리치는 순무의 호의를 얻어 南昌에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88]

[88] <中國誌> 277.

南昌에서의 3(1596.6- 1598.9) 동안 儒士의 복장을 위하는 것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새로운 방법들이 갖추어지고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일은 肇慶에서나 韶州에서와 같이 주민들과 싸우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89]

[89] 그동안 韶州에서는 또 한 차례의 분쟁이 있었다: <中國誌> 287-289.

肇慶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의 관심을 얻은 것이 시계, 미술품, 서적(내용이 아니라 겉모양), 악기 등 신기한 물건들을 통해서였던 데[90] 비해, 南昌에서 리치가 과시한 것은 數學의 지식과 해시계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 기억술 등 지적인 면으로 바뀌었다.[91]

[90] <中國誌> 201.

[91] <中國誌> 276.

신기한 물건들의 효력이 그 동안 없어진 것이 아니겠지만, 리치의 중국어 능력이 늘고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물질에서 지식 쪽으로 비중이 옮겨진 것이다. 더 나아가 <交友論><西國記法>을 지음으로써 知的, 道德的인 면에서 중국 기준에 따라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도 南昌에서 시도된 일이다. 이 저술들을 통해 리치는 복장을 넘어 하나의 선비, ‘西士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1597년 여름 고아에서 마카오로 온 발리냐노는 환 다 로챠(Joao da Rocha 羅如望, 1566-1623)와 니콜로 롱고바르디(Niccolo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를 중국에 투입, 중국선교단은 韶州를 지키고 있던 라자로 카타네오(Lazzaro Cattaneo 郭居靜, 1560-1640), 1595년 이래 리치를 따라다니고 있던 환 소에리오(Joao Soerio 蘇如望, 1566-1607),[92] 그리고 리치까지 다섯 명이 되었다.[93]

[92]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참고자료로 가장 널리 활용되어 온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2vols., Shanghai, 1932-34)에는 선교사의 세례명이 모두 프랑스으로 적혀 있고, <中國誌> 영문판에는 모두 영어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자료마다 스펠링이 조금씩 틀리는 것이 꽤 있는데, 전체적으로 제일 정리를 잘 해 놓은 것이 Dehergne의 책이지만, 이것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논문에서는 Dehergne의 책에 따라 출신국 표기법을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93] <中國誌> 290-291.

그리고 선교단장 산데가 마카오에 머무르고 있던 상태 그대로로는 선교단의 원활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리치를 중국선교단장에 임명, 현지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재량권을 늘려주었다.[94] 이렇게 韶州南昌의 선교소를 지킬 인력이 확보되고 선교단의 틀이 잡힌 뒤, 지금까지 준비된 새로운 적응방법을 가지고 리치는 1598년 가을부터 중국의 중심부를 향해 다시 움직인다.

[94] <中國誌> 295-296.

 

15986, 리치는 카타네오와 함께 南京 吏部상서 王弘誨의 일행으로 南昌을 떠나 南京으로 향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도 瞿太素가 선전해준 과학지식 덕분이었다: “같은 무렵에 모든 관리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자리인 禮部상서가 北京으로부터 韶州에 도착했다. 그는 廣東省 해안 밖에 있는 고향인 해남도로 가는 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기쁘게 한 것은 그가 北京에서도 듣고 있던 수학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약속하기를, 고향에서 北京으로 돌아가는 길에 리치 신부를 皇都로 함께 데리고 가 중국 천문학자들이 고쳐내지 못하고 있는 曆法상의 착오를 바로잡는 일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는 이런 중요한 작업의 책임을 맡는 것이 자신의 위신에도 크게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95]

[95] <中國誌> 254: 이것은 리치가 韶州에 있을 때의 일인데, 1593년 초로 추정되지만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같은 책 297-298에 그 뒤 리치와 이 다시 연결되는 경위가 적혀 있다: “전에 리치가 만났던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北京에서 고향인 남쪽 해남도로 가는 길에 韶州에 들러 선교사들과 꽤 친하게 되었다. 그가 南京 吏部상서를 맡도록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리치는 들었다. 리치는 카타네오 신부에게 상서를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나도록 지시했다. 왜냐하면 상서는 皇都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중국 曆法의 별자리에 관한 착오 몇 가지를 바로잡도록 하고, 또 다른 수학 문제 몇 가지를 해명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다. 방문 중 말을 꺼낼만한 기회가 오자마자 신부들은 자기들 사정을 이야기하고, 황제에게 몇 가지 선물을 바치기 위해 北京까지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상서는 선물들을 보여달라고 해서 보고는 기꺼워했다.”

일단 南京에 도착한 뒤, 日本朝鮮 再侵으로 인해 상황이 여행에 좋지 않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보호자로 믿고 따라온 王弘誨조차 리치와의 접촉을 꺼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리치는 포기하지 않고 北京행의 길을 여러 방향으로 시도해 보고, 결국 황제의 誕辰을 경하하러 北京으로 가는 王弘誨의 짐을 호송하는 하인들 틈에 끼어 여행하게 되었다.[96]

[96] <中國誌> 299-301. 이 때 선교사들의 여행하는 입장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같은 책 356일행은 1600518일에 南京을 떠났는데, 이 여행 중에는 신부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고 한 데 비추어 알아볼 수 있다.

이 여행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11월 초에 北京을 떠난 리치 일행은 한 달 후 臨淸에서 운하의 凍結로 발이 묶였다. 리치는 하인 둘만을 데리고 육로로 먼저 南下하고 카타네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서 짐을 지키며 겨울을 나기로 했다. 리치는 瞿太素의 고향인 蘇州로 향했다.[97]

[97] <中國誌> 315-316.

瞿太素는 그 무렵에 몹시 형편이 쪼들려 있었다. 그는 고향인 蘇州에 있지 않고 (빚쟁이들을 피해?) 부근의 丹陽이라는 마을의 절에 비좁은 숙소를 가지고 있어서 리치는 바닥에 누워서 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98]

[98] <中國傳敎史>에는 瞿太素가 양보한 침대를 리치가 받아들여 瞿太素가 바닥에서 잤다고 했는데 誤譯인 듯하다.

路毒이 병이 되어 한 달을 앓고 난 후 리치가 瞿太素의 정성스러운 看病에 보답하기 위해 프리즘을 비롯한 몇 가지 선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의 활동을 위해 瞿太素의 협조를 확실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 같다. 瞿太素는 이 프리즘을 예쁜 銀製에 넣어 하늘의 조각이라고 선전, 오백 량이 넘는 값에 팔아 그 돈으로 그는 많은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이 일을 그는 내내 잊지 않아서 선교사업에 대한 그의 열성을 북돋워 주었다고 리치는 기록했다.[99]

[99] <中國誌> 318.

리치는 南京에 자리 잡고 싶은 미련이 있었지만, 몇 해 전 徐大任에게 쫓겨나던 기억이 생생해서 瞿太素의 권유에 따라 蘇州에 자리 잡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南京을 꺼린 가장 중요한 이유가 南京에는 관리들이 많기 때문에 그 중의 누구에게라도 미움을 받아 쫓겨나게 될 위험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몇 주일 후 南京에서 만난 한 사람은 바로 그 이유를 들어 南京이 더 안전함을 주장했다고 한다. 南京에서는 관리 한 사람의 미움을 받아도 다른 관리 열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 비해, 지방도시에서는 몇 안 되는 관리 가운데 하나라도 비위를 거스르면 만회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100]

[100] <中國誌> 323.

리치와 瞿太素吏部상서 王弘誨의 추천서를 얻으면 蘇州 정착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15992월 초 南京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南京에 가보니, 倭亂 종결로 몇 해 전의 불안한 분위기가 깨끗이 가셔져 있을 뿐 아니라 상서도 南京에 정착할 것을 강력히 권유해서 蘇州 정착 계획을 버리고 南京에 눌러앉게 되었다.[101]

[101] <中國誌> 319-322.

南京에서 리치는 상당한 名士로 통하게 되었다. 瞿太素를 만난 무렵 시작한 중국 고전 공부도 상당히 진척되었고, 세계지도의 작자로, <交友論><西國記法>의 저자로 명성도 쌓였다. 불교의 공격도 韶州에서 우상파괴를 방조하던 수준보다 많이 진전되어서 南京 불교계의 일류 논객 三淮화상을 맞아 당당한 논설을 편 것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았다.

 

리치 신부는 그 권유를 받아들여 이런 말로 토론을 시작했다: ‘본격적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천지의 기본원리와 만물의 창조자, 우리가 天主라 부르는 분에 대해 당신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자 합니다.’ 이에 상대방(三淮화상)은 열심히 대답하기를, 그는 천지의 주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 주재자가 이라든가 특별한 권능을 가진 존재로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나 자신이나 여기 있는 어느 분이라도 그와 대등한 존재이며, 그에게 특별히 敬意를 표할 아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하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깔보는 시늉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 말한 그 주재자보다 자기가 더 잘났다고 보이기를 바라는 품이었다. 그러자 리치 신부는 지금 얘기대로라면 천지의 창조주께서 명백히 해 놓으신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할 수 있는 모양인데, 그리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은 과연 자기도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리치 신부는 그러면 방 안에 마침 있던 화로와 같은 화로를 하나 만들어 보여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승려는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여 신부가 그런 일을 청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이에 리치 신부는 함께 목소리를 높여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기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그 해박한 신비론자는 자신의 괴기한 이론의 원리를 빙빙 둘러가며 講解하기 시작했다. 승려가 질문했다: ‘당신이 해와 달을 쳐다볼 때 당신이 하늘로 올라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해와 달이 당신에게 내려옵니까?’ 리치 신부가 대답했다: ‘어느 쪽이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오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 그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나중에 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려 할 때는 우리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승려는 마치 토론의 승리자인 양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바로 그것입니다. 새로운 해와 새로운 달이 당신의 마음속에 만들어진 것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사물도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 도로 앉아서 토론을 승리로 끝낸 사람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차례를 맞은 리치 신부는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진 형상은 해와 달의 그림자일 뿐으로, 이는 해와 달 자체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논증했다: ‘실체와 그림자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해와 달의 실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들을 창조하기는커녕, 마음속의 그림조차 만들어낼 수 없지 않습니까? 거울 속에 해와 달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거울이 해와 달을 창조했다고 말할 바보가 있겠습니까?’

좌중의 사람들은 승려의 주장보다 이 설명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승려는 자신의 無知를 감추기 위해 또 한 차례 소리를 높여 언쟁을 돋우고, 뒤이은 좌중의 소란에 자기 주장의 가치를 의탁하려 들었다. 마침내 주인이 어떤 불상사라도 날까봐 걱정이 되어 토론을 종결시키고는 친구인 승려를 따로 불러내서 더 이상의 논쟁을 삼가도록 충고했다.”[102]

[102] <中國誌> 339-341.

 

리치는 이 토론에 크게 고무되어 그 내용을 기록, 준비하고 있던 교리서의 한 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103] 토론 중 쌍방의 독단이 교착되었을 때 리치가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토론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야지,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다르고 어느 쪽도 상대방의 經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함께 가진 理性을 통하지 않고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104]

[103] <中國誌> 343: <天主實義> 7장을 가리킴.

[104] <中國誌> 342.

南京에서 1년 남짓 지낸 뒤 물자 보급을 위해 마카오에 갔던 카타네오가 새 선교사 디에고 판토하(Diego Pantoja 龐迪我, 1571-1618)와 함께 돌아오고 南京 선교소도 자리가 잡힌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재차 北行을 계획했다. 제일 먼저 책략에 능한 瞿太素李心齋라는 인물[105]과 더불어 방안을 의논한 다음 어사 祝世祿을 찾아가 의논과 도움을 청했다. 그로부터 여행 허가에 대한 확약을 받은 후 北京에 가져갈 進貢品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이 여행을 서두르게 된 데는 南京의 가장 유력한 후원자였던 吏部상서 王弘誨가 퇴직하고 海南島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참이었으므로 그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동안 소개장을 얻을 필요도 있었던 것 같다.[106]

[105] <中國誌> 322: 賣文으로 삼은 인물로, 능력이 없는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數學書를 꾸며내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106] <中國誌> 354-355.

카타네오로 하여금 南京을 지키도록 하고 리치는 판토하와 함께 1600518일에 길을 떠났다. 이 여행 도중 리치 일행은 관리와 환관들 사이의 알력에 말려들어 많은 위험을 겪고 天津에서 太監 馬堂에게 억류된 채 새해를 맞았다.[107] 이 최악의 시련을 넘기고 1601124일에 北京에 입성함으로써 리치는 그 가장 화려한 활동무대로 들어선다.

[107] 그 경위는 다음 절에서 다룰 것임.

 

리치가 北京에서 교분을 시작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馮應京, 李之藻 등 협력자들이었다. 李之藻(1565-1630)는 당시 工部 관리로 있었는데, 처음 리치의 세계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가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 학술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리치의 여러 책에 서문을 써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치가 죽기 직전 세례를 받은 는 자신이 죽기 전 해에 <天學初函>으로 당시까지 나온 주요한 西學書를 집대성하여 그 보급을 원활하게 하였다.

馮應京湖廣 僉事로 있던 중 稅監의 전횡을 상주했다가 거꾸로 무고를 당해 리치가 北京에 정착할 무렵 투옥되었는데, 3년간 옥중에 있으면서도 리치의 저술 간행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치의 西泰子라는 필명도 馮應京이 확정해준 것이라 한다.[108] 그 전에는 리치가 북경으로 오던 중 濟寧에서 李贄를 만났을 때 李贄의 친구인 漕運총독 劉東星이 리치를 西泰선생으로 부른 일이 있다.[109]

[108] <中國誌> 394-397.

[109] <中國誌> 357.

리치의 대인관계를 살펴봄에 있어서 李贄와의 관계를 눈여겨 볼만하다. 리치의 기록 중에 李贄에 관한 것이 세 차례에 걸쳐 나온다. 맨 처음은 리치가 南京에 처음 정착해서 교유한 名士들을 나열할 焦竑함께 언급되었다:

 

그의(焦竑) 집에 같이 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관직을 버리고 머리를 깎아 관리의 신분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옮겼으니, 중국 지식인 간에는 극히 희귀한 일이다. 그는 博學70세 노인이었는데,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불교계에서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 저명한 인물들은 모두 리치 신부를 몹시 경중했는데, 특히 관리 출신의 승려가 더해서, 그가 외국인 신부를 방문해 온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그 얼마 전, 학인들의 모임에서 기독교의 법칙이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때, 이 사람 혼자만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으니, 그는 기독교의 법칙이 인생의 유일한 진리라고 믿은 때문이다.”[110]

[110] <中國誌> 334.

 

리치가 李贄를 다시 만난 것은 16006월 경 北京으로 가는 도중 濟寧에서였다. 여기서 리치는 李贄, 그리고 앞에 적은 총독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111] 총독의 호의로 많은 편의를 얻었다. 이곳을 떠날 때의 所懷를 리치는 이렇게 기록했다.

[111] <中國誌> 358: “그는 하루 종일 관저에서 지내고 李贄, 그리고 총독의 자제들과 함께 식사했다. 이 방문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어서, 그는 자신이 지구 반대편에서 이교도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편안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부들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이곳에서의 호의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또한 총독과 李贄 두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이것을 당시에 하지 못한 까닭은 방문기간이 너무나 짧고, 船團 인솔자가 北京으로 가는 일정을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안 되어 총독과 李贄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총독은 재임 중에 죽었고, 李贄北京에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어떤 관리가 李贄와 그의 책들을 황제에게 고발했다. 이에 황제는 李贄를 투옥하고 그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李贄는 공개적으로 모욕받고 적대자들의 선전에 이용되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었다. 중국인으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기이한 인물은 평소 추종자들에게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해 온 것을 입증하려 하였으며, 또 그리함으로써 자신이 불명예 속에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한 적대자들을 실망시키려 한 것이다.”[112]

[112] <中國誌> 359.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리치가 李贄를 기독교로 끌어들일 희망을 이때까지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李贄의 자살을 도덕적으로 심하게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리치가 北京에 정착한 후의 경위를 적는 가운데는 李贄의 죽음을 기록하는 필치가 전연 달라진다.

 

翰林院의 비판자는 관직을 내던지고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었다. 그는 야심 때문에 명성을 필요로 했으며, 이를 위해 제자를 모으고 책을 써서 유교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불교를 옹호했다. 그러던 그가 마치 하느님의 손길에 의한 것처럼 저지당했다. 그가 北京에 들어오려 할 때, 그의 변절이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北京給事中 한 사람이 그의 변절을 不軌로 고발하고 그의 교리를 異端으로 비판했다. 고발자는 황제에게 그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그를 중죄에 처할 것을 청했다. 황제는 그를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하고 그가 지은 글을 모두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그는 공포와 치욕 속에 北京에 들어왔고, 70세의 나이에 이와 같은 불명예를 견뎌낼 용기가 없었던 나머지 감옥에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악명 높은 교리는 이 추악한 죽음으로 끝장이 났는데, 그는 이 죽음의 방법이 가장 고결한 것이라고 말했다.”[113]

[113] <中國誌> 400-401.

 

濟寧에서 떠날 때의 회고와는 너무나 다른 필치다. 불교에 대한 리치의 적대감이 워낙 강렬했던 때문에 불교를 비판하는 문맥 속에서는 같은 인물에 대한 기록도 이렇게 달라졌던 것인지? 위 인용문에는 李贄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혹시 자살한 이 인물이 자기 친구 李贄인 줄 모르고 썼던 글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위 글은 트리고가 정리한 글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리치 자신의 글에서 번역한 중문판에는 李贄의 이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114] 그리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된 70세 인물이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한편 李贄가 리치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밝혀주는 것으로는 언제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李贄가 친구에게 쓴 편지가 하나 있다.

[114] <中國傳敎史> 374.

 

자네가 利西泰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大西域 사람이라네. 중국까지 10만여 리의 거리인데, 처음 항해로 4만여 리를 와 南天竺에 이르러 비로소 부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廣州 南海에 이른 연후에 우리 大明 국토에 앞서서 堯舜이 있었고 나중에 周孔이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네. 南海肇慶20년가량 살면서 우리나라의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이제는 우리말을 말하고 우리글을 쓰고 우리 예법을 지키는 데 못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네. 속으로는 더할 수 없이 갖추어져 있으면서 겉으로는 비길 데 없이 소박한 모습이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일세. 내가 본 사람 중에 그와 견줄만한 이가 없으니 너무 뻣뻣하지 않으면 너무 굽실대는, 너무 똑똑한 체 하지 않으면 마음과 생각이 너무 좁은, 그런 사람들은 모두 이 사람 아래로 봐야 하겠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그를 세 차례 만나보았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네. 혹시 자기 배운 바를 가지고 우리 周孔의 공부를 바꿔치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니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115]

[115] 李贄, <續焚書> 1, 與友人書.

 

李贄와의 관계에서 묘하게 꼬여 있는 리치의 태도를 보았는데, 여기서 瞿太素와의 관계도 연상해 보게 된다. 중국 지식인으로 가장 오래 리치와 교유한 瞿太素1605년에 입교했다. 그가 오랫동안 선교사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로 두 가지를 리치는 지적했다. 첫째는 그가 두 아이를 가진 後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신분 차이 때문에 정식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것, 둘째는 우상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에 관한 책을 써서 명성을 떨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116] 그런 그가 마침내 입교하게 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16] <中國誌> 467.

 

그는 南京에 오는 길에 열네 살짜리 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기독교인으로 교육시키도록 신부들에게 맡겼다. 그는 늘 말하기를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천당에 이르는 길이 따로 없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 때 마침 黃明沙 수사가 무슨 일인가로 南京에 와 있었다. 그는 瞿太素廣東에서 신부들과 함께 지낼 때부터 알게 된 이래 가까운 친구로 지내 왔었다. 瞿太素가 결심을 못한 채로 그 여러 해를 지내고도 아직도 외교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안 修士는 그에게 우정 어린 질책을 퍼부었다. 그의 방종한 생활태도에 대해, 그리고 천주님의 은총을 그토록 완고하게 외면하는 자세에 대해. 천주님의 은총이 바로 이 修士의 꾸짖는 말 속에서 크나큰 조화를 일으켰음이 틀림없다. 瞿太素가 그 자리에서 천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 이상 구실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는 <天主實義>를 읽고 또 읽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한동안 몰두하고는 마침내 세례를 청했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후실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가지고 있던 偶像, 인쇄용 목판, 그리고 異端 諸派에 관한 서적 일체를 선교소로 보내면서 불태워 달라고 청했다.”[117]

[117] <中國誌> 469.

 

여기에 음미할 점들이 조금 있다. 이 때 黃明沙32세였는데,[118] 연장자일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도 훨씬 높은 瞿太素와 친구 관계로 지내 왔고 질책을 퍼붓기까지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119] 리치는 瞿太素에 대해 실제보다 상당히 미화해서 기록한 것 같은데도 1598년 말 瞿太素의 고향에 찾아갔을 때 그의 곤궁한 모습을 기록한 적이 있다.[120] 아마 세례를 받을 무렵까지 瞿太素의 신세가 완전히 零落해 있어서 그 아들을 데려온 것도 부양하고 교육시킬 길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도 선교소에 의탁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徐光啓1607南京에 들렀을 때 瞿太素를 훈련시켜 훌륭한 敎友로 만들었다[121]고 하는데, 자신보다 훨씬 먼저 선교사들과 교유를 시작했고 <天主實義> 작성에 도움까지 주었던 瞿太素를 훈련시켰다고 하는 것은 세례 후에도 瞿太素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18] Pfister 14번에 1573년생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中國誌> 489에도 1606黃明沙가 죽을 때 33세였다고 하였다.

[119] “도덕을 다룬 중국의 서적들은 어린이가 부모와 연장자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가득차 있다는 리치 자신의 기록이 있다: <中國誌> 72.

[120] <中國誌> 318.

[121] <中國誌> 544.

北京 정착 후의 기록은 리치 자신의 활동보다는 다른 지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쪽으로 비중이 옮겨진다. 416장까지 北京의 사정이 어느 정도 낙착된 뒤로 리치의 활동이 직접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과학의 소개와 출판활동을 다룬 제57장뿐이고, 16장에서 北京의 선교활동을 개관한 것이 있을 뿐이다. 리치의 죽음과 그 뒤처리를 다룬 마지막 두 장은(520, 21) 물론 동료 선교사들이 기록한 것이다.

北京시대의 자신의 활동을 기록한 비중이 크게 줄어든 데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선교단의 규모가 커지고 각지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전개된 때문에 리치의 활동이 차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다소 줄어들기도 했을 것이다. 北京에서 리치의 위치가 안정되어서 그 전처럼 큰 위험이나 굴곡을 겪는 일 없이 편찬사업과 교제활동, 선교단의 지휘 등 일상적인 업무에 매여 있게 되어 특기할 일이 적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리치가 너무나 바빠져서 개인적인 기록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中國傳敎史>를 편찬할 자료가 공식문서 쪽으로 옮겨진 데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리치는 16052월 로마의 마셀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한문)책을 쓰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장래에는 나보다 더 총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 너무 바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이어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이미 이 나라 지식층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중국에 있는 모든 신부들에게 중국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기독교의 믿음 안에 들어올 수 있느냐 여부가 여기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122]

[122] <書信集> 269.

리치 자신의 활동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北京에 자리 잡고 있던 그의 위치가 각 지방의 활동에 영향을 끼친 사례들을 통해 그 윤곽을 비춰볼 수 있다. 韶州에서 선교사들과 교분이 있던 한 유력인사는 北京에 가는 길에 리치를 만나보고는 韶州에서는 경멸의 대상처럼 되어 있는 신부들이 여기서는 大官들에게 얼마나 존중받는지 눈여겨 본 그는 나중에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부들을 두둔하는 말을 해서 외국인이라는 이름에서 벗겨지지 않는 의심의 구름이 거두어지도록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123]

[123] <中國誌> 412.

南昌에서도 1607년 큰 집을 사서 선교소가 옮기려 할 때 지방 秀才들이 기독교의 창궐을 知府에게 고발했지만 北京에서 리치와 교유한 바 있는 知府는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124] 뒤에 이 문제가 악화되어서 관아에게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知府는 우매한 백성에게 邪敎를 전파한 죄를 따지는 秀才들에게, “아니, 우리가 우리 백성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마 당신들은 마테오 리치 일행이 北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고, 황실에서 경비까지 지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지? 皇都에서도 거주를 허가받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들이 감히 다른 도시에서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반박하였다 한다.[125]

[124] <中國誌> 523.

[125] <中國誌> 527.

1606廣州의 관헌이 마카오를 적대하는 상황에서 黃明沙 수사가 간첩으로 몰려 獄死한 후의 긴박한 사태를 선교사들에게 유리하게 낙착시켜 준 按察司 관원 張德明도 리치와의 교분 때문에 호의를 베푼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26] 5冒頭에서 首都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의 영향으로 인해 몇 해 사이에 선교단의 위상이 크게 안정되었으며, 그 결과 기독교의 신앙이 이곳저곳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한 것이[127] 이 시기의 적절한 요약일 것이다.

[126] <中國誌> 492.

[127] <中國誌> 441.

앞에서 南昌 시기까지 다섯 명의 선교사가(리치, 카타네오, 소에리오, 로차, 롱고바르디) 중국에 들어와 있었고, 판토하가 들어와 리치의 北行에 동행한 것을 밝혀 놓았다. 리치의 북행 후, 그동안 마카오에서 지원업무를 맡고 있던 디아스(Manuel Diaz 李瑪諾, 1559-1639)가 남부 선교소들을(韶州, 南昌, 南京) 관찰하기 위해 1601년 들어와 南昌에 자리 잡았고, 1598년부터 1603년까지 마지막 일본 체류를 끝내고 돌아온 발리냐노가 1606년 자신의 죽음 전까지 7명의 신부를 투입했다. (1604: 페레이라 Gaspar Ferreira 費奇觀 1571-1609, 리베이로 Pedro Ribeiro 黎寧石 1572-1604, 테데시 Bartolomeo Tedeschi 杜祿茂 1572-1609. 1605: 로드리게스 Jeronimo Rodrigues 駱入祿 ?-1630, 실바 Feliciano da Silva 林斐理 1578-1614, 바뇨니 Alfonso Vagnone 王豊肅/高一志 1566-1640. 1606: 우르시스 Sabatino de Ursis 熊三拔 1575-1620) 그래서 한때는 14명까지 늘어났던 신부 수가 소에리오와 테데시의 죽음(1607, 1609)으로, 그리고 디아스와 로드리게스의 마카오 귀환(1609)으로 10명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대략 이 정도 숫자의 신부들이 北京, 南京, 韶州, 南昌, 네 곳 선교소를 운영하고 있던 것이 리치가 이룩한 선교단의 규모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