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설화에 나오는 초자연적 존재는 도깨비와 귀신, 선녀 정도다. 그에 비해 서양의 설화에는 난장이, 거인, 정령, 요괴, 마귀할멈, 요술사 등 등장인물이 화려하다. 안정된 농업문명을 오래 누려온 문명과 다양한 활동영역이 뒤얽혀 발전해 온 문명의 차이로 볼 수 있다.


특히 해양활동의 중요성을 오래 간직해 온 서양에는 인어의 전설이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인어를 아름다운 순정의 표상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인어는 여성(mermaid)만이 아니라 남성(merman)도 존재했으며 난파를 상징하는 불길한 존재로 여겨졌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사이렌도 원래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모습으로 출발했다가 차츰 인어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고 한다. 오디세이는 밀랍으로 귀를 막고 돛대에 몸을 묶어 사이렌의 유혹을 피했다 하고 오르페우스는 거룩한 노래를 힘차게 불러 사이렌의 노래를 이겨냈다고 한다. 항해자의 불안한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사이렌이었고, 이것이 인어를 보면 배가 난파한다는 중세의 미신으로 이어졌다. 비련(悲戀)의 여인이 슬픈 노래로 배를 난파시킨다는 로렐라이의 전설도 여기서 파생한 것이다.


동화작가로서 안데르센에 대한 파격적인 평가는 동화의 세계를 ‘즐거운 읽을거리’에서 ‘도덕적 사실주의’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무난한 해피엔딩보다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비극성이 많다. 지순한 사랑이 운명의 질곡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물거품의 덧없음으로 돌아가는 ‘인어공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인어공주의 비극에 감동한 독지가가 1913년 세운 인어 동상은 코펜하겐의 자랑거리일 뿐 아니라 온 세계 동심의 상징물이다. 1964년 이 동상의 목이 잘린 일이 있다. 몇 달 전 덴마크의 한 화가가 사이비 예술에 대한 분노로 자기가 한 짓이라고 밝혀 3십여 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지난 주 인어의 목이 또 잘렸다. 남성 위주의 성적 환상에 대한 응징이라고 어느 자칭 여성운동단체가 주장하고 나섰다. 안데르센의 작품에서 성적 환상 밖에 읽어내지 못하는 그 마음이 딱하다. 인어의 목을 지키기 위해 이번엔 특수강으로 복원하겠다는 코펜하겐 시의회의 결정도 또한 안쓰럽다. 단단한 목이 동상을 테러에서 지켜준들 인어공주의 감동스러운 사랑까지 험한 세태로부터 지켜줄 것인지.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自由와 安定性  (0) 2012.01.07
기병대와 대통령부인 (1998. 1. )  (0) 2012.01.07
선양(禪讓)과 방벌(放伐) (1998. 1. )  (0) 2012.01.04
이제 마라톤의 나라로 (97. 12. )  (0) 2012.01.03
재벌의 겨울 (1997. 12. )  (0) 2012.01.0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