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 같은 거대기업군은 단독기업에 비해 여러 가지 경영상의 이점을 가질 수 있다. 경영학자들은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 등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규모의 경제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거니와, 생산공정뿐 아니라 기술개발, 판매, 자본운용 등 여러 방면에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범위의 경제는 기술적으로 연관된 제품이나 서비스 중 일부를 위한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은 시장실패(market failure)의 상황에서 기술적 연속성을 확보해주는 수단이 된다. 석유화학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요즘 많이 얘기되고 있는 시너지 효과는 폭넓은 기업활동의 범위를 단일한 경영단위로 운영하는 데서 얻어지는 이점이다. 정보의 대규모 수집과 활용, 판매망의 복합적 활용, 기업 이미지의 활용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연구개발에 있어서도 연구영역을 넓히고 심화하는 데 좋은 조건이 된다.


이런 이점들은 기업의 외부환경이 미개할수록 두드러진 효과를 낸다. 시장기능이 미비한 만큼 일체의 대외적 거래에는 큰 비용이 따르게 돼 있으니 기업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대외적 거래를 내부거래로 대치하는 만큼 비용은 절감되는 것이다. 60-70년대 경제개발기의 재벌조성정책을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다.


경제개발기에 긴요한 역할을 수행한 재벌체제가 80년대 이후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도덕적 문제 이전에 시대적 조건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동안 시장의 발달로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재벌의 이점은 퇴화되었다. 그 대신 경제외적 측면에서 막강한 교섭능력이 재벌들의 최대 무기로 등장했으니 정경유착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국의 금융체제를 통째로 부실화시킨 것은 재벌의 부정적 기능이 극한에 이른 결과며, 금년 들어 몇 개 재벌의 도산은 파탄의 한계점을 이미 지나쳤음을 보여준다.


IMF체제가 재벌해체의 길을 바라본다는 전망에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오만과 횡포가 응징당한다는 통쾌함도 있고 해묵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개선될 기회가 아닐까 하는 희망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이 나라의 경제적 주체성이 유린돼 버리는 것이 아닐까 불안감을 어쩔 수 없다. 경제적 효율성의 보루로서 재벌의 순기능이 옥석구분(玉石俱焚)을 피해 살아남기 바란다.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양(禪讓)과 방벌(放伐) (1998. 1. )  (0) 2012.01.04
이제 마라톤의 나라로 (97. 12. )  (0) 2012.01.03
공룡의 고민 (1997. 12. )  (0) 2012.01.01
양귀비의 누명  (2) 2011.12.31
생활영어와 국제영어  (0) 2011.12.31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