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미터 선수의 몸은 힘이 넘치게 생겼다. 스타트라인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만 봐도 출발신호와 함께 폭발할 힘이 한 눈에 보인다.


이에 비해 마라톤 선수들의 몸은 얼핏 특징이 없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세심히 뜯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도록 잘 다듬어졌어도 전체적으로는 두드러진 곳 없는 균형잡힌 몸이 훌륭한 마라톤 선수의 자격이다.


십 초 동안 신체기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백 미터 경주와 두 시간 넘는 레이스를 견뎌내야 하는 마라톤의 차이다. 약물복용문제가 단거리 선수들에게 많은 반면 마라톤의 경우는 거의 없는 것도 이 차이 때문이다. 대개의 약물은 짧은 시간 동안 힘을 바짝 짜내는 데 도움이 되지만 마라톤의 지구력에는 작용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마라톤은 정직한 경기라고들 한다.


IMF의 성장률 완화 권고를 받고 돌아보니 우리는 그 동안 참 열심히도 뛰었다. 50년대 후반부터 연평균 5% 가까운 성장률을 보이기 시작해 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는 온 세계가 놀라는 경제성장을 거듭해 왔다. 해방 때 이미 뒤져 있었고 6.25로 더욱 뒤쳐진 출발이었지만 40여 년만에 선두가 보이는 위치까지 와 있다. 단거리 선수의 스피드로 장거리를 달려 온 셈이다.


오늘날의 경제파탄을 페이스 조절 실패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신체상태의 균형을 장시간 지켜나가는 마라토너의 침착성을 우리는 익히지 못한 것이다. 빨리 달리는 데만 몰두하면서 국가권력이라는 약물로 억눌러 온 경제적 균형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융의 부실화는 더 큰 건강문제의 하나의 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약물남용을 말리는 IMF 권유는 선의로 받아들여야겠다. 좋든 싫든 세계화의 시대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존해 무리한 구조를 한없이 끌고 가려는 약물중독의 국가경제는 멀리 갈수록 더 큰 파탄이 기다릴 뿐이다. 당장은 걸음이 늦춰지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레이스 자세를 가다듬을 기회다.


악몽 같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 반세기를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싶다. 우리가 참여해 온 경제의 경주는 단거리인가, 마라톤인가. 이 경기의 목적은 끝없는 싸움에 있는 것인가, 내 건강의 향상에 있는 것인가. 손기정(孫基禎)과 황영조(黃永祚)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마라토너의 자세를 갖춘다면 내일 열리는 한 해는 우리에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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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