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중국의 왕조교체에는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이 유행했다.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 헌제(獻帝)로부터 이 형식으로 천자의 자리를 넘겨받아 위(魏)나라를 세우더니 불과 4십여 년 후 그 자손이 같은 형식으로 진(晋)나라에게 천하를 빼앗겼다. 그 7백년 후 송(宋) 태조(太祖)의 등극까지 대부분의 왕조교체는 실제로는 권력탈취이면서도 겉으로는 덕 있는 사람에게 천하를 양보한다는 선양의 형식을 취했다.


선양은 옛 성군(聖君)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다시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천하를 넘겨준 고사에 의탁한 것이다. 우임금 이후에는 세상이 타락해 탕(湯)임금이 걸(桀)임금을 치고 무왕(武王)이 주(紂)임금을 치듯 방벌(放伐)이 유행하게 됐는데, 이를 돌이켜 상고(上古)의 미풍(美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찬탈(簒奪)의 실상을 분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나 근세와는 달리 무력에 의한 방벌이나 정복보다 선양의 형식이 중세에 유행한 것을 중세의 특징인 분권적 권력구조로 설명한다. 장원(莊園)경제에 기초를 둔 지방의 호족세력이 강고했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은 절대화되지 못하고 귀족세력 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합의 재편은 수시로 일어났고, 그것이 선양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복에 비해 선양은 분명히 평화로운 정권교체방법이었다. 그러나 선양의 분위기가 평온할수록 넘겨받은 왕조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데서 역사의 비정함을 느낀다. 평온한 만큼 체제의 정비와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명목은 선양이지만 실제로 정복의 분위기 속에 세운 당(唐)나라가 그중 국세를 크게 떨친 예를 볼 수 있다.


진행중인 정권인수작업을 놓고 점령군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당사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지금의 위기상황이 한편으로는 평온한 인수를 강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정비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 상황과 장기적 과제들 사이에서 강약-완급의 효과적 조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훌륭한 운동경기에서는 스코어에 관계없이 양측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 반면 어느 쪽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졸렬한 경기도 있다. 지금의 긴박한 상황을 보면 지난 대선은 오픈게임이었을 뿐, 본경기는 이제부터라는 생각도 든다. 소여(小與)와 거야(巨野)의 선전(善戰)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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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