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서는 26日 오후 2시 반 黃金町 일본생명빌딩1층에서 國民黨 明濟世, 建國同盟 李如星 韓鳳石 崔謹愚, 朝鮮共産黨 金炯善 鄭泰植, 高麗國民同盟 廉廷權, 臨時政府歡迎準備會 李豊求, 政黨統一期成會 朴文熹 金成琦 등 각 정당대표자 약 백여명(한국민주당에서는 불참)과 이 날 새로이 통일위원회에 참가를 희망한 문화·학술·산업단체대표 약 5백여 명을 심사한 결과 정식으로 참석시키고서 의장 朴文熹의 사회로 전체위원회를 개최하였었는데 신탁통치문제를 비롯하여 左記와 같은 4개사항을 가결하였다.

(중략)

◊ 성명서

일본이 패배하자 조선은 카이로회담에 의하여 당연히 완전한 자주독립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연합국에 만강의 사의를 표하면서 그 실현이 급속하기를 고대하였다. 우리가 목하 제종의 불편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정에 최대의 협력을 아끼지 않는 것도 자주독립의 과도적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外電은 조선통치설을 전하고 있으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기대에 배치됨이 너무나 크며 幼滅이 이에 더할 데 없다.

조선민족은 4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혁혁한 문화를 가졌고 완전한 독립국가를 유지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과 열의를 가진 것은 각국이 충분히 인식할 줄 믿는다.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우리는 해내외에서 수많은 동지가 혈전고투하여 해방에 노력해온 것을 그들이 시인하고 원조까지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운운함은 조선민족을 모욕하고 기만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총의를 대변하여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1945年 10月 26日

각당행동통일위원회

매일신보 1945년 10월 2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시 한국인의 신탁통치설에 대한 일반적 반응을 보여주는 성명서다. 이에 비해 전날 인공 중앙위에서 낸 담화에 보다 흥미로운 논점이 보인다. 밑줄 친 부분이다.


조선을 연합국에서 신탁관리를 한다는 外電에 대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25日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뉴욕 20일발 통신에 의하면 미국무성극동부장 빈센트氏는 20日 미국외교정책협회 회합에서 극동정책에 대한 담화 중 조선 문제에 언급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바이다. 그 말에 의하면 조선을 신탁관리 한다는 이유가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지금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사정을 모르는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에 있어서 북위 38도 이북에 있는 북조선에서는 조선인의 자주력만으로 충분히 통치해 나아갈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각 부면에 있어 신건설이 벌써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은 자주독립이 완성되는 날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이다. 다만 지금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압박에 의하여 조선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선인이 자주독립할 能力이 없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8月 15日까지 세계민주주의 제국을 기만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합리화하려는 악선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미 정부가 인식하지 못하면 미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리라고 단언한다. 북위 38도 이남의 우리나라 일대에서는 村·面·郡·道를 막론하고 인민위원회의 조직이 완성되어 있고 완전한 통일체가 수립되어 있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 민족자주적인 국가행정을 할 수 있는 국가체제는 준비되어 있다. 문제는 남조선 일대의 정권이 조선인의 손으로 넘어오는 것만 남아있는 것이다.

미국은 ‘조선을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독립한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만들 작정이다’란 말이 진정이라면 조선에 신탁관리제를 수립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있을 뿐이고 절대로 불필요한 일이다. 우리 전 민족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한 오늘에 있어서는 하루라도 빨리 군정을 철폐하고 모든 권력을 조선인에게 돌려보내기를 바라고 있다. 조선 문제는 조선인의 손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고 타국가의 간섭을 절대로 필요시하지 않는다. 타 국가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다시금 종속적인 관계를 갖는 신탁관리제를 만일 미국이 조선에 수립시키려고 한다면 조선민족은 전민족의 생명을 부인당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배격치 않을 수 없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본 항복으로부터 70여 일이 지난 시점에서 자치 능력의 발현 수준은 38선 이남과 이북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점령군의 자세에서 비롯된 차이였다. 소련군의 협조와 지원 위에서 이북에서는 전 지역의 인민위원회 조직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 남한에서 같은 방향의 시도는 미군정의 인공 전면 부정으로 좌절되어 있었다.


건준이 인공 수립을 서두른 데는 문제가 있었다. 미군 진주를 앞두고 전국 조직을 기정사실화하려던 무리한 시도는 미군만이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에게도 불신을 살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전면 부정한 데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적대적 감정이 개재된 사실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망언이 보여준다. 인공과 상극관계인 한민당 주류 세력과 군정 당국과의 지나친 유착관계에서 비롯된 망언이었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한국 독립에 협조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인공의 오류를 바로잡아서라도, 인공의 이름을 바꿔서라도 그를 통해 한국인의 자립 역량이 발현될 길을 열어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인공을 부정하고 어떤 대안을 찾았는가? 미군정이 택한 길은 일본 식민통치자들의 역할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자립 역량을 억누르려는 태도 또한 군정 당국자들이 일본인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하지와 아놀드 등 군정 당국자들이 한국의 통일국가 건설을 가로막으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무식하고 게으른, 군대말로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자세였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미군정의 문제점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괜히 건드렸다가 덧날까봐 참고 있었을 것이다. 아놀드의 망언보다 더 심한 것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미 갈 데까지 간 인공만이 미군정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의 문제점은 반탁 문제가 소란해진 1946년 2월 시점으로부터 돌아보는 커밍스의 시각에 잘 포착되어 있다.


문제점은 하지와 그의 고문들이 공동 신탁통치든 혹은 다른 근거에서든 간에 소련과의 협조 가능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점령 초기부터 남한에서의 친미적 토대를 강화시키려고 일방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남한의 많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되었으며, 최고위층에서 이루어진 미-소의 계획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점령군 사령부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지탄을 받는가에 따라서 명령 불복종, 기만, 혹은 배반으로 규탄을 받게 되어 있었다.

미 국무성 내부에서는 하지와 현지에 있는 그의 동맹자들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다. 빈센트는 1월 28일 미 국무성이 직접 서울과 연결을 취할 수 있도록 주한 미군 사령부를 맥아더 휘하에서 독립시킬 것을 애치슨 장관에게 제안했다. 그는 육군성의 헐 장군과의 대화를 전했는데, 헐은 하지에 대하여 “좋은 사람이지만 정치적 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298-299쪽)


“남한에서의 친미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자립 역량을 억압하는 방침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다변주의(국제주의)에서 일방주의(국가주의)로 옮겨가는 하나의 징조였다. 하지가 반탁 소동 후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노력을 성심껏 지원하게 되는 것은 사태의 실상을 조금 알게 된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하지의 일방주의 성향은 상관인 맥아더의 노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빈센트 국장이 주한 미군을 맥아더와 절연시킬 제안을 한 데서도 맥아더의 일방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엿볼 수 있다. 하지는 전략 차원의 식견 없이 편의적 기준에서 미군정의 노선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남쪽 주민들은 북쪽 주민들만큼 자립 역량을 발현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모스크바 3상회담의 신탁통치 결정에 임하게 된 것이다. 38선의 장벽을 낮추고 한국인의 자발적 의사로 상황을 펼쳐나가게 할 경우 북쪽이 주도권을 쥐게 되리라는 우려를 미군정이 가지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숙제를 안 해놓은 학생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해방 당시의 한국 사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자본주의적 측면을 일체 배제하는 철저한 공산주의 체제를 꼭 필요로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중도적 정치인들은 양쪽 측면을 조화시킬 방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를 고집하는 극우파가 나타나, 타협 아닌 대결의 양상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데 미군정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이용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