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춘추>가 칭송한 반역 행위

기사입력 오후 2:47:46

<춘추>가 칭송한 반역 행위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기 입장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내게 맞서면서까지 자기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후세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 마디였다.

"인간성의 기본 원리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는 너희 스승에게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 (논어 권15 子曰 當仁 不讓於師)

임금의 명령을 명백히 어기고 이적 행위를 저지른 한 장군을 <춘추>의 필자가 왜 칭송했는지 동중서가 질문 받은 일이 있다. <춘추>는 유가 전통에서 확고한 도덕적 권위를 가진 경전이었다. 이런 책에서 어떻게 임금의 권위를 참월한 행위를 칭송할 수 있는가?

문제의 사건은 춘추시대 역사 속에 잘 알려진 것이다. 초나라 왕이 포위하고 있는 지역의 정보를 수집해 오라고 장군 자반을 송나라 도성에 보냈다. 자기 쪽에도 군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 쪽에 얼마나 버틸 힘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반이 송나라에 가 보니 참혹한 상황이었다. 극도의 기아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끼리 자식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충격을 받은 자반은 그들을 구해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왕에게 돌아온 자반은 자기가 적군에게 초나라 군량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보고했다. 왕은 포위를 풀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 왕이 자반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자반이 쓸모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적을 도와준 인물을 역사가가 칭송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질문에 동중서는 대답했다.

"극도의 참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성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예법이 정한 바를 얼마간 제쳐놔도 된다고 동중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인(仁)을 숭상하는 자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어질게 대하려 한다. 어진 사람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른다. 자반이 송나라 사람들을 어질게 대한 것은 자기 마음의 끌림에 따른 것일 뿐이며, 따라서 남들이 자기 행동을 일종의 반역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자반에 대한 옹호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중서는 공자를 인용했다.

"인간성의 기본 원리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는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된다."

공자의 이 한 마디가 어떤 위험을 품고 있는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맥락에서 벗어나 단편적으로 인용될 때, 사람의 마음이 최고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공자의 뜻도 아니고 동중서의 뜻도 아니다.

동중서의 마음에는 체제를 부정하는 뜻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자반처럼 송나라 사람들의 참상을 분명히 알면서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불쌍한 사람들을 더 괴로운 지경으로 몰아넣도록 군대를 움직여서야 되겠는가? 그런 사람은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마음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도덕적 문제에 감정이 개재되는 것을 그가 조심스러워 한 것은 감정이 판단력과 성찰력에 맞서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자 자장에게 이렇게 말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비방과 마음을 찌르는 저주에 곧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가히 밝은 분별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논어 권12 子曰 浸潤之讒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제자들이 감정의 충격 앞에서 지킬 수 있기를 공자가 바란 것이 분별력이었다. 훌륭한 제자라면 스승이 자신과 다른 관점을 내놓을 때 스스로의 명징한 판단에 의거해서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자가 자기 길 가기를 바라야 할 것이었다. 이 모순을 공자는 수긍했다.

- 안핑 친(Annping Chin)의 <공자 평전(The Authentic Confucius)>(돌베개 근간) 중에서.

인간은 사회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어느 사회에나 나름대로의 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는 다른 동물들의 사회보다 훨씬 복잡하다. 문명 때문이다.

개미와 벌처럼 사회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을 보면 그 질서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개체들의 본능 차원에서 대충 운용되는 이 질서를 '자연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질서를 구성하는 가치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가치 선택의 압박 속에 살아간다. 포유류 동물의 경우 곤충류보다는 깊은 갈등을 많이 보이지만, 인간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조밀해지면서 생긴 문제다. 문명 발전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부터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 수 없게 되었다. 다들 본능대로 살다가는 사회가 견뎌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본능을 억제하는 '인위적 질서'가 계속 개발되었고, 그것이 윤리와 도덕, 종교와 제도 등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인간 사회의 질서 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파악이 되는 구조였다. 중국 문명권의 경우 내부의 화하(華夏)와 외부의 오랑캐를 갈라 질서의 옹호자와 도전자를 구분하고, 사회 상층부의 군자와 하층부의 소인을 갈라 질서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세계관이 공자 이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후반, 공자의 시대에는 이런 단순한 세계관으로는 사회의 유지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 500년 전에 만들어진 봉건체제가 힘을 잃고 있었다. 난신적자(亂臣賊子)라 불린 부도덕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은 어찌 보면 하나의 표면적 현상일 뿐이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기존 질서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2500년간 그를 추앙해 온 사람들 중에는 (비판한 사람들 중에도) 그런 단순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질서 옹호는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질서의 발전과 진화를 위한 노력이었고, 위대한 사상가로서 그 면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위에 인용된 내용이 이 면모의 일단을 보여준다.

스승한테도 대들라고 했다!

"군사부 일체" 사상의 상징인 공자의 말씀이다. 물론 아무 때나 멋대로 대들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성의 기본 원리"(仁)가 걸려 있을 때의 얘기다.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된 말이다. 첫째, 이 원리가 워낙 중요한 것이니, 이 원리를 받들기 위해서는 군사부고 뭐고 어떤 다른 질서의 원리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원리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리 성심껏 설명해 줘도 완벽한 설명이 될 수 없으니 이 원리에 대한 더 좋은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내 설명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초나라 자반의 군기 누설은 전투 중의 명령 불복종을 넘어서는 이적 행위였다. 아마 오늘의 어느 문명국이라 해도 이런 행위는 즉결 처분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 왕이 용서했을 뿐 아니라 "엄정한 기록"의 대명사인 <춘추>의 필자들까지 그 행위를 칭송했다.

전쟁 규모가 커지고 양상이 참혹해진 것은 춘추시대 질서 붕괴의 한 중요한 양상이었다. 질서의 뼈대가 튼튼할 때는 전쟁의 목적이 상대방으로부터 특정한 양보를 받아내는 것뿐이었다. 계절존망(繼絶存亡)의 원칙을 어기고 어느 나라라도 통째로 망하게 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죄악이었다. 공자의 시대에는 이 원칙이 무너져 전쟁이 싹쓸이 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공자보다 약 100년 전의 사람 자반은 인민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방식의 전쟁 수행을 거부했다. 인간이 인간을 아껴야 한다는 자연적 질서를 위해 장군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인위적 질서를 버린 것이다. 그의 갈등과 결단은 <춘추>의 필자와 동중서의 이해를 얻었다.

공자는 천하에 질서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질서라면 사람들은 대개 단순하고 명쾌한 상태를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를 깊이 공부한 공자는 인간 세상이 단순명쾌하게 조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는 현상을 명쾌하게 재단하기보다 원리를 뚜렷이 세움으로써 최대한의 질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조건을 만들려고 했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중시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3강5륜(三綱五倫)으로 대표된다. 사회 질서의 핵심 요소를 명쾌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리를 3강5륜의 위에 놓았다. 아니, 그 밑에 깔아놓았다. '인'(仁)이다. 이것을 논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이것을 위하여 임금의 명령을 등진 초나라 장군을 칭송했다. (공자 자신이 자반을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동중서의 발언을 공자의 입장이 연장된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인'을 "인간성의 기본 원리"라고 옮겨 놓았지만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공자 자신도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인'을 논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구애받지 말라고 했다. 공자는 손가락을 내밀었지만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의 모습은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가리키는 그쪽에 뭔가가 있음을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인위적 질서 이전부터 존재하던 인간의 존재 원리. 인간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질서 밑바닥에서 이 원리가 작동할 때, 사람들이 그 원리의 존재를 의식할 때, 모든 사회 질서가 더 잘 운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연적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일체의 인위적 질서를 묵살하기에는 인간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 있다. 공자가 제창한 윤리 체계는 인위적 질서의 상부 구조와 자연적 질서의 하부 구조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상부와 하부, 어느 쪽에 휩쓸리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지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질서 운용의 길이다. 하부 구조를 지켜주는 것이 '어진 마음'(仁)이고 상부 구조를 지켜주는 것이 '분별력'(明)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통용된 사회들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보다 조밀한 인구를 가지고도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질서를 지켜 온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드웨어 차원보다 소프트웨어 차원의 도덕관이 더 응용 범위가 넓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 "용산 사태를 비롯한 근년 공권력의 남용을 보며 이 사회에 어진 마음이 모자라고 인간성의 기본 원리가 무시되는 사실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경찰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검찰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에 대한 조그만 개념이라도 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는지." ⓒ프레시안

서양 문명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에야 '인간성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 개념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법체계의 일부로 편입된 이 개념은 문명의 비인간화 문제의 존재를 겨우 표시만 한 것일 뿐, 현실적 효용성이 미미한 수준이다. 인간성의 원리가 어렴풋하게라도 하나의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던 유교 사회에 비해 서양의 인도주의는 아직도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용산 사태를 비롯한 근년 공권력의 남용을 보며 이 사회에 어진 마음이 모자라고 인간성의 기본 원리가 무시되는 사실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경찰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검찰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에 대한 조그만 개념이라도 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는지. '인'의 전통도 흐려지고 서양의 인도주의도 들어오지 못한 인간성의 사각지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입만 떼면 거짓말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사사로운 이익으로만 몰고 가는 '난신적자'들이 있기는 있다.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난신적자들을 척결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겠지만, 더 큰 과제는 사회 전반의 도덕성 회복이다. 사회의 도덕성이 허약하기 때문에 난신적자들이 판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사회의 도덕성 회복이 "정의 사회 구현" 같은 폭력적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것을 쫓아다니며 바로잡기보다 좋은 것이 잘 자라나고 잘못된 것이 저절로 시드는 풍토를 이루기 위해 소프트웨어 차원의 도덕관이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하던 "사람 사는 세상", 우활한 것 같으면서도 이 사회의 절실한 필요를 짚은 말이다. 



(11년 전의 글 앞으로 올려놓습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현명한 신하와 어리석은 주군

기사입력 오전 10:20:08

현명한 신하와 어리석은 주군

계평자는 마침내 임금 소공을 못 견디게 하는 짓을 저질렀다. 소공의 돌아가신 아버지 양공을 모시는 행사가 있는 날 계평자가 자기 조상들을 위한 비슷한 행사를 벌였다. 그가 임금보다 권세가 더 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萬) 춤을 추러 계손씨 저택에 밀려들었는데, 궁중의 행사에는 단 두 명이 춤을 췄다. 그래서 계평자의 숙부가 꾸민 계평자 타도 계획이 소공에게 전해지자 소공은 그에 끌리는 마음이 들었다.

소공은 계손씨 가문 내의 균열을 이용해 임금의 권위를 다시 세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후씨 가문과 장씨 가문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소공의 측근 신하 자가자는 다른 의견이었다. 계평자 타도 계획에 나서는 사람들이 모두 계평자에게 개인적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크게 믿을 수 없다고 소공에게 주의를 주었다.

"마음이 좁은 그 사람들은 임금께서 운이 좋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부담은 임금 한 분에게 돌아옵니다. 백성을 버린 지 여러 세대가 지난 이제 되돌리고자 하시는데, 일이 꼭 잘 될지 장담할 길이 없습니다."

소공은 자가자의 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친위대를 이끌고 계손씨 저택으로 쳐들어가 대문을 지키던 계평자의 동생을 죽였다. 계평자는 대 위에 올라가 임금에게 자신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올렸다.

처음에는 자신을 처형하기 전에 정식 재판을 열어 달라고, 자신은 기수 강가에서 반성하며 재판 결과를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을 비 성곽에 가둬 달라고 했다.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자 수레 다섯을 붙여 추방해 달라고 했다.

이것마저 소공이 받아들이지 않자 자가자가 다급하게 "받아들이세요!" 하고 이어 말했다.

"그가 정치를 맡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에게 생계를 의지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해가 들어간 뒤에 은밀히 이뤄지는 일들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쌓이게 하면 안됩니다. 쌓이는 분노를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가 진해집니다. 분노가 쌓이고 진해지면 불온한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온한 마음이 일어나면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합치게 됩니다. 임금께서 필히 후회하실 일입니다."

자가자는 현명한 신하로서 주군에게 상황을 잘 고려하도록 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들어간 뒤 은밀히 이뤄지는 일들"을 감안해서 유리한 상황에 있을 때 타협을 꾀하도록 간청한 것이다. 이번에도 소공은 자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동안 숙손씨 사람들이 관망하고 있다가 의논을 시작했다. 결론은 계평자가 아무리 밉더라도 계손씨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숙손씨를 위해 낫다는 것이었다. "계손씨가 없으면 숙손씨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손씨 저택에서 임금의 친위대를 몰아낼 지원 병력을 투입했다. 맹손씨도 여기에 합류했다. 소공은 복수와 복권의 꿈을 품에 안은 채 외톨이가 되었다.

친위대가 격파당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자가자가 마지막 건의를 올렸다.

"여러 신하들이 거짓으로 임금을 겁박해 저지른 일이니 그들에게 죄를 주어 쫓아내십시오. 임금께서는 움직이지 마십시오. (계평자도) 그대로 임금을 모실 것이며, 행동을 감히 고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공은 그 치욕을 차마 견딜 수 없어서 국경을 넘어 제나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노나라 제후는 개인적 이유 때문에 조상들의 영혼과 후손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나라를 버렸다.

자가자는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가서 보호자 노릇을 계속했다. 그가 보호한 것은 소공 한 사람만이 아니라 얼마간이라도 남아 있는 노나라의 주권과 자부심이기도 했다. 제나라 제후가 소공에게 1000개의 마을이 있는 땅을 주겠다고 했을 때 자가자가 이것을 받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은혜를 두 번 내리지 않습니다. 하늘이 임금께 너그러우시다면 주공께 내려주신 것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노나라로 충분합니다. 노나라를 잃고 1000개 마을을 가진 신하 노릇을 한다면 누가 임금을 임금으로 받들겠습니까?"

한편, 소공의 다른 지지자들 가운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를 가리기 위해" 서약을 맺자는 제안이 나왔다. 서약 중에는 "지금 노나라 정치를 맡고 있는 자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들이 자가자에게도 참여를 요구했을 때 자가자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라 여러분과 생각이 다릅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최근 사태에 대해)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임금님이 처해 있는 곤경에서 어서 벗어나시도록 하기 위해 국내에서 정치를 맡고 있는 이들과 얘기를 나눌 필요도 있습니다."

노나라 정부 안에서도 숙손소자가 자가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사로운 은혜에 얽매여 공공의 이익을 외면하는 대신 당당하고 정확한 행동을 했다고 공자가 칭찬한 일이 있는 인물이다. 계평자에게 반성의 기색이 있는 것을 본 소자는 임금을 도로 모셔오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계평자 대신 자기가 제나라에 가서 소공의 귀환 조건을 협의하겠다고 자청했다.

계평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소자가 협의를 끝내고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바꿨다. 그 해 겨울 10월 초4일에 소자는 "침실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조상들에게 죽음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11일에 죽었다."

노나라 제후는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자가자 역시 노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공이 죽은 후 대신들이 소공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고 자가자에게 국정을 함께 맡자고 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취를 감췄고, 노나라 역사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자가자나 숙손소자 같은 신하들은 헛고생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모신 주군은 존경심도 신뢰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얼마간의 자기 개혁을 시도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입받은 상식의 하나가 민주공화제는 문명되고 좋은 제도이며 전제군주제는 미개하고 나쁜 제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알게 되면서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적 상황에 민주공화제가 더 적합한 면이 많다는 기술적 차이 정도지, 근본적인 가치의 차이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어느 제도에서나 주권자가 완벽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군주제의 임금 중에도 폭군에서 성군까지 여러 층이 있었는데, 아무리 성군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어떤 의식을 가지느냐에 따라 훌륭한 정치를 이루는 수준 차이가 있지만, 완벽한 주권 의식이란 것은 개념부터 성립될 것 같지 않다. 

기술적 차이의 가장 큰 것이 "완벽한 정치" 관념의 존재 여부 아닐까 싶다. 군주제에서는 성군에 의한 "태평성대"의 꿈이 있었지만 민주공화제에는 그런 절대적 완벽성의 꿈이 없다. 중세 이전에 비해 대중의 사회참여 수준이 높은 근현대 상황에 민주공화제가 적합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중의 의식이 옛날처럼 쉽게 조작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이 불완전한 책임을 대중 자신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 속에는 "완벽한 정치"의 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그래서 상당히 쉽게 조작될 수 있는 것 같다.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국민소득, 국내총생산, 수출액, 경상수지, 종합주가지수 등 중요한 경제지표에서 훌륭한 실적을 올렸는데도 "경제를 망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을 이 정부 관계자들은 억울해 한다. 완벽성을 바라기 때문에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국민 의식이 이 오해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만족할 줄 모르는 국민 의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압박에도 이용되었다. 과거의 비도덕적 관행을 그만큼 척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독재시대 어느 실력자의 "떡고물"과도 비교가 안 되는 액수, 그나마 해먹으려고 달려든 것이 아니라 관행 척결이 조금 미흡했던 일을 가지고 온 사회를 선동했다. 선동자들의 동기와 행태보다도 그런 선동이 먹혀드는 국민 의식이 더 큰 문제다.

"제왕적 대통령"은 흔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 국민 의식은 겉으로 이것을 배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이것을 바라는 측면이 있다. 지도자에게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맡기고 싶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해소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는데도 제왕적 대통령의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과거의 "제왕"들은 과연 "제왕적"이었을까? 동아시아 전제군주제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한 공자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지도자에게 완벽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가 최고의 성인으로 떠받든 인물은 주공이었다. 주공은 왕이 아니면서 왕의 역할을 수행했고, 거기에 흠이 없었다는 것이 공자의 숭앙을 받은 이유였다. 왕이 너무 어려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 신하 신분인 주공이 섭정을 맡았던 기간이 공자가 보기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였던 것이다.

훌륭한 정치가 무엇인가 누가 물었을 때 공자는 "왕이 왕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왕 혼자 잘해서 좋은 정치 되는 것이 아니고 신하도 잘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깊이 공부한 공자가 왕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했을 리 없다. 요순 같은 성인들이 왕 노릇 잘해서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기존의 전승을 그가 정면으로 내치지는 않았지만, 주공을 더 알뜰히 받듦으로써 그 비중을 떨어뜨린 셈이다. 그는 훌륭한 정치를 위해 왕보다도 신하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공자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휘한 큰 힘은 그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순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분투노력한 주공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상을 부각시키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주공의 시대보다 더 타락한, 그래서 갈등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자기 시대의 현실을 끌어안았다. 그 후 여러 시대의 고매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공자가 자기 현실을 받아들인 자세를 보며 각자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공자의 가르침이 널리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순 같은 성군의 덕만으로 세상이 편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자는 현실로 받아들였다. 주공처럼 신하도 신하 노릇 잘해야 좋은 정치가 된다는 데까지 물러섰지만, 공자 자신의 시대는 주공 시대의 여건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주공의 자세를 본받으려 애쓰는 것이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길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노나라 소공이 망명길에 오른 것이 기원전 517년, 공자가 35세 때 일이었으니 자가자는 공자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제나라의 봉읍을 사양한 것 외에 소공은 자가자의 건의를 모두 묵살했다.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그러나 소공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자가자의 노력이 헛고생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저자가 보는 것은 공자의 관점을 따르려는 것이다.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좋은 노력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다.

공자는 신하의 역할을 중시했는데, 오늘날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정치인을 포함한 사회 지도층이다. 올바른 길을 찾아 임금에게 권하라는 공자의 "신하 노릇" 대신 주권자를 더욱 우매한 길로 몰아넣으면서 사사로운 이익만 취하려는 간신배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옳으니까 무조건 따르라는 게 아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아주 망가지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역할을 더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논어의 이런 귀절도 생각난다.

군자를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하면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쓸 때 사람들의 능력 범위 안에서만 그들을 쓴다. 반면 소인을 모시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기쁘게 하기는 쉽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긋난 일을 하더라도 그는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쓸 때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요구한다. [논어 권13 子曰 君子 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 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우리 국민은 비위를 맞춰주기만 하면 신하들이 어긋난 일을 하더라도 기뻐하고, 신하들의 능력 범위를 생각지 않고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요구하는 소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충신이 모시기 힘들고 간신이 속여먹기 좋은 주권자일 것이다.


(11년 전의 글 생각나서 다시 올려놓습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공자의 좌절감

기사입력 오전 10:09:24 



공자의 좌절감

이 무렵이 되면 공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국로(國老)'라는 이름으로 떠받듦을 받고 있었지만, 나라의 정치나 권력자들의 행동을 좌우할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이름일 뿐이었다. 기원전 481년에 있었던 애공 접견이 이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해 여름에 제나라 대신 진항이 자기네 임금의 계승 문제를 일으킨 바 있었다. 임금 간공(簡公)을 자기가 장악한 지역으로 끌고 갔다가 결국 죽여 버린 것이었다. 진항이 처음 해보는 짓도 아니었다. 몇 해 전 간공의 아버지 도공(悼公)도 같은 식으로 진항의 손에 죽었었다. 이제 진항은 간공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참이었다. <좌전>의 기록은 이렇다.

갑오일에 제나라 진항이 서주에서 제 임금 간공을 죽였다. 공자는 3일간 목욕재계한 다음 (애공을 찾아가) 제나라 정벌을 청했다. 세 번 청하자 임금이 말했다. "노나라는 제나라 때문에 쇠약해진 지 오래인데, 그대 말대로 제나라를 정벌한다면 어떻게 감당을 할 것인가?" 공자가 대답했다. "진항이 임금을 시역했는데, 그를 미워하는 백성이 절반입니다. 노나라의 힘에 제나라의 힘 절반을 더한다면 이길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가 계손씨에게 말하라." 공자가 사례하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좌전 애14 甲午 齊陳恆弒其君壬于舒州 孔丘三日齊 而請伐齊 三 公曰 魯為齊弱久矣 子之伐之 將若之何 對曰 陳恆弒其君 民之不與者半 以魯之眾 加齊之半 可克也 公曰 子告季孫 孔子辭 退而告人曰 吾以從大夫之後也 故不敢不言)

<논어>에 보면 공자는 임금이 시킨 대로 3대 가문을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공자의 생각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제안이 거부된 후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논어 14-21 之三子 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애공의 태도는 회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을 응징하기 위해 정벌에 나서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고 실제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이라는 공자의 설득을 설령 애공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와 무기를 모두 3대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공자에게 한 말은 "그대가 계손씨에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대한 깊은 무력감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임금은 자기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공자로 말하자면 임금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3대 가문을 찾아갔을 것이다. 공자는 정치적 책임감과 예법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세상이 아무리 편의에 따라 돌아간다 하더라도 몇 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을 뵙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할 것.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성심으로 호소할 것. 아무리 결과가 뻔한 일이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도록 간청하는 데 그는 성심을 다했다.

-안핑 친(Annping Chin)의 <공자 평전(The Authentic Confucius)>(돌베개 근간) 중에서.

  공자가 71세 때의 일이다. 공자는 54세 때 조국인 노나라의 관직을 그만두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이 일이 있기 3년 전에 귀국했다. 원로 대신(國老)으로 숭앙받기는 했지만 실권은 없는 입장이었다.

실권은 임금(제후)에게도 없었다. 세습 가문들의 힘이 임금의 권세를 압도하는 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여러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이웃 제나라에서 진항이 임금을 멋대로 죽이고 갈아치운 것은 그중 두드러진 일이었지만, 노나라에서도 재정과 군사를 비롯한 모든 권세를 계손씨를 필두로 하는 3대 가문이(통상 '3환'三桓이라 칭함) 과점하고 있었고 임금을 모욕하는 일이 예사로 있었다. 애공의 할아버지 소공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계손씨를 토벌하러 나섰다가 역습을 당해 나라 밖으로 도망친 이래 노나라 임금은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애공 자신도 이 일이 있은 지 13년 후에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공자는 나라의 주권이 임금의 손에 쥐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임금의 권력은 공변된 것이어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운용되는 것인데, 이것을 신하들이 탈취하고 있으면 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행사되기 쉽다고 본 것이었다.

이웃 제나라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도한 짓이 벌어졌을 때 이를 응징하러 출병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한 데는 제나라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보다 노나라 자체의 질서를 세우는 기회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능멸하는 짓은 누구에게라도 공격받을 죄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힘없는 임금이 자기 건의를 받아들여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힘은 있지만 진항과 동류인 노나라 실력자들이 자기 건의를 받아들여줄 리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해결은 못 해도, 그래도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해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2005년 여름, 대연정 제안으로 궁지에 몰린 노무현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은 좀 접어놓고 가능한 일에만 치중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건의에 보인 반응이었다고 유시민 씨가 전하는 말이다. (<노무현, 한국 정치 이의 있습니다> 4쪽) 이 말에 접하며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공자의 말이 겹쳐져 떠올랐다.

▲ "유시민 씨 권유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에만 치중했다면 재임 중 몇 가지 좋은 업적을 더 내놓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 "말은 해놓아야" 하겠다는 성심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프레시안
 
공자에게 주권자는 임금이었고, 노 대통령에게 주권자는 국민이었다. 군주제와 공화제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의 주체가 공변된 입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이다. 민주적이지 못한 군주제를 왜 받들었냐고 공자를 비판한다면 공자는 당당히 응수할 것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국민이 국민 노릇 제대로 하는 공화정 못지않게 훌륭한 정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문제의 초점은 정치의 공변됨, 즉 공공성에 있다. 국민 또는 백성 대다수의 복리를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지키는 데 목적을 두는 정치의 운용이 노 대통령이나 공자나 함께 바란 것이다. 소수의 무절제한 욕망을 채우는 데 정치가 이용되어 국가 구조가 위험해지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반대했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는 임금이 힘을 잃고 있었다. 주나라 왕인 천자는 하늘에게 책임을 지고 각국의 임금, 즉 제후들은 천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봉건제의 원리였다. 그런데 각국의 권력자들은 임금에게 명목상 책임을 지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임금을 능멸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책임지는 일 없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권력자들이 아무 견제 없이 사익에 몰두하는 사회는 군주제건 공화제건 망하게 되어 있다.

당시 권력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까지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권력 투쟁에 밀린 권력자가 다른 나라로 달아나면 그 나라 권력자가 융숭하게 대접하고 심지어 함께 국제적인 사업을 도모하는 풍조까지 있었다. 요즘의 재산 해외 도피보다 더 효과적인 신분 보장이었다. 그러니 권력을 휘두르는 데 조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동류 의식을 가진 외국의 권력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신경만 쓰면 되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는 망해도 상관없었다.

우리 사회의 주권자, 국민들은 노나라 애공보다 권력을 잘 지키고 있는 걸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검찰과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봐도 그렇고, 주권 행사의 기반 조건을 위협하는 미디어 법의 강행 과정을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관습 헌법"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이 만들지도 않은 헌법을 제멋대로 만들어 휘두르는 헌법재판소의 행태를 볼 때 그렇다.

일부 헌법재판관들에게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잘못한 일이 있었는가?" 물었을 때 너무 지나친 표현 아니냐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이완용은 팔아먹을 것으로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고 그들이 팔아먹을 것으로는 헌법이 있었기 때문에 헌법을 팔아먹은 것뿐이지, 맡겨놓은 것을 뭐든지 팔아먹으려는 배짱은 똑같은 것이라고.

이완용은 나라 없어도 자기와 주변 사람들은 잘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었다. 이 사회에 위험을 가져오더라도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너무 많고, 또 그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길 모르고 이 사회 잘 되기만을 바라는 국민들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데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쌓여 있다.

공자는 자기 시대 권력자들에게 성심을 다해 호소했다. 질서가 무너져도 자기네는 끄떡없으리라는 그들의 믿음이 헛된 환상임을 설득하려 애썼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알리지 않을 수 없다"며 자기 역할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통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접어놓지 않은 그 정성이 공자를 위대한 교육자로 만들었다. 당장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힘을 집중하고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적당히 처신했다면 행정가로서 실적은 더 올렸을지 몰라도 오래 가는 가르침을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다. 유시민 씨 권유대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에만 치중했다면 재임 중 몇 가지 좋은 업적을 더 내놓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 "말은 해놓아야" 하겠다는 성심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분의 업적보다 그분의 가르침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11년 전에 쓴 글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고 지금 시점으로 옮겨놓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