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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이른바 중동(Middle East) 지역에서 자라난 초기문명이 동쪽으로는 육로를 통해 페르시아문명으로, 서쪽으로는 해로를 통해 지중해문명으로 확장해 나갔다. 페르시아문명은 기원전 6세기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아래 통합성을 키운 반면 지중해문명은 기원 전후가 갈릴 무렵에야 하나의 제국으로 묶이게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Iran#/media/File:Achaemenid_Empire_(flat_map).svg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제국의 판도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Empire#/media/File:Roman_Empire_Trajan_117AD.png 117년경 최대한에 이른 로마제국의 판도

 

하나의 문명권이 안정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문명권을 포괄하는 정치조직이 제국의 형태로 나타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Empire 제국>(2000)에서 제국을 하나의 관념으로 제시했다. 한계가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첫째, 공간적 한계 없이 모든 영역이 포괄된다. 둘째, 시간적 한계 없이 항구성을 가진 체제로 인식된다. 셋째, 종족과 계급 등 사회적 한계가 없는 보편적 통치의 주체다. (xiv-xv) 이런 관념이 성립하고 통용되는 것은 하나의 안정된 문명권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국을 세운 한나라에 비해 로마제국의 지중해문명은 아직 안정된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중해 연안이 모두 제국의 판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앙리 피렌느의 표현대로 바다로부터 멀리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문명의 농도는 점차 희박해지는 상황이었다. (<Mohammed and Charlemagne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7)

 

제국에 완전히 통합된 것은 바다에 가까운 좁은 띠에 불과했고 그 바깥에는 제국의 통제가 느슨한 경계지대, 그리고 더 바깥에는 광대한 비문명 배후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기술 수준의 향상에 따라 경계지대와 배후지역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각 지역이 제국의 구심력을 벗어나 자기 지역의 조건에 따른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발원지 이탈리아와 인접한 갈리아 지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를 옹위하기 위해 이 지역에 건설된 군사-행정 조직을 게르만족이 장악하고 거꾸로 로마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4세기 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2의 로마로 세운 것은 제국의 중심부가 문명의 중심지로 옮겨간 것이다. 중국에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494년 발상지인 평성(平城)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길 때 보수 세력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남방을 정벌하러 낙양에 당분간 주둔한다고 했다가 얼마 후에 수도를 옮겨버린 일과 통하는 점이 있다.

 

로마의 태평성대 팍스 로마나는 기원전 27년 제국으로의 전환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까지 약 2백년을 가리킨다. 3세기 중반에 제국의 위기’(Imperial Crisis)가 일어났다. 235년 황제가 암살당한 후 50년간 26명의 장군과 귀족이 황제를 칭했고, 한때는 제국이 세 조각으로 쪼개지기까지 했다.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는 이 혼란을 정리하고 제국을 재건했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길을 열었고 2의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둘 다 동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Empire#/media/File:Invasions_of_the_Roman_Empire_1.png 2-5세기 게르만 이동의 개념도. 제국의 동방 이동은 동방의 경제-문화 중심지를 중점적으로 방어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탈리아반도가 게르만족에게 유린당한 후 로마제국의 역사는 동쪽에서 이어졌다. 이것을 비잔틴제국이라고 이름 붙여 로마제국과 구분하려 드는 것은 유럽중심주의의 또 하나 편향성이다. 로마제국의 유산 중 작은 한 부분만을 물려받은 유럽의 입장에서 유산 대부분을 가져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드는 것이다. ‘동로마제국()’을 굳이 붙이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그것까지는 관행을 따르려 한다.

 

동로마제국의 관점에서 이탈리아반도는 제국의 발상지로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확장된 지중해제국에 대한 실제적 가치는 여러 변방중 하나일 뿐이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제국의 체제 변화에 대한 수구세력의 저항이 약화되기도 했을 것이다. 동로마제국이 라틴문화에서 그리스문화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그리스문화만이 아니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등 여러 갈래 동방문화가 모두 동로마제국 안에 융화되면서 지중해문명의 숙성에 공헌했다.

 

 

2.

 

황제제국의 중심 기관이다. 황제위의 성격을 통해 로마제국의 성격을 살펴본다.

 

로마는 기원전 27년에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바꿨지만, 공화정의 성격이 많이 계속되었다. 황제가 세습으로 계승되지 않은 때가 많고, (수십 년간 한 가문의 여러 황제가 세습되는 경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등의 이름이 붙는다.) 계승에는 원로원의 승인이 공식적으로 필요했고 군사지도자들의 지지가 비공식적으로 필요했다.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했다는 것은 중심부 토착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11세기에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온 후 자리 잡은 왕위의 장자상속 제도가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없앰으로써 국가제도의 큰 발전을 이룩한 것과 대비된다.

 

“4황제의 해라는 별명이 붙은 해도 있었다. 68년에 네로(재위 54-68)가 죽은 후 1년 사이에 네 명의 황제가 내전을 통해 꼬리를 물고 즉위한 것이다. 팍스 로마나의 한복판에서도 황제위의 불안정성이 제국의 약점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3세기 중반 제국의 위기를 계기로 황제위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난다. 공화정의 정신이 남아있던 원수(元首)체제(Principate)에서 군주제의 성격이 분명한 군림체제(Dominate)로 바뀐 것이다. 위기를 끝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가 종래 황제들과 달리 한미한 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제도의 강화를 통해 전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293년 도입한 4황제 체제(Tetrarchy)를 제국 분할의 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자신 외에 또 하나의 황제(Augustus)를 옹립해서 동방과 서방에 각각 군림하고 황태자 격인 부제(Caesar)를 하나씩 붙이는 것이었다. 각지의 군사력이 거대해진 상황에서 대다수 군사지도자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4황제의 힘을 합치고 제위 계승도 부제에게 넘김으로써 순조롭게 하기 위한 제도였다. 동방 출신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질 위치에 가까운 니코메디아에 조정을 두었다.

 

4황제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재위 중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가 건강 악화로 퇴위한 뒤에는 황위 쟁탈전의 발판이 되었다. 부제 한 사람의 아들이던 콘스탄티누스는 306년 갈리아-브리타니아 군벌의 지지로 제위쟁탈전에 뛰어든 후 312년에 로마를 평정하고 324년까지 동방의 경쟁자들을 격파해서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the_Great#/media/File:Istanbul_-_Museo_archeol._-_Diocleziano_(284-305_d.C.)_-_Foto_G._Dall'Orto_28-5-2006.jpg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the_Great#/media/File:Rome-Capitole-StatueConstantin.jpg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두상

 

콘스탄티누스는 무엇보다 로마의 기독교화에 앞장선 황제로 이름을 남겼다. 전통적 귀족세력의 연합체로서 초기의 제국 성격을 벗어나 지중해문명권의 보편적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보편성을 가진 일신교를 제국의 이념적 장치로 채용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천상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투영되는 지상의 제국이 되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의 관념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길이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전까지 교회는 황제의 후원을 받는 입장이었다. 로마 교황도 애초에는 여러 총대주교(Patriarch)의 하나였으며, 중요한 성직의 서임권도 황제에게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마제국의 소멸에 따라 로마 총대주교가 특별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서로마제국 쇠퇴기에 게르만 제 세력의 지도자들은 서로마황제로부터 총독, 장군 등 직함을 받아 자기 세력권에 군림했다. 그러다 그중 욕심이 너무 많은 자들이 서로마제국 자체를 무너뜨린 것은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아먹어 버린 격이었다. 황제가 없어진 이제 그들은 권위를 부여할 주체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에 따라 로마교회가 세속권력과 뒤얽히면서 종래의 총대주교와 다른 교황의 특별한 위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3.

 

서로마제국 멸망 후 로마교회는 동로마황제와 사이에 황제-교회 관계를 그대로 지켜나갔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지속을 위해서는 현지 게르만 세력과의 관계도 별도로 꾸려나갈 필요가 있었다. 황제도 그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서 성직 서임권 등 로마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유보했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독립성이 갈수록 늘어났다.

 

동로마황제와 로마교회 사이의 관계가 8세기 들어 소원해진 직접 원인은 동로마제국의 성상부정(聖像否定, iconoclasm) 정책에 있었지만 배경 원인은 7세기 중엽에 시작된 이슬람 팽창으로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된 데 있었다. 이베리아 방면 이슬람세력의 압박을 막는 데 동로마제국보다 프랑크왕국의 역할이 더 크게 된 것이다. 결국 800년 레오 3세 교황이 샤를마뉴를 로마황제로(“신성로마황제란 호칭은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https://en.wikipedia.org/wiki/Irene_of_Athens#/media/File:Karl_den_store_krons_av_leo_III.jpg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추대한 직접 계기는 797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여제(女帝) 이레네의 즉위였다. 이레네(Irene of Athens, 752-803)는 레오 4세 황제의 황후였다가 780년 레오 4세가 죽은 후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이 되었고 792년에는 아들과 공동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797년 아들을 쫓아내고 단독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802년 축출되었다. 권력을 누린 경위는 중국의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슷하지만 정치의 실적은 관료제를 크게 발전시킨 측천무후와 차이가 큰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Irene_of_Athens#/media/File:Constantine_VI_and_Irene_780_790_gold_4410mg.jpg 모자(母子) 공동황제 시기의 비잔틴 금화

https://en.wikipedia.org/wiki/Irene_of_Athens#/media/File:Gold_solidus,_Byzantine,_Irene,_797-802.jpg 이레네 단독황제 시기의 비잔틴 금화

 

로마교황은 이레네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샤를마뉴를 로마황제로 추대했는데, 이레네가 축출된 뒤에도 샤를마뉴의 후계자들을 계속 황제로 추대한 것을 보면 동로마제국의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된 결과로 이해된다. 9세기 말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한 후 서방 로마황제의 존재가 희미해졌다가 962년 독일 군주 오토 1세가 추대된 것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범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샤를마뉴를 출발점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원래 제국과 교회의 관계는 제국이 주()고 교회가 객()이었다. 현실권력을 가진 황제가 제국체제의 한 부분으로 교회의 권위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로마황제의 경우 권위가 확립되어 있는 교회가 확고한 현실권력을 갖지 않은 군주를 추대한 것이었으니 주객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이에 따라 로마교황은 정신적 권위만이 아니라 세속적 권력까지 겸비하게 되었고, 황제와 교황이 같은 평면 위에서 부딪치면서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는 일, 황제가 교황을 쫓아내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게 되었다.

 

11세기 말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는 데도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피터 프랑코팬은 이 배경을 설명한 <The First Crusade 1차 십자군>(2012)의 제1(13-25)위기에 빠진 유럽이란 제목을 붙였다. 위기를 대표하는 것이 신성로마황제의 핍박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있던 교황의 위기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재위 1073-85)에게 파문을 당한 신성로마황위계승자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의 성문 앞에서 눈보라 속에 사흘 밤낮을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빌었다는 카노사의 굴욕(Walk to Canossa, 1077)'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보여준다고 하는 이 일화의 해석에 이견을 가진 연구자들이 있다. 교황이 사면을 베풀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함으로써 하인리히가 우위를 찾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Road_to_Canossa#/media/File:Henry_IV_the_Holy_Roman_Emperor_waiting_for_3_days_in_Canossa.jpg 종교개혁기(1583)에 그려진 카노사의 굴욕에는 황제에 대한 동정심과 교황에 대한 반감이 묻어있다.

 

실제로 몇 해 지나지 않아 역전된 형세가 드러났다. 하인리히는 1080년에 다시 파문을 당했으나 그 사이에 다져놓은 권력기반 위에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자기 영향권의 성직자들을 모아 브릭센공의회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퇴위와 클레멘스 3세의 선출을 이끌었다. (클레멘스 3세는 가톨릭교회사에서 ()교황(anti-pope)’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지지하는 제후들을 격파한 다음 로마로 진군해서 1084년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축출하고 클레멘스 3세의 집전으로 신성로마황제에 즉위했다. 교황은 이듬해 남부의 노르만 군주 로베르 기스카르를 불러들여 로마를 탈환시켰지만 노르만 군대의 난폭한 파괴 때문에 로마에 자리 잡지 못하고 남쪽의 노르만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Guiscard#/media/File:Robert_Guiscard_(by_Merry-Joseph_Blondel).jpg 로베르 기스카르. 유럽의 북쪽 변방에서 일어난 노르만인은 11세기 유럽의 모습을 바꾸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맡았다.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하인리히 황제 사이에 주교와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의 서임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서임권투쟁(Investiture Conflict)은 보름스협약(Concordat of Worms, 1222)까지 계속된다. 황제권과 교황권의 교착 상태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다음다음 교황 우르바누스 2(재위 1088-99)가 즉위할 때는 클레멘스 3세가 로마에 버티고 있을 때였다. 교황권의 정통성을 놓고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 도착한 동로마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은 우르바누스 교황이 신성로마황제의 영향권 밖에서 기독교세계의 지도력을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프랑코팬이 설명하는 십자군운동의 직접 배경이었다.

 

 

4.

 

로마제국의 본질을 유럽의 제국아닌 지중해의 제국으로 본다면 그 본체를 이어받은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동로마제국이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 변화만 살펴봐도 분명한 일이다.

 

피렌느는 <Medievel Cities 중세의 도시>에서 로마가 통치력에 근거를 두었을 뿐, 산업과 교역의 기능이 빈약한 도시였다고 지적했다. (84-85) 통치력의 약화와 소멸에 따라 인구가 급감하고 회복되지 못했다. 3세기 말까지 로마는 인구 1백만 명을 넘는 대도시였다. 게르만족의 위협에 따라 줄어들기 시작해 450년경 50만 명 수준에 이르렀다가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후에는 10만 명 안쪽으로 떨어졌다. 반면 4세기 초 10만 명 수준이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인 6세기 전반에 50만 명까지 늘어났다. 11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황을 피렌느는 <중세의 도시> 53-54쪽에 이렇게 그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1세기까지도 하나의 대도시에 그치지 않고 지중해 연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도시였다. 1백만 명에 육박하는 주민들은 대단한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공화정 시대나 제정 시대의 로마처럼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주민들은 교역만이 아니라 산업에도 열정을 쏟았고, 제국의 재정정책은 그 열정을 통제는 했지만 봉쇄는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중요한 항구였고 1급 생산기지였다. 온갖 생활방식과 온갖 사회적 활동이 이 도시에서 펼쳐졌다. 도시문명에 따르는 복잡성과 문제들,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갖춘 근대적 대도시의 면모를 보여준 도시는 기독교세계에서 이 하나뿐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ople#/media/File:Bizansist_touchup.jpg 콘스탄티노폴리스 조감도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ople#/media/File:Bozdo%C4%A3an_Kemeri_-_panoramio.jpg 4세기 말에 만들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관의 유적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ople#/media/File:Turkey-3019_-_Hagia_Sophia_(2216460729).jpg 537년에 세워진 아야소피아(Hagia Sophia) 성당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이탈리아반도는 동로마제국에게 변방의 하나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 중요한 변방으로 시리아와 이집트가 있었다. 로마교회도 시리아의 안티오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레반트의 예루살렘,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5개 총대주교좌(patriarchy)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프랑크왕국이라는 현지세력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동로마황제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다가 결국 800년의 관계 단절에 이르렀다.

 

피렌느가 위 글에서 “11세기까지도라고 한 것은 동로마제국의 쇠퇴기였기 때문이다. 7-8세기 이슬람 팽창으로 동로마의 지중해 제국에게해 제국으로 움츠러들었다. 동방의 3개 총대주교좌를 이슬람세력에게 빼앗기고 제국의 판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런 대로 이슬람의 진격 기세가 잦아들고 안정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동로마제국의 번영은 다소 위축된 수준에서라도 계속되었다.

 

11세기 들어 동로마제국의 상황이 급속히 악화된 큰 원인은 이슬람세계의 혼란에 있었다. 로마제국과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이 수백 년간 안정된 대치상태를 유지한 것처럼 이질적인 두 세력 사이에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가능하다. 8세기 중엽에 사산 왕조를 정복한 이슬람제국과 동로마제국 사이에도 그런 평형상태가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아바스 칼리프조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군웅할거의 양상이 전개되고 동로마제국과의 관계도 종래의 안정된 틀이 깨어지게 되었다.

 

아바스조의 통제력을 결정적으로 무너트린 것은 페르시아인의 부예(Buyid) 왕조였다. 945년 바그다드 점령 후 칼리프의 실권을 빼앗은 부예 왕조는 1062년 멸망에 이를 때까지 페르시아제국의 부활에 집착하며 이슬람세계를 방기했다. 한편 이베리아 방면의 옴미아드조와 이집트 방면의 파티마조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형해화된 아바스조와 함께 세 개의 칼리프조가 병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 개 칼리프조 사이에 긴장은 있어도 정면충돌은 없었다. 각자의 영역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각 칼리프조 안에서 권력구조의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곳이 아바스조였다. 부예 왕조가 장악하고 있던 실권을 변방의 군벌들이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고 군벌의 주축은 투르크인이었다.

 

투르크인은 6세기 중엽부터 2백년간 중국 외곽의 초원지대에서 제국을 경영하며 활발한 군사활동과 교역활동의 경험을 쌓았다. 8세기 중엽 제2제국 멸망 후 위구르제국에 밀려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이슬람세계에 대거 진입했다. 이들의 진입에 따라 중-근동의 이슬람세계는 종교와 사상의 지도층을 맡은 아랍인, 기술과 학술과 문화의 주축이 된 페르시아인, 군사와 행정에서 주도권을 넘겨받는 투르크인, 세 개 인구집단을 축으로 삼게 되었다.

 

 

5.

 

투르크인의 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지금의 터키에 투르크인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1세기의 일이었다. 카스피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이슬람세계 외곽에 진출해 있던 투르크인의 이슬람화는 10세기부터 활발해졌다. 그 전까지는 이슬람세력(주로 페르시아계)의 확장에 따라 개인이나 작은 세력이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는데, 이제 투르크인 세력들이 자기 지역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10세기 말부터 페르시아 동부 일대를 통치한 가즈나왕조(Ghaznavids)는 지배집단이 투르크인이었지만 페르시아 왕조의 하나로 인식된다. 페르시아 통치체제에 침투한 투르크인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체제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1세기 중반에 일어난 셀주크제국(Seljuk Empire)은 이와 달랐다. 초원제국의 확장 원리를 이슬람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중-근동 지역을 휩쓴 것이다. (516국 시대 중국의 오랑캐 왕조도 처음에는 중국 내에 편입되어 있던 이민족들의 침투왕조였다가 후에 외부에서 들어온 정복왕조가 우세해졌다.)

 

https://en.wikipedia.org/wiki/Ghaznavids#/media/File:Ghaznavid_Empire_975_-_1187_(AD).PNG 1030년 가즈나왕조의 판도

https://en.wikipedia.org/wiki/Seljuk_Empire#/media/File:Seljuk_Empire_locator_map.svg 1092년 셀주크제국의 판도

 

1030년대에 세력을 일으킨 셀주크계의 약진은 눈부셨다. 1040년 가즈나왕조 영토의 절반을 빼앗은 데 이어 1048년 그루지야 지역에서 동로마제국의 5만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1055년에는 바그다드에 입성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부예 왕조를 몰아내고 칼리프에게 술탄으로 임명받았다.

 

셀주크 세력은 1054년부터 동로마제국의 아나톨리아에 침입하기 시작했고, 1063년 술탄에 즉위한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29-1073)1068년에 대대적 침공을 시작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황제 로마노스 4세를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 후에는 큰 저항 없이 아나톨리아를 석권했다. 아르슬란은 로마노스 황제를 풀어주었는데, 석방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술탄: “내가 당신 앞에 포로로 잡혀왔다면 어떻게 처분하실 거요?”

 

황제: “아마 죽이겠지요. 아니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에 조리를 돌리거나.”

 

술탄: “나는 더 가혹한 처분을 내릴 거요. 당신을 석방해서 돌려보낼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Alp_Arslan#/media/File:BnF_Fr232_fol323_Alp_Arslan_Romanus.jpg 아르슬란의 로마노스 심문 장면을 그린 15세기의 그림

 

이 승리로 아르슬란은 이슬람세계의 전설적 존재가 되었다. 그가 2년 후 죽고 나서 그의 일족 하나가 술탄을 자칭하며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한 것을 룸(Rum, 로마) 왕조라 부른다. 1090년대에 시작된 십자군과 제일 먼저 정면으로 맞선 것은 이 룸 왕조였다.

 

이슬람세계는 무력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시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암살자란 말을 후세에 남긴 밀교(密敎) 조직 아사신(Assassin)이다. 파티마 칼리프조와 같은 시아파(Shi'ite)에서 갈라져 나온 이 교파는 1090년에 페르시아 동부의 한 난공불락의 성채를 점거하고 비밀조직을 통한 첩보전과 함께 요인 암살을 통한 심리전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1275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이 성채를 파괴할 때까지 2백년 가까운 기간 동안 세 명의 칼리프와 수많은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이 조직에 목숨을 잃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Alamut_Castle#/media/File:Alamut_Castle.jpg

https://en.wikipedia.org/wiki/Alamut_Castle#/media/File:Qazvin_-_Alamout_Castle.jpg 아사신의 본거지 알라무트 성채의 유적

 

암살이라 하지만, 몰래 죽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의 금요예배처럼 보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행하는 공개처형이었다. 암살자들이 습격 후 도망칠 길이 없는 그런 자리였다.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암살자들이기 때문에 더 큰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밀이 워낙 철저해서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던 피살자의 최측근이 종종 암살자로 드러나곤 했다.

 

1187년에 예루살렘을 십자군으로부터 탈환해서 이슬람의 영웅이 된 살라딘(Al-Nasir Salah al-Din, 1137-1193)도 아사신의 위협에 시달린 사람의 하나였다. 토머스 애스브리지는 <The Crusades 십자군>(2010)에서 1175-1176년 사이에 살라딘이 몇 차례 아사신의 공격을 받은 후 아사신과 어떤 협정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제시했다. (295-296) 아사신 지도자가 보낸 사절이 살라딘과의 밀담(密談)을 요구했을 때 소지품을 철저히 검사한 다음 살라딘이 가장 신임하는 호위병 두 명만 남겨두고 접견한 장면을 그린 이런 이야기가 전승된다고 한다.

 

사절이 두 호위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우리들 주인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술탄을 죽이라고 명한다면 너희들은 따르겠는가?’ 호위병들이 칼을 뽑고 말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어안이 벙벙해진 살라딘 앞에서 사절은 두 호위병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후로 살라딘은 (아사신을) 적대하지 않으려 하게 되었다.”

 

 

6.

 

십자군이라면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 사이의 충돌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 인식 속에서 (로마교회로 대표되는) 유럽과 동로마제국은 같은 편이다. 그런데 십자군운동의 진행 중에 이들 양자 간의 충돌이 적지 않았다. 그 충돌을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현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애스브리지의 <십자군>은 기존 연구만이 아니라 이슬람 쪽 자료까지 널리 활용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성지(聖地)전쟁의 권위 있는 역사라는 부제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 2년 후에 나온 프랑코팬의 <1차 십자군>은 여기에 동로마제국 자료를 보탬으로써 시야를 더 넓혀준다.

 

프랑코팬의 책을 읽으며 십자군운동을 양자 간의 대결보다 3자 간의 각축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럽과 동로마제국은 같은 기독교권이었고 동맹 내지 협력관계로 맺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협력관계가 표면상 유지될 때도 양자 간의 엇갈리는 이해관계로 인한 긴장은 십자군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과 그에 이은 제국 탈취는 이 긴장이 폭발한 결과였다.

 

동로마제국은 7세기 중엽 이후 이슬람 팽창에 부딪쳐 크게 위축되었다. 7세기 말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두 차례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674-678, 687-688) 9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마케도니아 왕조라 불리는 일련의 황제들 아래 상당 수준의 안정과 번영을 되찾았으나 11세기 들어 다시 어려운 사정에 빠지기 시작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_Empire_under_the_Macedonian_dynasty#/media/File:Map_Byzantine_Empire_1025-en.svg 1025년경 동로마제국의 판도

 

11세기 동로마제국의 곤경은 주변부와의 기술 격차 축소에 근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기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준이 낮은 쪽으로 전파되기 마련이다. 뛰어난 기술 수준을 가진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이 일어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주변부와 격차가 줄어들면서 주변부의 힘이 커지는 데 따라 그 압력에 무너지게 된다. 11세기 동로마제국이 서방의 노르만(Norman)인과 북방의 페체네그(Pecheneg)인에게 계속 시달리게 되는 것이 그 까닭인데, 그 위에 동방에 투르크인이 나타나면서 압력이 급증했다.

 

이 위기에 동로마제국은 경제력으로 버텼다. 중국의 송()나라가 거란과 여진에게 막대한 세폐(歲幣)를 보낸 것처럼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취하기도 하고 용병을 대거 끌어들이기도 했다. 주민을 한시적으로 징집하던 군대가 용병의 비중이 큰 직업군인으로 대치되면서 군벌이 자라났고, 강력한 군벌이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알렉시오스 1(재위 1081-1118)는 동로마제국의 곤경을 해소하지는 못했어도 버텨내는 데는 훌륭한 성과를 거둔 황제라 할 수 있다. 프랑코팬은 알렉시오스가 권력구조 유지와 외부의 위협 대처를 위해 재물을 물 쓰듯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성지 순례를 위해 지나가는 서방 기독교세계의 실력자들을 용병으로 포섭하기 위해 공들이는 모습도 있다.

 

알렉시오스 황제가 1095년 우르바누스 2세 교황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용병 획득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요청이 예상 밖의 큰 반향을 일으켜 십자군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큰 반향이 일어난 직접 원인은 우르바누스 교황의 열성에 있었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따돌림 받고 있던 교황은 성지 탈환의 깃발 아래 영주들의 지지를 모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ope_Urban_II#/media/File:B_Urban_II2.jpg 1095년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제창하는 우르바누스 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 기독교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있었다. 아직도 유럽사회는 낮은 문명단계에 있었다. 이탈리아반도 외에는 인구 5만 명을 넘는 도시가 없었다. 군대는 영주 일족의 기사들이 농민들을 이끌고 나서는 것일 뿐 상비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호위병에 불과했다. 그런데 11세기 말에 이르러 수만 명의 병력이 몇 해씩 걸리는 장기 원정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나 큰 반향에 누구보다 알렉시오스 황제가 당황했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병력이 찾아오면 어르고 달래가며 용병으로 활용해서 되찾는 영토는 제국으로 편입시키고 재물이나 조금씩 쥐어주어 돌려보낼 텐데, 제국의 군사력에 대항할 만한 대규모 병력이 밀려들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셈이다. 그래도 노련한 황제는 서방 군대와 직접 충돌하지 않고 동쪽으로 보냈는데, 시리아와 레반트를 점령한 서방 군대는 그곳을 황제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동방에 눌러앉아 예루살렘왕국을 비롯한 자기네 영지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 후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을 탈취하기에 이른 것은 알렉시오스 황제의 후손들이 그만큼 노련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서방 기독교세계의 실력이 그 사이에 급성장한 결과였다. 십자군이 근 2백년간 이슬람세력과 레반트 지역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동로마제국은 쇠락을 계속했다. 11세기에는 동로마제국의 서쪽 변방에 불과하던 로마교회 지역 세력이 동로마제국의 명운을 쥐어흔들 힘을 키운 것이다.

 

십자군운동은 로마교회 지역, 즉 유럽의 경제적-문화적 실력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너선 라이언스는 <The House of Wisdom-How the Arabs Transformed Western Civilization 지혜의 집-아랍인이 바꿔놓은 서양문명>(2009)에서 이렇게 말한다. (27)

 

스페인에서 기독교세력의 꾸준한 승리, 그리고 기독교 군사력의 지중해 재진출, 특히 노르만의 시칠리아 점령을 통해 기독교세계는 이슬람세계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직접 경쟁하는 위치로 이미 나아가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은 동서 간에 제3의 길을 열었고, 이 길을 통해 애초의 무작정 대결 대신 맞수면서도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의 상업적-문화적-지성적 그물망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바스의 애덜라드가 1114년 안티오크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슬람 군사력보다도 아랍 문화력이 이른바 동방 라틴세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1.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역사의 교육만이 아니라 연구 자체가 유럽사에 편중되어 온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이유는 빤하다. 첫째, 유럽인이 근대문명의 전개를 주도하면서 유럽사의 흐름이 인류 역사의 본류라는 생각이 서양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머리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둘째, 근대역사학이 서양에서 발전하면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연구의 압도적인 분량이 서양인 연구자들에게서 나왔다.

 

두 가지 이유 모두 근년에 와서 완화되어 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떠오르면서 유럽사 중심의 진보사관 분위기가 억제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아닌 지역의 학술활동 발전에 따라 연구자의 분포가 보다 고르게 된 결과다. 두 가지 조건의 변화가 가시화된 1970년대부터 역사학계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노력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방향의 연구 성과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 좋은 실마리는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실마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실마리들을 타고 들어가 세계사의 실체를 새로운 구조로 보여주는 단계는 아직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작업은 중국사 보는 시각을 넓히는 데 목적을 두고 시작한 것인데, 그 목적을 위해 어느 범위의 세계사를 새로 살펴보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계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기 힘든 데는 연구방법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틀에 묶여 있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을 보느냐에 앞서 어떻게 보느냐하는 데서부터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유럽의 경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가치관을 모든 역사의 원리에 적용시키려는 몰시대적(anachronistic) 태도가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다. “역사의 종말같은 해괴한 주장이 나오는 토양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중심주의가 세상을 휩쓰는 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은 유럽의 성공과 다른 지역의 실패를 합리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50년 전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까지 동양적 전제주의, 정체성론 등이 힘을 쓰고 있었다. 조지프 니덤과 그 동료들이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명나라 때까지 중국의 과학기술이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신기한 이야기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중국사와 관련해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많이 불식되어 왔다. 유럽문명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문명의 실적을 밝혀낸 니덤 등 선구적 연구자들의 공로가 큰 몫을 했거니와, 일본과 중국의 국력 성장이 배경조건으로 작용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강대국의 위상이 분명해진 두 나라가 포함된 동아시아의 역사를 더 이상 서양 중심의 역사에 억지로 종속시키는 것이 어색하게 되었고, 두 나라 학계도 성장해서 자국 역사의 자랑스러운 면을 부각시키는 노력이 늘어났다.

 

동아시아 역사의 복권(復權)에 비해 이슬람권의 역사는 백 년 전의 수렁에서 아직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중국문명과 쌍벽을 이루던 이슬람문명의 전통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집단에 전승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통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맡은 역할은 아직까지 많이 밝혀지지도, 알려지지도 못하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Islam#/media/File:Islam_percent_population_in_each_nation_World_Map_Muslim_data_by_Pew_Research.svg 국가별 무슬림 인구비율.

 

한 가지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근-현대 역사 연구가 국가사 중심으로 발전해 온 상황에서 이슬람권의 역사를 자기 역사로 내세울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수백 년간 이슬람권을 대표하던 터키제국이 분해되고 그 중심에 있던 터키가 유럽화의 길로 나아간 후 이슬람문명을 확실하게 대표하는 나라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제 뒤따라 떠오르는 생각은 유럽의 흥기 과정에 이슬람이 긴밀하게 얽히면서 타자(他者)’ 노릇을 맡아온 사정이다. 유럽이 정의롭고 유능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이슬람의 불의와 무능을 강변할 필요가 대목마다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은 유럽중심주의의 가장 큰 직접 피해자였고, 이슬람과 유럽의 관계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세계사의 새로운 정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역사를 바라보는 폭을 넓히려고 나름 애써 왔지만 이제 돌아보니 이슬람 역사에 관한 책 읽은 것은 한쪽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그나마 대개 과학기술사에 한정된 것이고 일반 역사에 가까운 것은 버나드 루이스의 <The Jews of Islam 이슬람세계의 유대인>이 기억날 뿐이다.

 

몽골제국 이전 서방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권의 역사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뿐 아니라 몽골제국 이후 세계사의 전개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유럽의 행로를 파악하는 데도 이슬람문명과의 관계가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서둘러 입수한 중에 타밈 안사리의 <Destiny Disrupted 무너진 섭리>(2009, 류한원 옮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2011)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안사리는 역사학자가 아닌 작가다. 196416세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후 이슬람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30대 들어 새로 관심을 키우게 되었지만 지적인 관심일 뿐, 신앙심을 키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국의 기나긴 내전과 혼란이 탈레반 사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역사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19-11 사태 이튿날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한 장의 메일이 그의 명성을 키워줬다고 한다.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자는 주장을 반박한 이 메일이 며칠 사이에 수백만 명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리뷰에 그 메일의 앞머리가 인용된 것이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놓자는 주장은 필요도 없는 일을 하자는 쓸 데 없는 주장 같다. 23년간의 전쟁을 통해 이미 이뤄져 있는 일 아닌가. 뉴욕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아프간 사람들이 아니다. 폐허에 기어드는 쥐떼처럼 쑥대밭이 된 아프가니스탄에 꼬여든 국적 없는 망나니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fghan_Civil_War_(1992%E2%80%931996)#/media/File:Kabul_during_civial_war_of_fundamentalists_1993-2.jpg 1992년 내전 중 카불 시내

 

https://en.wikipedia.org/wiki/September_11_attacks#/media/File:September_17_2001.jpg 20019-11 뉴욕 테러 현장 

 

이슬람 역사에 대한 안사리의 설명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가 중간적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슬람 신자이면서도 지적 활동에서는 교리에 구속받지 않는다. 소년기까지 매우 모범적인 이슬람사회 안에서 자라난 후 청년기부터 미국사회에서 활동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자세일 것이다. 둘째, 역사를 탐구하지만 역사학계에 제도적으로 묶인 입장이 아니라는 점. 역사학계는 유럽중심주의에, 또는 그에 대한 반작용에 휩쓸리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지만 사료를 걸러내 결론을 도출하는 연구자들, 그리고 학술연구의 업적을 걸러내 큰 결론을 빚어내는 학자들의 업적을 활용한다. ... 연구자들이 이런(이슬람에 전승되는) 이야기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고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이슬람 자료보다 이슬람 외부의 자료에 더 의지하는 것은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밝히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내 목적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무슬림들이 생각하는지밝히는 데 있다. 그 생각이 역사를 통해 무슬림들을 움직여 온 실체이고, 그 생각을 밝혀야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xxi)

 

 

3.

 

안사리는 <무너진 섭리>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의 역사란 부제를 붙인 것처럼 이슬람 관점을 표방하면서도 외부인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더러 이슬람의 입장을 다소 앞세울 때라도 응원하는 팀의 멋진 플레이에 기뻐하는 관중처럼 어느 정도 절제를 보여준다.

 

이슬람권에 중앙세계(Middle World)”란 이름을 붙인 것이 그런 예의 하나다. 한 마디로, 기독교세계에 유럽이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는 것처럼 이슬람세계에도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중국에서 유럽까지 펼쳐져 있는 여러 문명권 중 이슬람권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를 내놓는 것은 몰시대적이라는 점에서 억지스럽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중국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촉이 꽤 있던 문명권들(인도양과 지중해에 접한) 사이에서는 중앙이란 표현이 썩 합당하다. 이슬람의 발상지인 아라비아반도는 고대문명의 두 중심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이에 있는 곳이고 또 하나의 중심지 인도와도 교섭이 많던 곳이다. 무엇보다, 고대-중세 문명 전개의 큰 무대였던 인도양과 지중해의 중간에 있는 곳이었다. ‘중앙으로서의 이 조건이 이슬람문명의 성격에도 투영되었을 개연성은 염두에 둠직하다.

 

중앙과 변방의 차이가 종교적 분위기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얼른 든다. 유럽의 기독교가 타 종교에 대해서만 아니라 기독교 내 교파들 사이에도 극심한 불관용의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초기의 이슬람은 포용적이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개종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했다.(피렌느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51) 이교도에게만 주민세(jizya)를 거두기도 했지만 무슬림에게만 부과되는 여러 의무와 비교할 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도 아니었다.

 

관용에 관해 자오팅양의 <천하체계>(노승현 옮김, 2010) 한 대목이 생각난다.

 

관용은 서양의 논조이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어떤 일에 매우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떤 신념에서 출발하여 그런 일을 참고 용서하려고 결심할 때가 비로소 이른바 관용이거나, 자크 데리다의 논조에 근거하여 관용할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에는 결코 관용의 이러한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관용은 중국의 사유 방식도 아니고 중국의 방법론도 아니다. 중국에 관용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관용의 사유는 없다. 중국의 사유 방식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大度]이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寬容]이 아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지만 참는 것이다. (...) 중국의 기본 정신은 변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타자를 변화시키고 타자를 나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양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다양화는 오히려 통일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양성은 반드시 어떤 전체적인 틀이 규제하는 가운데에서의 다양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규제를 잃어버린 다양성은 단지 혼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5)

 

관용의 마음이라 함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관용의 사유는 다름을 싫어하면서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오팅양이 서양과 대비시키는 중국의 대도(大度)’는 이슬람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교도 역시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알라의 뜻에 따르는 존재이지만, 예언자(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얻지 못해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운명의 깨우침은 오직 알라만이 주시는 것이니 이웃으로서 무슬림은 자비와 연민으로 그들을 대하며 그들의 깨우침을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포용성이 중앙의 위치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명의 중앙지역에서는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나타나고 유행했다. 그런 지역에서 이슬람 아니라 어떤 움직임이라도 상당 수준의 포용성 없이는 어느 범위를 넘어 세력을 넓히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의 주변 세력들의 중국화에도 이슬람 주변 세력들의 이슬람화에도 이 포용성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프랑크왕국의 서유럽에서는 동방에서 들여온 종교 하나를 로마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후 교리를 조금씩 달리하는 같은 종교의 다른 교파들까지 이단으로 배척하며 유아독존의 길로 나아갔다. 사상적 경쟁이 빈약한 변방의 분위기였다.

 

 

4.

 

이슬람의 역사는 서양사에 속할까, 동양사에 속할까? 아시아 지역의 이슬람사는 동양사, 유럽-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사는 서양사로 취급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를 소속 대륙에 따라 분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역사학계가 자국사-동양사-서양사의 3부 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특색이다. 이 구조를 일제의 잔재로 여겨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두 나라 입장에서 타당성 있는 구조다.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문명권 소속이 분명한 만큼 자국사-자문명권사-타문명권사의 3중 동심원 구조가 역사인식의 틀로 합당하다.

 

문제는 동양사-서양사의 관계를 동심원이 중첩하는 입체적 구조가 아니라 아시아-유럽의 평면적 분할로 보는 데 있다. 유럽중심주의에 휩쓸린 관점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유럽과 아시아로 양분한 것이 원래 유럽중심주의였다. 자기네 동네를 유럽으로 이름붙이면서 나머지 전부를 아시아에 쓸어담은 것이다. 유럽인의 일반적 역사인식이 자국사-유럽사-세계사의 3중 구조로 이뤄지는 것은 우리와 대칭되는 같은 틀인데, 그들이 유럽사와 세계사의 관계를 입체적 구조로 보는 것과 달리 우리가 동양사-서양사를 평면적 분할로 보기 쉬운 것은 유럽사에 너무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동양사-서양사의 구분을 그대로 둔다는 전제 아래서는 이슬람사, 특히 근대 이전의 이슬람사를 서양사 영역으로 보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다. 더 동쪽에 있으면서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힌두문명권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권과 힌두권, 기독교권 사이의 상호 접촉에 비해 동아시아문명권은 오랫동안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서방의 문명권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영향에 비하면 그들과 동아시아 사이의 상호 영향은 미미했다.

 

유럽세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던 근대의 역사를 바라보는 데는 세상을 유럽과 비-유럽으로 갈라서 보는 유럽인의 관점이 상당히 유효하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서양사를 유럽 중심으로만 보는 관점은 유럽인들에게나 맡겨놓고 시야를 더 넓혀야 제대로 된 세계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보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무슬림들이 생각하는지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는 안사리의 입장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다. 무슬림들의 생각보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사리의 설명이 내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유럽인의 통념을 벗어나는 데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유럽다운 유럽의 출발점으로 앙리 피렌느가 보는 카롤링거 시대 이래 유럽의 역사는 이슬람권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으며 펼쳐졌다. 한국의 역사가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받으며 펼쳐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솔직히 한-중 관계의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하지만, 틀은 같고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관계에 대한 연구와 서술은 유럽인의 손으로 이뤄진 것이 압도적이고, 그중에는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것이 극히 적다. 근대 이전의 세계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유럽 관계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급선무로 보인다.

 

동양인의 관점에서 서양사의 틀을 짜려는 시도는 참고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랑캐의 역사작업을 위해 내 나름대로 짜 보려 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힘들여 연구해 온 영역을 고작 수십 권 책을 통해 얻은 식견을 갖고 가위질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주제넘는 짓이다. 하지만 해묵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절실한 일이므로 당장의 작업을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시도하는 것이다.

 

 

5.

 

유럽과 이슬람권, 그리고 인도까지를 서양사의 무대로 설정해서 근대 이전의 역사를 더듬어보려 한다. 이 지역의 문명 전파 통로로서 지중해와 인도양의 큰 역할에 따라 지중해권과 인도양권의 두 권역을 설정할 수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수상교통이 육상교통보다 원활했던 사실은 앞 회에서 설명한 바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Guns, Germs, and Steel , , >(1997, 2017 / 김진준 옮김 2005) 437쪽에서 육상교통의 비용이 수상교통의 약 7배였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체로 합당한 추정으로 보인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문명은 두 권역의 경계 지역에서 발생해 양쪽으로 퍼져나갔다.

 

안사리는 <무너진 섭리> 허두에서 이슬람의 본거지 중앙세계를 육로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해로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지중해의 서방문명과 대비한다. 수긍이 가는 관점이다.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에는 특성의 차이가 있다. 풍랑이 적고 짧은 항로가 많은 지중해에서는 작은 배들이 연중 거의 아무 때나 다닐 수 있는 반면 인도양에서는 꽤 큰 범선들이 계절풍에 맞춰서야 (인접 지역 사이가 아닌 대부분 항로에서) 항해할 수 있었다. 교통망으로서 인도양과 지중해의 성격 차이는 철도망과 자동차도로망의 차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alley#/media/File:Galley-knightshospitaller.jpg 돛보다 노젓기로 추진력을 얻는 갤리선이 지중해에서는 16세기까지 해운의 주종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Junk_(ship)#/media/File:Situs_civitatis_Bantam_et_Navium_Insulae_Iauae_delineatio.jpg 동남아시아에서 개발된 정크선이 인도양의 항로에서는 제일 많이 사용되었다

 

기원전 330년대 알렉산더의 정복이 서양의 동양 정복으로 통상 인식되지만, 그의 정복이 육군에 의해 육로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동방식 육상 제국의 틀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 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며, 그 후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마케도니아 전통을 버리고 페르시아 문화에 물들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올슨은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 82쪽에 기원전 327년의 시동의 음모를 소개한다. 알렉산더의 시동 몇이 암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는데, 주모자 헤르몰라우스는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당신이 걸치기 좋아하는 것은 페르시아 저고리와 가운이고 당신 고향의 풍속을 싫어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우리가 죽이려 한 것은 마케도니아인의 왕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의 왕이며 우리는 전쟁 규범에 따라 탈영병인 당신을 처단하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크의 기록에는 알렉산더 이전의 마케도니아 조정에 페르시아 망명자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던 것이 보인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가까이 있었지만 육로를 통해 페르시아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지, 알렉산더에게 정복의 진정한 대상은 페르시아의 풍요로움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케도니아가 기원전 5세기 초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정벌을 앞두고 그에 복속했었고 알렉산더 당시에도 인접한 트라키아가 페르시아제국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케도니아를 그리스권의 일부로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평정은 육상세력의 해양세력 제압으로 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실패한 일을 알렉산더가 해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단계의 지중해 신흥세력은 육상세력의 영향권에서 멀리 벗어난 서쪽 변방에서 일어났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쪽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문화-기술 자원을 물려받고 변방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큰 세력을 일으켰다.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의 경쟁을 물리친 로마가 동쪽으로 나아가 지중해에 접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더의 후계자들로부터 빼앗음으로써 지중해제국을 세운 것은 육상세력에 대한 해양세력의 반격이었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패권이 이뤄진 후 동쪽의 육상세력과 서쪽의 해양세력 사이에는 7백년 가까운 지구전이 이어졌다. 기원전 54년에 시작되어 로마(및 동로마)제국과 파르티아 및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사이에 간헐적으로 이어진 이 장기간의 적대관계를 로마-페르시아 전쟁이라고 한다. 4세기에 로마가 동쪽으로 옮겨간 데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Roman%E2%80%93Persian_Wars#/media/File:Byzantine_and_Sassanid_Empires_in_600_CE.png 600년경 동로마제국과 사산제국의 대치 상황

 

두 제국이 수백 년에 걸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그 사이의 경계선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피차 정복의 강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상제국과 육상제국의 성격을 가진 두 제국이 각자의 영역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차의 명운을 건 전면적 충돌에 이르지 않고 경계 지역의 소소한 이득만을 다투는 국지전의 양상이 계속된 것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두 제국의 교착 상황이 그 틈새에서 일어난 제3세력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이슬람의 흥기였다. 불과 1백 년 동안에 동쪽의 육상제국은 무너져 새로 일어난 이슬람제국에 흡수되었고 서쪽의 해양제국은 바다 건너의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 포위당한 모습이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Early_Muslim_conquests#/media/File:Map_of_expansion_of_Caliphate.svg 이슬람의 초기 확장 영역. 마호메트 당시(622-632), 올바로 인도받은 칼리프 시대(632-661), 옴미아드 칼리프조 시대(661-750)의 확장 영역이 서로 다른 색깔로 표시되었다.

 

 

6.

 

이슬람 신앙의 창시자 마호메트(c.570-632)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을 제창하면서 최후의 예언자를 자처했다. 더 이상의 예언자가 나올 가능성을 차단한 것은 교리와 교단의 통일성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가 세운 신정(神政)국가를 29년간 이끈 네 명의 칼리프를 올바로 인도받은 칼리프라 부르고, 661년 이후 칼리프를 세습화하여 일반적 제국의 성격으로 옮겨간 것이 옴미아드조()였다. 750년 옴미아드조가 아바스조로 넘어갈 무렵에는 동쪽으로 페르시아제국, 서쪽으로 이집트로부터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와 모로코까지 이슬람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앙리 피렌느는 이슬람세계 팽창의 신속함보다도 그 결과의 지속성에 경탄한다. 신속한 정복으로는 알렉산더제국, 아틸라의 훈족, 몽골제국 등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광대한 지역에 이슬람처럼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례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앞서 일어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 동화되어 간 것과 달리 소수의 아랍족이 거대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그 종교의 포용성에서 찾는다. (<샤를마뉴와 마호메트> 149-153)

 

포용성은 상대적인 기준이다. 초창기의 이슬람은 분명히 같은 시기 다른 종교들에 비해 큰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기독교가 이교도를 통상 적대시한 것과 달리 이슬람은 이교도를 연민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교도들이 무슬림을 무서워하기보다 부러워하도록 이끌었다. 동로마제국과 사산제국 치하에서 박해받던 소수집단에게는 이슬람의 차별이 반가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정복 사업에 호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슬람의 이교도 차별은 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다. 직업 선택에도 제한이 많지 않았다. 버나드 루이스는 이슬람세계에서 유대인의 직업으로 상인과 의사가 두드러진 사실을 놓고 유리한 조건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향으로 해석했다. 한편 식량, 가축, 무기 등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범위의 사업에 유대인의 활동이 거의 없었던 사실은 지배집단의 의심을 사기 쉬운 영역을 기피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슬람세계의 유대인> 90-92)

 

이슬람세계의 팽창은 분열로 이어졌다. 칼리프의 세습화에 따라 신앙공동체 움마(Ummah)’에서 제국으로 조직의 성격이 바뀌면서 권력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750년 아바스조로 넘어갈 무렵부터 국가 형태의 지방정권이 나타나고 10세기 이후에는 독립적인 술탄국(Sultanate)이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옴미아드조의 후예가 칼리프조의 부활을 선포해서(929) 칼리프의 분립에까지 이르렀다.

 

분열-분화의 단층선 형성에는 종족의 차이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코란의 권위를 통해 아랍어와 아랍문화가 공유되면서 종족 간 간격을 줄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긴 시간을 지나는 동안 여러 갈래 교파가 일어나 지역과 종족에 따른 차이와 어울리면서 분화를 촉진하게 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서방 이슬람권의 사정은 접어두고 서아시아 지역을 먼저 살펴본다면,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이 중요한 종족으로 부각된다. 이슬람의 평등 원리 아래서도 아랍인은 종교와 사회의 지도적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산제국에서 넘어온 페르시아인은 생산력과 문화의 우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위를 선점하고 있던 두 종족에게 군사력을 앞세운 투르크인이 도전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투르크인은 중국의 남북조시대 말기에 인근의 초원지대에서 강성한 세력을 키워 돌궐 제1제국(552-630)과 제2제국(687-745)을 경영하다가 제2제국 멸망 후 서남방으로 대거 진출, 이슬람세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중국사의 맥락에서는 돌궐(突厥)으로 지칭했지만 더 넓은 맥락에서는 투르크인으로 부른다.) 가즈나 술탄국(Ghaznavid Dynasty, 977-1186)과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 10371194)을 세우고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를 넘어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의 상당 부분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탈취하기도 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황제 로마노스 4세를 생포하기까지 해서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Ghaznavids#/media/File:Ghaznavid_Empire_975_-_1187_(AD).PNG 1030년경 최대에 이른 가즈나 술탄국의 판도

https://en.wikipedia.org/wiki/Seljuk_Empire#/media/File:Seljuk_Empire_locator_map.svg 1092년 셀주크 제국의 판도

 

13세기 초-중반 몽골제국이 서방으로 진격할 때 그 첫 번째 공격 대상은 이슬람세계의 투르크 세력이었다. 문명에 먼저 포섭된 유목세력을 배후에서 새로 일어난 세력이 공격하는 것은 초원세계에서 반복된 현상이었다. 한편 이슬람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투르크인의 침래와 몽골제국의 침공은 같은 방면에서 밀려온 거듭된 물결이었다. 가잔 칸의 이슬람 개종(1295) 후 일-칸국은 이슬람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동쪽에서 원나라가 중화세계의 일부가 된 것과 나란히 진행된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