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은 1918~20년의 스페인독감이었다. <위키피디아> “Spanish flu" 기사에 따르면 2년 동안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 수는 17백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페인독감이란 이름이 스페인사람들에게는 억울하다. 감염이 폭발할 때는 제1차 대전이 아직 계속되고 있어서 취재와 보도에 제약이 많았는데, 중립국인 스페인에는 그런 제약이 없어서 그곳 사정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널리 각인된 것이라 한다. 국왕 알폰소 8세가 그 병에 걸린 것도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 진짜 발원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19184월의 폭발보다 꽤 앞선 시점(길게는 3년까지)에 발생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니 확실한 결론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 같다.

 

1918년 독감이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이라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최악의 유행병으로는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이 꼽힐 것이다. 흑사병 사태의 실상에 관해서는 지금도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위키피디아> “Consequences of the Black Death" 기사에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세계 인구가 475백만 명에서 35천만 내지 375백만 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인명 피해를 전 인구의 20~25% 수준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보는 것이다.

 

유럽 지역의 흑사병 피해 연구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나와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 유럽의 피해가 가장 혹심해서. (2) 피해 기록이 제일 잘 남아있어서. (3) 근대적 연구가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Death#/media/File:Nuremberg_chronicles_-_Dance_of_Death_(CCLXIIIIv).jpg (중세 말기 유럽 회화에 죽음의 무도회가 많이 나타난 것은 흑사병 대유행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Black Death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Mid-14th century pandemic in Eurasia and North Africa Black DeathSpread of the Black Death in Europe and the Near East (1346–1353) DiseaseBubonic plagueLocationEurasia, parts of Af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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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은 당연한 사실이다. 근대적 학문의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주축이라는 유럽중심주의가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압도적 비중이 유럽 역사에 있었고 흑사병 사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흑사병 피해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시 유럽은 기록문화가 중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뒤져 있어서 그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기록 전체 분량이 아주 적다. 연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1)이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위키피디아> 위 기사에 따르면 1347~51년의 5년간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절반이 흑사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어 중국에 관해서는 13세기의 125백만 명 인구가 14세기 말까지 65백만 명으로 줄어든 사실만을 제시하고, 중동 지역에서는 1348년을 전후해서 인구의 25~38% 희생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는 중국과 이슬람권의 피해가 유럽에 비해 덜했는지 어떤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다.

 

 

2.

 

14세기의 흑사병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로 밝혀졌는데, 박테리아 감염병인 페스트 중 림프샘이 심하게 부어오르는 증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증세가 참혹하고 치사율이 높아서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국과 한국 기록에 온역(瘟疫)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온역이 페스트 외의 다른 전염병을 가리킨 경우도 많이 있다. 영어의 ‘plague'도 마찬가지다.)

 

https://en.wikipedia.org/wiki/Bubonic_plague#/media/File:Plague_-buboes.jpg (사타구니와 겨드랑의 림프샘 염증이 선페스트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모든 감염병은 어느 곳에선가 안정 상태의 풍토병(endemic disease)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범위의 숙주에게 심한 증세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원래의 숙주 아닌 다른 동물(인간)이 감염될 때 격렬한 증세를 일으킨다. 풍토병 지역 사람들은 면역력을 키우거나 감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다른 지역 사람이 들어오면 걸리기 쉽고, 환경이나 여건의 큰 변화로 외부로 터져 나오면 무서운 유행병이 될 수 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의 들쥐를 숙주로 잠복해 있다가 몽골제국 건설에 따른 환경 변화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을 옮긴 것은 쥐와 쥐벼룩이었다. 집쥐는 들쥐와 달리 감염 후 곧 죽기 때문에 감염 기회가 제한되는데, 중앙아시아 지역의 교통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널리 퍼져나갈 조건이 이뤄진 것이다.

 

환경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행병의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문명 발생 자체가 유행병의 위험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것이다. 경제 발달에 따라 이동이 늘어나고 도시의 인구 밀집지역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문명권의 통합으로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를 바라보는 이면에서 질병의 세계화를 위한 계기도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과 유행병의 관계를 생각할 때, 14세기 이전의 유럽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적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기원전 430~426년 아테네의 역병 이래 몇 차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의 재해 기록에 비하면 아주 드물다. 그나마 유럽의 질병 유행 기록이라는 것이 모두 지중해세계의 것이고, 서유럽과 북유럽에는 흑사병 이전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전혀 없었다. 교역 규모가 작고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Death#/media/File:1346-1353_spread_of_the_Black_Death_in_Europe_map.svg (1346-53년 유럽의 흑사병 전파 경로. 흑해 연안에서 출발해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간 다음 서유럽을 거쳐 북유럽에 이른 경위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유럽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그리스에서 세계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구역으로 나눠 본 데 그 기원이 있다. 그리스인이 자기네를 유럽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 지중해 건너편인 아프리카와의 구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시아와의 지리적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페르시아제국을 의식하며 문화적 구분을 생각한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Europe#/media/File:Anaximander_world_map-en.svg (기원전 6세기에 아낙시만드로스가 그린 세계지도.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파시스 강은 그루지야에 있는 리오니 강을 가리킨 것이었다. 카프카스 지역이 당시 그리스인이 인식한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는 나일 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인에게 유럽은 동쪽의 페르시아 영역, 남쪽의 이집트 영역과 대비되는 자기네 영역이었다. 로마인이 이 인식을 물려받으면서 아시아와의 경계는 돈 강까지 확장되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유럽의 정체성이 다시 인식된 것은 9세기 카롤링거 시대였는데, 이때의 유럽은 로마교회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슬람권은 물론 동방정교회 영역과도 대비되는 것이었다. 15세기 후반 모스크바대공국이 금장한국(Golden Horde)의 통제를 벗어나 서유럽과 관계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지금과 비슷한 유럽의 영역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대항해시대를 거쳐 유럽인의 해외정복이 시작되면서 정복의 주체인 유럽을 정복의 대상인 여타 세계와 구분하는 의식 속에서 유럽의 근대적 정체성이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로마인이 생각한 유럽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유럽은 위치상으로는 꽤 겹쳐진다. 근대의 유럽중심주의는 그 사이의 연속성을 전제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흑사병이 덮칠 무렵까지 중세인의 유럽인식은 그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 이후 세계사 속에서 유럽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
2020. 12. 26. 01:18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의 집행정지 판결을 보며 행정부 책임자로서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합니다. 특히 재판부에서 집행정지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근거의 일부로 징계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 점을 엄중하게 받아들입니다. 법원의 징계 취소 청구소송과 별도로 감사원 등 행정기관에서도 징계의 정당성을 철저히 재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사자로서 힘든 시간을 보낸 윤 총장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고마운 마음이라 함은 어려운 상황을 꿋꿋하게 견뎌내면서 많은 검찰 구성원들이 소명의식을 새롭게 키워내도록 이끌어준 데 대한 고마움입니다. 진행 중인 사법개혁을 통해 검찰의 일부 기능이 다른 기관으로 넘어가더라도 이 나라의 사법체계 안에서 검찰의 중요한 역할은 계속될 것입니다. 개혁 중에 외형을 바꾸는 외과적 영역이 있고 체질을 개선하는 내과적 영역이 있다면, 내과적 개혁은 검찰 내부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윤 총장 징계에 반대하는 검찰 구성원들의 의사 표시에서 '법치' 원리를 받드는 절실한 자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세는 이 사회의 큰 과제인 사법개혁에 훌륭한 뒷받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법부, 특히 담당 재판부에 크게 감사드립니다. 3권 분립의 진정한 가치를 온 국민이 절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신 데 대한 고마움입니다. 담당 재판부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이 대단히 큰 사건을 처리하면서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고, 사건의 의미를 국민에게 잘 전달하는 판결문을 작성해 주었습니다. 전직 법조인으로서 개인적으로도 경의를 표합니다.

 

윤 총장 등 검찰 지도부와 재판부 등 관계자들에게 어려움을 끼쳐드린 데 사과드리고, 많은 국민들께 걱정을 끼쳐드린 데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을 저 자신 초심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무엇보다, 절차의 공정성에 더 정성을 쏟음으로써 선의로 추진한 일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런 입장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나오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안회와 자공

기사입력  오전 8:48:48

안회와 자공, 공자의 이상과 현실

공자와 자공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며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생각을 나눴다. 시와 정치, 역사와 예법,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자기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공자는 자공을 상대로 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자공은 스승의 말씀을 들은 뒤, 그 내용에 대해서만 응대를 할 뿐, 함축될 수 있는 다른 뜻을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다. 감춰진 비판을 찾아내려 하지도 않았고 변명하는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들 사이에 얘기가 잘 통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자공에 대해 공자가 쓴 제일 엄격한 말, 책망으로까지 들릴 수 있었던 말이 "그릇"(器)이었다. 무엇인가 알맹이를 담는 것이니, 목적 아닌 수단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자공이 물었다.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그릇이니라."
"어떤 그릇입니까?"
"사당에 제물로 올리는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자공은 자신이 어떤 기술이든 습득해서 연마하는 데 빼어난 재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점이 종국에는 자신의 향상을 가로막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정한 전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만족감 때문에 더 이상의 향상을 위한 동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공이 언변, 인물 평가, 재산 관리 등 여러 가지 일에 능했다는 사실이 <논어>에 나타나 있다. 정치에 나설 경우 외교와 인재 등용, 그리고 재정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그를 사당의 그릇에 비유한 데도 그의 정치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위나라 대신이 자공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군자에게 중요한 것은 바탕(質)인데, 어째서 무늬(文)에 공을 들이는 것입니까?" 자신을 풍자하는 말임을 알아챈 자공이 대답했다. "아쉽소, 그대가 군자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늬가 바로 바탕이고 바탕이 바로 무늬라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도 털을 밀어버리고 나면 개와 양의 가죽과 무엇이 다르겠소?"

바탕과 무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관점이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배우는 것 모두가 그 사람의 행동과 판단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그를 또 하나의 제자 안회와 비교한 말을 보면 그 역시 자공의 이런 관점을 옹호한 것으로 보인다. 안회는 완벽한 인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자가 인정한 사람이다.

안회는 도에 아주 가까이 이른 사람인데 가난 속에 산다. 자공은 운명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고 돈 벌기를 잘하는데, 짐작을 하는 것이 들어맞는 일이 많다.

자공은 주어진 상황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돈 버는 재주를 익혔고 그 과정에서 관찰력과 사고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그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판단과 예측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바탕이 무늬와 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공자가 자공보다 안회를 더 높이 평가했을까? 그렇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 여럿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회는 안회로, 자공은 자공으로 따로 떼어놓고 얘기했다. 한 쪽은 도덕적 품성을 완성에 가깝게 가져간 사람이지만 가난 속에 살고, 다른 한 쪽은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면서 분석 능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혔다. 공자는 양쪽 모두를 탐탁하게 여긴 것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와 안회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어 둘을 아는 정도입니다."
"네가 못하지. 너나 나나 안회만은 못하지."


공자는 안회를 훌륭한 사람으로, 자신이 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자기 입장을 잘 지키는 자공의 태도도 귀하게 여겼다. 자공과의 문답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도 그가 기대했던 것 같다. 이런 문답도 있었다.

자공이 물었다.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겠습니까?"
"괜찮지.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겠다."
"<시경>에 '절차탁마'(切磋琢磨)라 한 대목이 그런 것을 가리킨 것입니까?"
"자공아, 이제 너와 더불어 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지나간 것을 말해 줘도 올 것을 알게 되었으니."


대화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했다가 다른 주제로 끝난다. 먼저 공자가 자공이 처음 꺼낸 말을 더 예리하고 미묘하게 다듬어줌으로써 대화에 추진력을 가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자공이 <시경>의 한 대목을 떠올리는데, 그것이 공자가 보기에 얘기하던 주제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공이 스스로 떠올린 것을 칭찬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회는 어떤가? 왜 공자가 안회와는 시를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안회는 자공보다 뛰어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여러 모로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자공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으니, 자공에게 "너나 나나 안회만은 못하지." 한 것이 겸손의 말씀만이 아니었다.

공자는 자공을 자신과 같은 과 인간으로 여긴 것이다. 두 사람 다 살아가기 위해 기술을 익혀야 했고, 타고난 본질을 다듬기 위해 학문을 닦아야 했다. 두 사람 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자신과 남들에게 묻기를 좋아했고, 두 사람 다 마음이 불안하고 쉽게 평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안회는 그들과 다른 과 사람이었다.

- 안핑 친(Annping Chin)의 <공자 평전(The Authentic Confucius)>(돌베개 근간) 중에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은 총명함을 표현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래서 안회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자신은 둘밖에 모른다고 한 말을 단순한 총명함의 비교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이것을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데 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숫자의 시작이요, '열'은 끝이다. 따라서 "하나를 들어 열을 안다" 함은 원리의 실마리만 주어지면 그 끝까지 한달음에 치닫는다는 말이다. 한편 '둘'은 '하나'의 대칭이다. "하나를 들어 둘을 안다"는 것은 하나의 정보가 주어질 때 그 앞뒤를 살펴 추론을 통해 인식을 넓혀 나간다는 뜻이다.

안회는 직관으로 통찰력을 얻는 사람이고 자공은 경험으로 이해력을 얻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안회가 가난하게 살고 자공이 돈을 잘 번 차이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자의 애초 질문 "누가 더 훌륭한가"(孰愈)는 양적 비교의 요구였다. 이에 자공은 '열'과 '둘'의 차이로 대답했다. 양적 비교의 형태를 취하면서 질적 차이를 나타낸 표현이다. 그 재치에 공자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회가 현실에 무능한 점을 얕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현실적인 입장도 당당히 내놓은 것이 아닌가.

"못하다"는 뜻으로 공자가 쓴 말은 "같지 않다"(不如)는 것이다. 관용적으로 "못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단순한 양적 비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뜻이 담겨진 표현 같다. 그 뜻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자기 자신도 자공과 같은 입장이라는 점을 밝히기까지 했다.

노나라 임금이 제자 중 배우기 좋아하는 자를 묻자 공자는 안회가 죽은 후 그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그처럼 배우기를 좋아한 사람이 다시 없었음을 말했다.

"안회는 다른 이에게 노여움을 옮기는 일이 없었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회에 대한 공자 최고의 찬사였다. 주석에는 "갑에게 노여운 마음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다"고 풀이했는데, 그 '갑'이란 것이 노상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먼저 찾으니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공 같으면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자기 허물에 아주 눈을 감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또는 여건에 잘못된 점이 없는지도 열심히 살폈을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만 돌아보는 안회보다 인격 도야에는 뒤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위해 잘 공헌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자신을 안회보다 자공 쪽에 놓은 이유는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공유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의 중요함도 잊지 않았다. 현실주의자 자공에게는 마음 한 구석에서라도 이상을 그리는 뜻을 지키게 하고, 이상주의자 안회에게는 이상이 현실의 고민을 아주 벗어나지 않게 일깨워주는 것이 스승으로서 공자의 역할이었다.

공자의 정치적 성향을 후세의 기준으로는 '보수주의'로 보는 데 별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주나라 초기의 봉건체제를 질서의 표상으로 보고 그 복원을 제창한 것은 그야말로 원론적인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제자들의 모습도 대개 보수의 범주 안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안에 상당한 편차가 있다. 이 글에 거론된 두 사람을 놓고 본다면 안회를 '정통 보수'로, 자공을 '중도 보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리만을 생각하는 안회와 적절한 현실 대응을 중시하는 자공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림이다.

'보수'의 의미가 무엇인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지나친 욕심을 삼가는 것이다. 안회를 '정통 보수'라 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의 의미를 넓게 생각해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 해결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한편, 자공을 '중도 보수'라 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한층 더 분석해서 "가능한 한 더 바람직한 현실"에 접근시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 점에서 자공과 같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불교 관점에서 본다면 '상구보리'(上求菩提)에 투철한 것이 안회였고, 자공과 공자는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비중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한국의 '보수'의 모습은 어떠한가?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서 지나친 욕심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선 떠오른다. "7-4-7" 공약에 환호하던 모습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강바닥도 파헤치고, 도시도 재개발하고, 뭐든 많이 저지르자는 쪽이 한국에서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환경과 사회의 안정성을 지키려는 뜻은 없고, 자기네 부와 권력을 보장해주는 체제의 안정성에만 뜻이 있다. 그래서 '수구' 소리를 듣는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이루자는 말을 누가 했던가? '진보'를 표방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이것은 보수주의자가 내걸 강령이다. 진보주의자라면 주어진 원칙보다 더 좋은 원칙, 주어진 상식보다 더 나은 상식을 찾자고 나서야 한다.

이런 말이 진보 쪽에서 나온 것은 보수가 보수 노릇을 너무나 제대로 못한 결과다. 안회 같은 금욕적 '정통 보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공 같은 현실주의적 '중도 보수' 정도는 제 역할을 찾아야 이 사회가 최소한의 건강을 얻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