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이탈리아 도시들이 꼽힌다. 공화정과 자본주의를 비롯한 근대 유럽의 핵심 요소들의 기원을 이곳에서 찾는 연구가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유럽다운 유럽을 빚어낸 15-16세기 르네상스도 이 도시들을 무대로 펼쳐진 것이었다. ‘유럽문명의 기원으로서 그리스-로마 문명보다 근대유럽의 기원으로서 이 도시들의 역할이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도시들의 구성원들이 과연 유럽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 대표로 베네치아의 역사를 한 번 훑어본다.

 

421325일 정오 산자코모 교회의 봉헌을 베네치아의 기원으로 이야기한다. 3세기 이후 게르만 침략을 피해 방어가 쉬운 석호(潟湖)의 섬에 피난민들이 모여든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에 비지고트 족과 훈 족의 침략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였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553년부터 동로마제국의 관할을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Venice#/media/File:Venice_as_seen_from_the_air_with_bridge_to_mainland.jpg

https://en.wikipedia.org/wiki/Venice#/media/File:Space_Station_Flight_Over_Venice.jpg (베네치아의 항공사진과 위성사진. 피난처로서 적합한 지형을 알아볼 수 있다.)

 

697년에 베네치아 공화정의 핵심인 도제(doge)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독립성은 9세기 이후에 완성되었다. 8세기 중엽 인근의 라베나 총독령(Exarchate of Ravenna)이 롬바르드 왕국에 점령당하면서 동로마 영토로서 베네치아의 위치가 고립되었고, 베네치아를 넘보던 샤를마뉴가 814년에 동로마 황제와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아드리아 해의 교역권을 부여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magne#/media/File:771_CE,_Europe.svg (샤를마뉴 시대 유럽의 국가-민족 분포. 지금의 터키를 비롯한 보라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동로마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 후 동로마제국의 쇠퇴에 따라 베네치아의 독립성이 강화되었고, 교역로 일대의 영토를 점령해서 해상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대서양 항해의 발전에 따라 베네치아의 위상이 움츠러들다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침공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제국의 관할에 들어갔고, 1866년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했다.

 

베네치아의 번영은 교역활동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지중해세계에서는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교역도시들이 발달해 왔다. 교역도시 중에는 해로상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항로와 항로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고, 해로의 끝에 자리 잡아 육상의 배후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후자의 경우로 출발했다가 동로마제국의 옹호 아래 지중해 동부 해역과 흑해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해상제국을 이루었다. 동로마제국의 베네치아 옹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082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황금칙령(chrysobull)’이다.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에서 노르만 세력을 막아주는 대신 교역의 권리와 관세 면제 혜택을 보장해주는 내용이었다.

 

장사꾼의 성공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충성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냉소적인 말이 있다. 베네치아에서는 확실히 적용된 원칙이다. 베네치아의 번영에는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큰 몫을 했고, 이를 억제하려는 황제와 교황의 뜻을 거침없이 거슬렀다. 베네치아 지도부는 교황에게 수없이 파문의 경고를 받고 실제로 두 차례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운동에서도 베네치아는 병력과 물자 수송대금을 착실히 징수할 뿐 아니라 정복 지역의 이권도 철저하게 챙겼다. ‘성전(聖戰)’의 명분을 위해 장삿속을 양보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베네치아의 장삿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혼란을 이용한 콘스탄티노플 약탈(1202)이었다. 애초에 십자군운동은 투르크계 이슬람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세계를 함께 보호하자는 동로마제국의 호소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제4차 십자군은 오히려 동로마제국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세력의 진출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역설적인 행동을 취했고, 그 와중에서 베네치아는 인근 해역의 제해권을 포함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t_Mark's_Basilica#/media/File:Veneza38.jpg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해 온 마상(馬像)들이 산마르코 대성당 입구를 장식하며(지금은 복제품이다.) 당시 베네치아의 도덕적 감수성 수준을 증언해 주고 있다.)

 

수백 년간 종주국으로 모시며 많은 혜택을 얻던 동로마제국의 파괴에 앞장선 베네치아의 모습에 중국의 왕조에 복속하다가 왕조의 파괴에 앞장서던 오랑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쩌면 동로마제국에 대한 베네치아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도 바필드가 말하는 내경 전략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서쪽 변방 유지를 위해 베네치아를 후원해 주며 포섭하고 있던 동로마제국 체제가 허약해졌을 때 베네치아가 배후의 오랑캐들을 규합해서 제국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이때 무너진 동로마제국은 60년 후 일단 회복되기는 하지만 1453년 멸망에 이를 때까지 과거의 성세를 끝내 되찾지 못한다.

 

십자군운동(1096-1271)은 새로 태어나고 있던 유럽이 지중해세계와의 관계를 바꿔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유럽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보다 깊은 설명을 덧붙일 주제로 르네상스와 함께 남겨둔다.

 

 

6.

 

피렌느는 <중세의 도시>에서 베네치아의 흥기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베네치아가 유럽의 서쪽과 그토록 다른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어떤 혜택을 얻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역으로부터 번영을 얻었을 뿐 아니라 문명의 차원 높은 형태, 완성된 기술, 그리고 베네치아가 중세의 유럽과 차별된 위치에 서게 해준 정치와 행정의 조직방법을 동쪽에서 얻었다. 8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 물자를 공급하는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갈수록 큰 성공을 거뒀다. 베네치아 배들은 인접 지역의 생산품을 콘스탄티노플로 실어 갔다. 이탈리아의 밀과 와인, 달마시아의 목재, 그리고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 해 연안의 슬라브인으로부터 손쉽게 획득한 노예를 수송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에는 비잔틴에서 생산된 값진 직물과 아시아에서 조달된 향료를 싣고 왔다. 10세기까지는 해상활동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졌고, 교역의 확장에 따라 이득에 대한 사랑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절제심이라는 것을 아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장사꾼의 종교였다. 장사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이슬람이 기독교의 적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54쪽)

 

이 대목에서 유럽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노예가 언급된다. 윌리엄 번스타인도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2008)에서 13세기의 교역 상황을 검토하다가 유럽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향료를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구입하는 대가로 공급할 만한 다른 상품이 있었는가?” (111) 자문한 다음 노예가 그 상품이었다고 자답한다. 10세기에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 13세기에는 흑해 연안에서 노예를 확보했는데 어느 쪽이나 슬라브인이 그 대상이었다. “slave" 등 노예를 뜻하는 유럽 어휘들이 ”Slav"에서 나온 것이다.

 

피렌느는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게르만인이 로마제국의 노예제도를 배웠고 라인 강 서쪽의 야만인으로부터 노예를 포획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96) 나폴리와 베네벤토 사이의 836년 조약 중에 롬바르드 노예를 살 수는 있지만 되팔 수는 없게 한다는 조항으로 보아 게르만인 중에도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81-2) 대상 종족에 제한이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노예시장이 성행했던 것이다.

 

15세기까지 노예는 유럽의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교역도시들은 동방에서 향료와 직물 등 고급 상품을 수입하는 대신 목재, 곡물 등 원자재와 함께 노예를 수출했다. 문명 중심부에서는 다양한 인력의 수요가 있었고 노예 구입은 인력 확보의 한 방법이었다. 노예의 수급관계를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문명권의 외곽부, 유럽 내륙 지역은 배후지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8세기 중엽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진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유럽에 전파된 사실을 놓고 그때까지 유럽에는 종이의 수요가 적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유럽에서 양피지가 널리 쓰인 것은 7세기 말부터의 일로 피렌느는 추정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67-170) 그 전까지 로마시대 이래의 파피루스가 쓰이다가 양피지로 대치된 것은 이슬람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교역권에서 배제된 갈리아 지역에 파피루스 공급이 끊긴 때문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대유행에서 유럽 지역의 충격이 중국이나 이슬람권보다 더 강렬했을 이유를 두 가지 생각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낮은 문명 수준과 관련된 이유다. 하나는 유럽인의 유전자 풀이 문명 선진 지역보다 빈약해서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저항력이 낮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인이 유라시아 질병에 취약했던 것과 비슷한 피해자의 입장에 14세기의 유럽인도 처해 있었던 것 아닐까? (지나친 상상 같기도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말한 “Cathay”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수백 년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유럽의 고립성이 정말 심했던 것 같다. 14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아프리카, 유럽과 대서양이 들어간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는데!)

 

또 하나 이유는 개체가 아닌 사회체제의 저항력 문제다. 문명 선진 지역에서는 전염병 유행을 여러 차례 겪어 왔기 때문에 웬만한 비상사태에도 체제의 전면적 붕괴를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나름대로 갖춰져 있었던 반면 안정된 문명 단계에 미처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유럽에서는 문명의 어귀에서 반()문명의 정글로 일거에 빠져들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 이른바 선진국들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데도 같은 이유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이유 모두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14세기 유럽의 문명 수준이 일반 통념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는, 그 시대의 여러 현상을 이 사실에 입각해서 다시 검토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유럽 근대문명의 특성 중에 흑사병 대유행에 따른 체제의 파괴가 다른 문명권보다 혹심했다는 역사적 경험이 비쳐진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근대문명의 미래가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절실한 필요다.

 

Posted by 문천

"오랑캐의 역사"작업에 참고하려고 읽는 책 중에 특별히 재미있는 것을 하나 만났습니다. 책 끝의 한 단락을 관심 있는 분들께 보여드리려고 옮겨봤습니다. 주변 출판사에 번역출판을 검토하도록 권해드리려고 합니다.

 

 

1992 8 25일 세르비아군대가 사라예보 국립도서관에 폭격을 시작했다. 일부러였다. 백만 권이 넘는 책과 십여만 점의 문서가 고의적인 파괴를 당했다. 그 석 달 전에는 그 군대가 그 도시의 동방박물관을 공격해서 5천여 점의 이슬람과 유대인 고문서로 이뤄진 훌륭한 컬렉션을 불태워 버렸었다. 왜였을까? 언제부터 도서관이 전략적 표적물이 되었나? 물론 전쟁에는 여러 방면의 전선이 있다. 사라예보의 그 기억의 궁전들에 대한 공격의 목적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많은 도서를 불태우고 알-안달루스의 수많은 기억의 궁전들을 망가뜨린 공격의 목적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책들은 건물들처럼, 미술품처럼, 노래처럼, 그리고 예배의 언어처럼, 관용과 문화적 정체성의 복잡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곤 한다. 이념적 순결주의자들은 그런 복잡성을 부정한다. 당장의 현실 속에서도 부정하고 미래의 가능성으로도 부정한다. 책을 비롯한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들은 아무리 엄혹한 공식적 억압 밑에서도 사회적-문화적 교섭은 어떻게든 이어져 나가려 한다는 사실을 종종 보여준다. 책과 건축물 등 살아남는 유물들은 그 자체가 관용이나 저항의 행위이거나 최소한 그런 노력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다.

 

공교롭게도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의 5백주년에 일어난 1992년의 끔찍한 파괴에서 살아남은 보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위대한 사라예보 도서관과 박물관의 폐허에서 건져낸 약간의 유물 중에 사라예보 하가다란 이름의 유명한 문서가 있다. 하가다란 기도문과 설화를 담은 책으로, 전승하는 설화들과 출애급기를 기념하며 유월절에 바치는 기도문이 이 하가다에 담겨 있다. 아름답게 채색된 이 사라예보 하가다는 하가다 중 일품으로 꼽히는 보물인데, 이름과 달리 사라예보의 물건이 아니다. 톨레도에 남겨진 두 개의 시나고그처럼, 정치적으로는 기독교권이되 문화적으로는 네오-이슬람권이던 중세기 스페인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한 줄 생략)

 

이 문서가 파괴의 위험을 모면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1492년 스페인을 탈출해 오토만제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이 문서를 가지고 나왔다. 그곳에서 이 하가다는 5백년 가까이 애호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2차대전 때 또 한 차례 위기를 겪어야 했다. 사라예보 도서관의 무슬림 사서 한 사람이 이 하가다를 나치의 손길에서 구해냈다는 것은 학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여러 해 동안 나도 이 주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도 이름을 모르고 누구도 이름을 모르는 것 같은 그 무슬림이 이 아름다운 문서를 구출한 데는 그 유래를 안다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무슬림이 그러는 것처럼 그 사서의 마음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옛날 알-안달루스의 추억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세르반테스가 어느 날 톨레도에서 마주쳤던 이름 모를 무어인, 스페인의 어느 혼합어로 쓰여진, 돈키호테가 들어있는 그 책, 파괴를 앞두고 있던 그 진정한 역사를 번역한 그 무어인의 명예로운 후예라 할 만한 돈키호테 스타일의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 무슬림 사서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9 5 2일의 일이었다. 사라예보에서 문서가 구출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뉴욕타임스 제1면에 실린 기사에는 세르반테스 자신이라도 당당히 내어놓을 만한 진정한 역사의 편린이 담겨 있었다. 1999 4월초 코소보에서 쫓겨난, “알바니아계라고 흔히 표현되는 수천 명의 유럽인 무슬림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다. 다른 난민들처럼 아주 작은 소지품밖에 들고 나올 수 없었다. 모든 난민이 그러듯, 그 여인도 가장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갖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가방에도 넣지 않고 몸에 지니고 나올 만큼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은 한 장의 종이쪽이었다. 세르반테스가 봤다면 그 여인이 알아보기는 하지만 읽지는 못하는 언어로 된 서류라고 했을 것이다. 그 여인은 자기 아버지가 뭔가 상으로 받아 대단히 아끼던 서류라고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고달픈 여정 끝에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은 여인은 코소보 난민 구호에 나섰던 그 지역 유대인 집단에 그 소중한 서류를 보여줄 마음이 들었다. 그들에게 서류를 가져간 것은 히브리어로 적힌 것을 알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내용을 알아내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때문이었다.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마치 알하미아도 문서가 잃어버렸던 돈키호테 이야기라는 사실을 세르반테스의 변사가 알아낸 것만큼이나 그 서류는 그 여인에게 소중했던 것이었다. 그 서류는 이스라엘 정부가 여인의 아버지에게 준 감사장이었는데, 그의 공적은 사라예보 하가다의 구출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지역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보호해준 것까지 있었다. 이 무슬림 사서는 수백 년에 걸친 중세 톨레랑스의 상징물을 20세기 야만의 공격에서 구해냄으로써 학계의 찬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라예보의 유대인 동료시민들을 2차대전 동안 자기 아파트에 감춰주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 차례 20세기 야만이 만들어낸 수용소에서 수많은 난민들과 똑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한 여인의 아버지가 그 무슬림 사서였다는 사실이 1999 5월에 밝혀졌다. 자기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던 그 여인은 그 어려운 시점에서 가족과 함께 얻은 특별한 피난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여인은 수용소 밖으로 안내받아 전란의 동유럽을 떠나 이스라엘로 모셔졌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오래 못 본 친척을 맞는 것처럼 반겨주는 한 사람이 집으로 데려갔다. 선량한 사서가 유월절 기도문을 담은 위대한 문서와 함께 구출해낸 사람들 중 하나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진심으로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에 보답이 돌아오는군요. ‘윤회란 말이 생각납니다.” 윤회란 이 사서의 딸이 아마 상상하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안달루시아 궁전에서 아직도 다 파헤쳐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그 고리 안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것 아닐까. 그곳에, 무너진 폐허 안에나 살아남은 건축물의 아름다움 속에나, 파괴된 책들 속에나 남겨진 책들 속에나, 우리 자신의 문화적 기억과 가능성들이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3.

 

이번 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그려 온 중국사의 모습을 새로 그려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려운 문제에 마주치게 된 것이, 유럽사의 그림도 자꾸 새로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중국사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과 맞춰볼 때 어려서부터 배웠던 유럽사와 잘 맞지 않는 구석이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전공분야도 아닌 유럽사를 내 멋대로 그릴 수는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런 참에 마주친 귀인(貴人)이 백 년 전의 벨기에 역사학자 앙리 피렌느(1862-1935)였다. 그가 유고로 남긴 <Mohammed and Charlemagne 마호메트와 샤를마뉴>(1937)를 정리해서 출간한 아들 자크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모든 책을 두 차례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초고에서는 형식에 관계없이 내용을 끌어 모아 놓았다. 거친 형태의 초고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한 완성고는 초고를 수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쓰는 글로서, 객관적이고 공들여 간결하게 다듬은 형식을 갖추면서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그 형식 뒤에 숨겨놓는 것이었다." (10)

 

피렌느는 객관성과 엄밀성에 매우 충실한 역사학자였다. 그런데 이 책은 평소의 기준을 백퍼센트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원고를 완성하고도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 기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표할 가치는 있는 글이라고 여겼기에 아들이 정리해 낼 수 있는 형태로 남겨놓은 것일 텐데.

 

이번에 참고한 또 하나 피렌느의 책 <Medieval Cities 중세의 도시>(1927)는 평소의 기준을 지킨 작품으로, 건조할 정도로 엄정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는 그와 달리, 발랄한 생각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저자 본인이 만년의 작품에서는 역사학자의 기준을 벗어난 사상가의 역할을 추구한 것 같다. 다만 그 역할을 생전에는 자임하지 않고 사후의 업적으로만 남긴 것으로 이해한다.

 

오래 전에 써놓은 채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아들에게 일거리로 남겨 둔 더 큰 책이 있다. <A History of Europe - from the Invasions to the 16th Century 유럽중세사>. 19163월 독일 점령군에 체포되어 191811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32개월간 독일의 몇 개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집필한 책이다. 수용소에 함께 있던 러시아 유학생들을 위해 사설 강단을 열어 경제사를 강의하다가 유럽의 역사를 정리할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과 토론은 물론, 참고자료도 구해 볼 수 없는 환경에서 기억에 의지해 이 책을 쓰면서 평소와 같은 고증의 기준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에도 서문을 쓴 아들 자크는 원래 원고의 연도 표시가 대부분 빈 괄호로 붙어 있었던 데서 참고자료 없이 작성된 원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과연 예전과 같은 연구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학인(學人)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유럽사를 새로 그려보는 데 피렌느의 저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에게 받아들인 생각 중 가장 기본이 된 것은 무엇보다 유럽지중해세계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의 첫 문단이 이런 내용이다.

 

"인간이 빚어낸 경이로운 구조물인 로마제국의 모든 특성 가운데 가장 강렬하면서 또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지중해성이다. 동쪽의 그리스 문화권과 서쪽의 라틴 문화권으로 갈라지지만, 지중해에 속한다는 그 특성이 제국의 모든 주(province)들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묶어주었다. 우리들의 바다, Mare nostrum의 의미를 가득 품은 이 내해는 사상과 종교와 상품이 움직여 다니는 통로였다. 벨기에,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라이티아, 노리쿰, 파노니아 등 북쪽의 주들은 단지 오랑캐를 가로막는 울타리일 뿐이었다. 문명의 생명은 거대한 호수의 기슭에 응축되어 있었다. 지중해 없이는 아프리카의 밀이 로마에 공급될 수 없었다. 해적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항해의 안전이 확보된 이제 지중해의 혜택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모든 주로부터 바다로 나오는 길을 통해 로마제국의 모든 교통이 지중해에서 합쳐졌다. 바다로부터 멀리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문명의 농도는 점차 희박해졌다." (17)

 

그리스-로마인에게는 지중해세계가(특히 그 동쪽 일대) 곧 문명세계였고, 그중에서 동쪽의 페르시아 문명권, 남쪽의 이집트 문명권과 대비해서 지중해 북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이라 불렀다. 지금 기준으로 유럽의 동남부 지역에 해당하며, 후에 유럽을 이끌 서북부는 아직 문명세계의 바깥에 있어서 페르시아나 이집트보다도 더 먼 곳으로 여겨졌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에야 서서히 이뤄져가는 유럽의 진정한 탄생을 다룬 책이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4.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인도에서 발생한 농업문명의 다음 단계 확장-발전에서 지중해와 인도양이 주축이 된 것은 교통의 기술적 조건 때문이었다. 고대세계에서 수상 교통은 육상 교통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이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되어 가면서 그리스권, 라틴권, 이집트권, 페르시아권 등 지역 간 차이는 문화적 차이에 그치게 되었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출발한 지중해문명이 서쪽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북쪽 연안의 로마와 남쪽 연안의 카르타고가 신흥세력으로 자라났다.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면서 팍스 로마나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문명이 중화제국으로 조직된 것처럼 지중해문명은 로마제국으로 조직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375년경 시작된 게르만 대이동을 통해 무너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무렵(395)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 이뤄진 사실이 주목된다. ‘-서 분열이라고 배워 왔지만, 이제 돌아보면 로마제국의 동진(東進)’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겨우 80여 년간 존재한 서로마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천년 넘게 계속된 동로마제국과 비길 것이 아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제2의 수도로 정할 때 로마제국의 동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쪽 변방에서 출발한 로마제국이 문명 중심부인 동쪽으로 옮겨가는 과정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남하해서 서쪽에 남겨진 로마제국의 껍데기를 넘겨받는 과정이 나란히 진행되었다. (북중국 일대를 516국에게 남겨주고 남진한 중화제국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미개한 게르만 부족들이 훈 족 등 더 미개한 부족들의 서진에 밀려 로마제국으로 들어왔다가 제국을 탈취하기에 이른 것으로 배워 왔다. 이것 또한 근년 인류학계의 유목세계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게르만 일부 부족이 로마에 복속한 것은 토머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말하는 내경 전략(inner frontier strategy)’과 같은 모양이다. 용병 역할로 제국에 포섭된 오랑캐가 상황 변화에 따라 왕조를 탈취하거나 정권을 세우는 것은 중국 역사에서 수없이 일어난 일인데, 이른바 게르만 대이동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렌느는 470년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되었다는 종래의 통설과 달리 게르만 여러 종족이 휩쓴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의 틀이 수백 년간 더 계속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8세기 중엽 메로빙거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랑크왕국을 비롯한 게르만 제 세력은 로마제국의 제도를 원용하고 라틴어를 비롯한 라틴문화를 고급문화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지중해 연안의 선진지역에 중심을 두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뒤에야 갈리아 내륙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지중해문명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유럽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피렌느는 보는 것이다.

 

유럽의 중세가 8세기에야 시작되었다고 보는 피렌느의 관점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에 나는 큰 관심이 없다.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에 지금까지의 통념처럼 막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느의 관점에서 지중해문명과 유럽문명의 구분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7-8세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 제해권 장악이 프랑크왕국으로 하여금 지중해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했다고 보는 점에도 함축하는 의미가 커 보인다. 내가 흉노제국을 그림자 제국으로 보는 것은 한나라가 주도하는 시대 변화에 이끌려 이뤄진 제국이라는 뜻인데, 8세기 이후의 프랑크왕국 역시 지중해문명권의 상황 변화에 떠밀려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렌느는 카롤링거 왕조를 유럽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나는 이것을 유럽문명의 출발점으로 이해한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유럽문명의 기원으로 여겨 왔지만, 그리스-로마 문명은 지중해문명의 일부였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지중해 북쪽 연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으로 인식한 것은 동쪽의 페르시아, 남쪽의 이집트와 대비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지금 유럽의 동남쪽 귀퉁이만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슬람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한 후 갈리아 등 배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키워낸 프랑크인들이 수백 년 후 본격적 문명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지중해문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러 나선 것이 르네상스였고, 그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표방하기 위해 유럽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인 것이다. 8-9세기의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때 사람들이 말하던 유럽은 로마교회의 당시 영역을 가리킨 것으로, 동로마제국도 배제하는 이 영역은 아직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지중해문명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