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고속도로로 원주 지나 제천 가는 길에 신림IC가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20분쯤 달리면 영월군 주천면 소재지에 이른다.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 지역이다.
주천에서 북쪽으로 몇 분만 가면 수주면 소재지다. 이로부터 북쪽으로 법흥사 터에 이르는 법흥리 골짜기가 수십 리 이어지는데, 그 중간 쯤에 친구 집이 있다.
친구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이건화 씨는 20년쯤 전에 바둑모임을 함께 하면서 그 모임을 통해 어울린 분이다. 그 모임(동네바둑)에는 바둑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건화 씨는 바둑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었다. 산을 엄청 좋아하는 분이다.
그래서 법흥리 골짜기에 통나무집을 손수 짓고(집 짓는 법 배우는 데만 몇 년 걸렸다고 한다.) 들어앉은 것이 16년 전이다. 공사가 끝난 뒤 같이 놀자고 바둑친구들을 초청해서 나도 갔던 것이다. 가 보니 산기슭의 마을 꼭대기에 집을 지어 놓았다. 건너편 산등성이가 건너다보이는, 아주 기분좋은 경치였다. 사치스러운 느낌의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시원하고 깨끗한, 편안한 경치였다.
나도 당시 제주도 들판에 집을 하나 사서 나름대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였지만, 이건화 씨의 자연생활은 수준이 다른 프로급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건화 씨는 '자연인', 자연 속에서 살 줄 아는 사람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지난 토요일, 주천면 금마리의 인도미술박물관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이건화 씨 생각이 났다. 그래서 무작정 그 집으로 차를 몰았다. 박물관에서 불과 20분 거리였다. 6-7년 전 한 번 들러 차 한 잔 함께 한 후 직접 연락도 없었을 뿐 아니라 소식 한 번 듣지 못하고 지내던 터였다.
그 사이에 골짜기에 펜션이 가득 들어차서 이번에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 집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개들이 우렁차게 짖어댄다. 이 친구 진도개도 엄청 좋아한다. 전에는 두 마리 있었는데 이번에는 세 마리다. 개집 중 하나는 재료 남은 걸로 지은 통나무집이다.
집 위의 덤불 속에서 뭔가 하고 있던 이건화 씨가 내려오며 외친다. "여기 막힌 길이에요!" 잘못 찾아들어온 사람으로 안 거다. 원래 새까만 얼굴인데, 지금은 도시생활 해본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 산골 영감님이다.
빙글거리고 웃으며 쳐다보고 있으니 내려오면서 뭔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아니, 저기..." 그리고는 반가운 기색으로 내 손을 잡으며 솔직하게 말한다. "아는 분인데... 잘 생각이 안 나네요."
30분쯤 앉아서 얘기 나누고 나왔다. 정착할 때는 운영하던 회사를 거의 매주 서울 나가 돌보며 지냈는데, 5년 전부터 회사도 정리하고 '생활'에만 전념하며 산다고 한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서울 가서 어머님이랑 놀아드리는 것, 이따금 해외 산행을 다니는 것 외에는 야생화 가꾸며 틀어박혀 지낸다고. 생활이 단순해지니까 옛날 일을 잘 잊어버린다고 변명도 곁들인다. 어머님 얘기를 꺼내기에 <아흔 개의 봄> 보내주고 싶다고 주소 적어달라니까 어떤 책인지 묻고, 좀 설명해 주니까 부인과 함께 재미있게 듣고, 자기 어머님은 팔팔하셔서 요양원 같은 데 생각도 않으신단다. 법흥리 들어올 때 데려온 개들이 늙어죽은 얘기 하면서 잠깐 처연한 기색을 보일 때, 정말 '자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근년 내 공부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방향이라서 그런지, 자연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우러러보였다. 문명의 혜택을 겪어보고도 거기 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자세를 배우는 사람이 많다면 이 세상이 살기에 더 좋은 곳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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