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가님께서 댓글로 올려주신 글인데, 많은 분들 관심 가져주실 만한 글이라서 본글로 옮겨놓습니다. 지나가다가님께서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향님께서 주인장 말씀대로 이쪽을 바라봐주시면서 끄덕여 주시니 글 쓸맛이 나는데요^^ 댓글을 보니, 사향님께서는 교단에 계시는 것 같은데, 예전에 <프레시안>에 밀양고 이계성 선생님이 교사들이 공부 못하는(/ 안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나네요..교사들 스스로가 학교다닐때 사회나 학교에서 요구하는 규범대로 살고, 그에 따른 보상(칭찬, 용돈 등)을 받는 체제내의 상위권, 모범생을 살다보니 그렇지 못한 공부 못하는/안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 못한다는 취지였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일본 프로야구의 대만계 스타플레이어인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 선수가 자신이 뛰었던 일류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구단에서 감독생활을 했는데, 부임초기에 선수들과 갈등이 심하고 팀 성적도 좋지 않았다 합니다. 자기는 스타플레이어로서 알아서 연습하고 경기에 임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느냐"고 질책한 것이지요..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선수들 사정은 생각은 안하고 감독이 자기만의 경험을 기반으로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여 반목하게 된 것이지요..결국은 왕정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고 나서 야인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평생을 일류로만 살아온 사람이 처음으로 낙오자가 되면서 낙오자의 비애를 몸소 알게 되었지요..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쉽게 말했던 것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뒤로는 엘리트 성적지상주의가 아니라 선수들의 마음과 사정을 이해하여 격려하고 분발하는 리더쉽으로 전환해서 다른 팀에 부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공부 못하는/ 안하는 아이들은 능력이 떨어지고, 정해진 규범을 일탈하려는 못된 아이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성적만이 인생의 절대적인 가치와 규범이 아닌 이상 학생이 관심있고 잘 할수 있는 방향으로 격려하고 조언해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각자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목적에 위배되는 것이고, 그러한 개인의 능력껏 자질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사회라고 일갈한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에 의한 영향을 받은 기독교 성경에서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를 오용하거나 방치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학생 각자가 능력과 자질이 다를텐데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를 그것도 평생이 아닌 학창시절 몇년이라는 짧은 시간대의 결과만 보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최근에 욕설파문의 주인공인 김용민씨의 아버지가 목사로서의 달란트 교육론 책을 낸 것 같더군요..신문기사를 보니, 자신의 아들들(김용민씨, 슈스케 피디인 김용범씨)은 모든 걸 잘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달란트를 적극 계발하는 식으로 가르쳤다라고 하더군요.)
영어로 "백치"를 뜻하는 "idiot"은 원래 "개인적인 일에 매몰되어서 공적인 일에 관심없는 사람"을 뜻하였습니다. 그러한 "idiot"에게 먹고 살 생계수단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고,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고 결정하게 하는 시민적 덕성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성적을 통하여 생계수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민적 덕성을 기르기 위한 교육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지능이 뛰어나건 못났건 잘생겼건 못생겼건 키가 크건 작건 일정한 예외적인 면제사유가 아닌 한 모든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에 가야하듯이 아주 특별한 제한 사유가 없는 한 공동체의 운영에 참여하고 발언할 권리/의무가 모든 대한민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진다고 해서 시민적 덕성을 함양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당연한 권리를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부당하게 박탈당하는 것이지요.."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언명에 보듯이, "성적"이라는 기준을 적용되지 않을 시민적 덕성에 적용함으로써 부정의를 유발하는 것이지요..(http://en.wikipedia.org/wiki/Idiots)
그런 면에서 저는 중고등학교에서 성적을 기준으로 장학금 주는 것을 반대합니다..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잘하는 애들이 대개 부유한 부모가 제공한 사교육이라는 자본투입효과에 기인한 만큼, 그것이 진정 장학금 제공의 본질적인 목적인 재능이 우수하고 노력을 열심히 한 학생에 대한 보상에 충실한가도 의문이고, 이 세상에 무수한 재능중에서 공부잘하는 재능만 보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도 의문입니다..공부 성적은 떨어지지만 여러가지 다양한 기준(창의성, 미래 성장가능성, 교우관계..등)을 통해서 장학금을 제공하여 지금 학업성적은 떨어지지만 다른 가능성과 재질을 보이는 학생을 격려하고 지원함으로써 미래에 사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심하게 말해서 성적 좋은 학생에 장학금 주는 것은 특히나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변호사/의사 진입비용을 낮추는 효과밖에 없습니다..그 친구들이 나중에 박원순 변호사나 안철수 교수처럼 이 사회에 공헌하는 경우라면 환영할만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백에 하나도 아니될 것이고, 대개는 정재계/행정계 엘리트 자리 차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어차피 엘리트들은 나이가 차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바뀌게 되어있는 법이고 특별하게 격려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기대소득이 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치열하게 차지하려고 경쟁하려 하므로, 그런 사람이 될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성적기준 장학금보다 앞서 말한대로 다양한 다른 기준에 의한 장학금을 주는 것이 이 사회의 복리증진을 위해서 더 나으리라 봅니다..시생이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장학금이 있었지만, 특이했던 것이 선생님들께서 십시일반해서 적금을 만들어서 담임선생님이 각반별로 1명 추천해서 매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습니다..그 액수가 등록금 면제에 해당하는 성적장학금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지만, 그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분발하도록 상당한 격려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장학금이 예외가 아니라 중심이 되는 체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적인 현실에서 성적기준을 무시할 수 없고 제 이야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함으로써 문제제기를 해야지 다음세대는 좀 더 사람다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사향님/
처음에는 사향님과 생각이 많이 달라서 제 글이 상당히 공세적이었는데, 어제도 그렇고 이렇게 제 말에 귀기울여 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요즘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성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증진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라는 말에 필이 확 꽂혀서 막 달렸습니다^^
정말 교육현장에서 고충이 적지않으리라 봅니다..저 또한 교육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제 3자적인 입장에서 어줍지않은 훈수두는 꼴이니 이렇게 쿨하게 말하는 것이지, 막상 사향님처럼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많은 한계와 벽을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아침 8시에서 밤 11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일요일에도 학교를 꼭 가서 정말 하고싶지 않은 말로만 "자율"학습을 해야 했던 때의 억울함, 아쉬움이 평소에 있었던데다가 대망의 21세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입시학습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학생, 부모님, 교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강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사향님께서도 읽어 보셧으리라 짐작됩니다만)위에서 언급한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는 미국의 사례이지만 학생들의 학습 증진을 위해서 일정한 행동(일정한 분량의 독서, 성적의 향상)에 대해서 돈을 지급한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처음 얼마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애초의 금전보상의 목적인 학생들의 자발적인 독서의욕 고취, 학습의욕/능력 고취가 학생들 스스로 하려는, 내재화동기가 작용하지 않아서, 금전보상이 사라지면 효과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금전보상이라는 수단으로 뒤바뀜으로써 교육의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고, 이것을 "부패(corruption)"라고 부르고 있지요..여기서의 "부패"라함은 어제 말한대로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제가치/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이것은 이중의 손실입니다. 사회는 능력과 자질이 있는 학생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해이고, 학생은 학생대로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실현이 아니 되어서 손해입니다..
시장주의가 발달한 미국은 금전보상이라는 긍정적인(양적인) 보상/인센티브로 학생을 인도함으로써 문제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체벌과 강압을 활용하여 미국과는 반대로 학교와 사회의 규범(이를테면 성적 기준)을 따를 때에는 부정적인 보상(체벌)의 면제라는 보상(그 양태는 다르지만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와는 상관없는 수단을 활용하여 교육으로 인도하는 메커니즘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을 통해서 학생을 인도하려 하는데, 이것은 미국식 금전보상과는 거울에 비춘 것(mirror image)처럼 방법은 반대인 것같지만 결과는 비슷합니다.
일찌기 공자께서 "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이 (그 형벌을)피하려고만 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不恥-논어 <위정>편)고 했습니다..잘못을 했으면 그에 마땅한 처벌이 있어야 하지만 그 잘못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고 외부적인 강압으로서 잘못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면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진정한 반성을 하는 "죄의식(guilty)"을 느끼기 보다는 되려 체벌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과 신체에 모욕감(shame)을 느끼고, 그러한 체벌을 통해서 자신의 외양적인 잘못은 대속(代贖)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일탈행동의 근원적인 원인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일탈행동-처벌의 강화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이지요..(위의 guilty와 shame의 구분은 제임스 길리건 著/ 이희재 譯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에서 나왔는데요, 역서에서는 shame을 "수치심"으로 번역했는데, 앞의 공자 말씀에 나오는 "치(恥)"가 어감상 죄의식/죄책감(guilty)에 가까운 것같아서 저는 "모욕감"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개그맨 김준호씨가 패러디하여 우스개 소리로 많이 활용되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의 원전인 <달콤한 인생>에서 김영철씨가 하는 말이 그 어감을 제대로 살렸다고 생각합니다^^)진정 교육의 목적이 학생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과 가치를 내재화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강압과 지시형에서 벗어나야 하고, 교총 등 보수단체에서도 더 이상 옛날과 같은 교권 운운하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수법에 더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당연하게, 느리지만 조금씩 학교현장에도 변화가 있는데, 기존체제에 익숙했던 분들에게는 웬지 모를 막연한 두려움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특히, 김상곤 경기 교육감이나 곽노현 서울 교육감이 추진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교총 등 보수단체에서 학생인권을 강조하다보니 교권의 위축이 걱정된다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얼마간 이해가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저는 우리 헌정체제가 강압적인 군사독재에서 국민의 투표/선출로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했듯이 학교현장에서도 교사라는 강력한 권위에 의해서 학생이 통제받는 체제에서 학생 스스로 자신들을 규율하는 학생 중심의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고 봅니다..
학생들이 모여서 스스로 일탈행동을 정의하고 그에 따른 벌칙을 제정하고(입법활동), 일탈행동에 대한 (검찰에 해당하는)기소기구를 만들고, 재판관, 배심원을 만들어서 그러한 일탈에 대해서 징계한다면 더 큰 계도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교사나 학교같은 외부의 권위체가 아닌 스스로의 토론/숙고 끝에 나온 규범이기에 스스로에게 준수하려는 의지가 내재화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 나이때는 교사/부모보다 더 무서운)주변 친구/동료의 경멸/압박(peer group pressure)가 크기 때문에 '부끄러움'(공자식으로 하면 '치(恥)'이고 길리건식으로 하면 "guilty"이지요)을 느껴서 더 크게 지킬 것입니다..이러한 과정에서 교사는 제 3자적 입장에서 학생들 스스로 규범이 성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사회생활의 선배로서 경험을 일러줌으로써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규범형성을 조력해주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감투를 쓰면 책임감이 커지고, 일은 직접 해보아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고충을 안다고 했으니 앞서 말한 여러 입법-행정(반장/ 부반장)-사법의 기구들은 투표제보다는 보통 한달에 한번 정도 교체되는 "추첨"에 의한 선출직으로해야 한다고 봅니다.일찌기 마키아벨리가 "투표는 귀족제적이고 추첨은 민주적이다"라고 일갈한 것처럼, 반의 임원을 선거로 뽑으면 필연적으로 학생의 학력/재력/ 평소의 인기에 따라서 엘리트가 선출되는 과두제로 될 수 밖에 없습니다..아테네 민회에서도 추첨을 통해서 행정/사법실무를 보는 임원을 선출한것을 보면, 이것이 시민적 덕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어제 "idiot"의 논의에서 보듯이 언제라도 추첨을 통해서 반의 임원이 될 수 있으니 학교/반(공동체)의 일을 알고 있어야하고, 자신이 경험해봤기 때문에 현임에 있는 친구들의 사정/어려움읆 잘 알아서 반/학교 정책 순응도도 높을 것입니다..특히 성적기준으로 임원을 뽑는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이전에 일탈행동을 했던 친구들이 임원선출의 기회가 거의 없었기때문에 아주 새로운 경험이 되면서 높은 계도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투표선출제이다"는 고정관념화된 상식에서는 생각할 수 없겠지만, 우리나라 남자면 다 가는 60만 군대에서 지난 60년간 해왔습니다^^ 훈련소에서 돌아가면서 일주일 단위로 대대장/중대장/소대장/ 각급 참모하고, 실무가서는 상병/병장/내무반장하면서 보직에 맞는 활동 다 합니다..거기에는 학력, 외모, 키, 재력, 아무껏도 안 따지고 때되면 다 돌아가며 합니다..^^ 회시같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소수의 용단과 지모가 필요한 것도 아닌, 민주주의적인 시민의 덕성을 함양해야 하는 학교에서는 "추첨"민주주의가 아주 적격이지요..마음같아서는 궁극적으로 이 나라 정치를 투표제로 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위의 추첨민주주의는 <추첨 민주주의 :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일구는 직접 정치> / 어니스트 칼렌바크, 마이클 필립스 지음 ; 손우정, 이지문 옮김 이매진 , 2011를 읽어 보세요..)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민주주의, 투표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죠..아테네 민주주의가 어쩌네 로크가 무슨말 했네를 매맞아가며 외우는 성적향상을 위한 지식암기가 아니라 스스로 몸소 체험함으로써 민주적 시민의 덕성을 체득하고 연마하는 것이지요..그러함으로써 다른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논변하기 위해서 웅변설을 배우는 것이고, 근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많은 참고서적을 찾아보면서 지식을 알아서 찾아 쌓는 것이고 , 떄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이 나올 수 있도록 반 친구들에게 유세함으로써(매수는 선생님이 막아야 하겠지만, 이것도 학생들 스스로 일탈행동으로 규정하여 통제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정치적 감각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지요..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운동을 계속 함으로써 근육을 키워 운동을 더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시민적 덕성을 키움으로써 민주주의 체제가 알차지면 이것은 다시 시민적 덕성을 더욱 함양하도록 해주는 것이지요...앞의 공자 말씀에 이어지는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체계가 잡힌다(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함이 이를 일컫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시민적 덕성의 의미, 정치의 의미, 투표의 의미를 학교에서 배우고 체득하여 사회에 내놓아야 제대로 된 투표를 하는 것이지, 그러한 고민은 없이 몽둥이 찜질로 시험공부만 하게 하고, 다른 것에는 심미적 감성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나오니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무조건 경제만 살려 달라", "강압적으로 통치해도 좋으니 세상 조용하게 해주라"하는 말이 나오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날려 버리는 것이지요..투표권을 소중하게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달라지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의 권리를 바치고 되려 노예가 되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제가 학교 다닐때 수업중에 우스개소리하다가 "참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니 (중도 보수적이랄 수 있는)제 담임선생님께서 정색하시며 "여러분! 참교육하면 얼마나 힘든데, 말처럼 쉬운줄 아느냐? 마냥 여러분한테 편한것만 아니다"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차범근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축구 대표팀 사상 초유로 대회 중도에 사퇴했는데, 들리는 말에 차범근 감독은 선수들이 잘못하면 선수를 불러서 말로써 문제점을 지적하고 스스로 그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생각하도록 했다더군요..이전에 빠다와 강압의 박모 감독에 익숙했던 선수들에게는 차감독과 대화시간이 껄끄러워 차라리 예전처럼 "떄려달라"는 말도 있었다 합니다(실제 그랬는지는 장담못합니다만 그 당시 그런 말이 돌았다는 것은 사향님도 들으셨을 것입니다^^)..차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퇴하니 국내 팬들 가운데에서도 "한국애들은 역시 박모 감독처럼 두들겨 패야 말 듣는다"라는 말이 있었지요..그뒤로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뒤에 어떘습니까?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지만, 큰 맥락에서는 박모 감독식의 강압보다는 차감독의 대화와 비체벌, 스스로 생각하는 축구였기 때문에 비록 홈어드밴티지가 작용했지만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었지요..
제가 이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적도 내야하고 학생들도 다독여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져야 하는 선생님들이 안쓰럽지만, 꿋꿋한 의지와 용기를 갖고 돌파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제 담임선생님도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때문에 체념비슷하게 참교육이 힘들다고 하셨지만(물론 그분도 끈임없이 고민하고 계셨고 어린 우리에게 과도한 낙관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겠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유보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밀고 나가기를 바랍니다..교총같은 보수단체도 전교조 등의 주장을 마냥 이상론이라 하지말고, 전략적으로 이 나라 (참)교육발전을 위해서 전교조와 연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교육예산 확대의 필요성을 홍보/설득하고(국민의 인식전환을 유도하여 낭비다 싶은 사교육비를 공교육비로 흡수하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효과를 볼 것입니다), 예산 법제를 틀어쥐고 있는 정치권에도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이러한 모습 또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산교육이라고 봅니다.
오늘도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습니다..문천님께는 객이 너무 말이 많아서 큰 실례가 되지 않을까 모를겠습니다^^너무 뜬 구름 잡는 이상론같습니다만 평소에 제가 교육계에 몸담은 분들 만나면 하고픈 말을 마음껏 해서 시원하기는 합니다^^요기까지 읽느라 수고많으셨고 감사합니다..원래 말주변 없는 사람이 주저리 주저리 길게 말한다는데 담에는 짧게 쓰는 방법을 연마해야 하겠습니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미술박물관 방문 (1) | 2012.06.12 |
---|---|
산속의 친구 (0) | 2012.06.12 |
정희 생각 (36) | 2012.05.06 |
양구 생각 (4) | 2012.05.05 |
창의적인 삶? 내가 왜 그렇게 살았지? (9) | 2012.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