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7. 01:59
어렸을 때 형들과 함께 동숭동의 서울대 교수 세 분 댁에 세배 다니던 얘기를 언젠가 적은 일이 있다. 철학과 박종홍 교수, 국문과 이희승 교수, 그리고 사학과 김상기 교수 댁이었다.
박 선생님 댁은 평소에 늘 한 집안처럼 가까이 지내는 집이고, 이희승 선생님 댁은 평소에 놀러 다니는 집은 아니라도 세배 가면 선생님, 사모님, 아드님 내외분이 모두 마음으로 반가워하는 느낌 때문에 썩 편안했다. 오직 김상기 선생님 댁만은 서먹한 느낌이 있어서 제일 끝에, 의무감을 느끼며 향하던 집이었다. 그때는 '동빈'이란 아호도 모르고 그냥 함자로 부르거나 작은형이 붙인 "네모돌이 할아버지"로 우리 사이에 통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다. 다른 두 분과 마찬가지로 이화여전에서 어머니의 선생님이었고 문리대에서 아버지와 동료였던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원래 식구가 적은, 썰렁한 집이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동빈 선생님은 어린 어리를 무척 정중하게 대하셨다. 나중에 그럴싸하게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대할 때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반 되던 해부터 세 분 댁 돌던 세배 행사를 폐했던 것 같다. 아마 큰형의 군 입대를 계기로?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 사학과로 전과해서 동빈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정년퇴직 후 학부 강의나 대학원 강의 하나씩 맡고 계셨는데, 동양사강독 교실에서 뵙게 되었다. 한문 자료 읽기에는 자신이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옮긴 말 푸는 데 감각이 꽤 있어서 잘한다는 말을 다른 데선 곧잘 들었다. 그런데 동빈 선생님은 내가 발표할 때 엄청나게 집중해서 들으시는 인상인데, 커멘트는 일체 없어서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었다.
학부 다니는 동안은 선배들과 함께 동빈 선생님 댁에 세배를 다니다가 졸업 후 대학원을 다른 데로 가면서 뵙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말 어머니에게서 받은 아버지의 일기 속에서 그 모습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 일기를 놓고 집안의 옛날 일에 관심을 키우면서 어른들께 이야기를 더 들은 것도 있다.
일단 어렸을 때의 세뱃길에서 어머니가 다른 두 집에는 우리랑 함께 가는 일이 있어도 동빈 선생 댁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부터 밝혀야겠다. 그 선생님과 어머니 사이에 원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 원한 이야기는 외삼촌께도 듣고 강신항 선생님께도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직 전쟁 중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아직 대학생이던 외삼촌에게 전사편찬위원회 사무실에 가서 김상기 선생님께 전하라고 편지를 한 장 주셨다고. 시키는 대로 전하고 읽으시는 것을 앞에 서서 보고 있자니 얼굴이 굳어지고 손이 떨리시더란다. 그 장면을 그 사무실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던 강신항 선생님도 봤다고 한다.
어머니가 옛 스승을 편지로 공박하셨던 모양이다. 동빈 선생과 아버지, 그리고 김일출 교수가 함께 쓴 동양사 교재가 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김일출 교수 월북(?)한 뒤에 인세를 동빈 선생께서 독식하셨던 것.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옛 스승께 그걸 따지고 드신 어머니가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그 난리통에 친지가 모른 체한다는 건 인세 떼이는 문제만이 아니라 신변의 안전에도 걸리는 문제일 수가 있었겠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다시 여러 해 동안 우리를 그 댁에 세배 보낸 데는 험한 시절에 험한 편지 보냈던 옛 제자가 제한적이나마 사죄를 드리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께서도 험한 시절의 얄팍한 행동에 회한을 갖고 우리를 대하셨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동빈 선생께 우리를 보내면서 두계 선생께 보내지 않으신 데도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아버지 일기에는 두 분이 다 나온다. 그런데 행간을 읽어보면 아버지께서 동빈 선생께 각별한 애정과 신뢰를 품고 계셨던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점 때문에 어머니가 더 미안한 마음을 느끼셨던 것이 아닐지.
동빈 선생은 아버지께 12년 연상, 두계 선생은 17세 연상이었다. 그런데 일기에 나오는 두계 선생 이야기를 보면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며 딱해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이 있다. 서울 점령 상황에서 혹시 평양에 가도 학자 대접을 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대목 같은 곳. 반면 동빈 선생의 시국관을 인용할 때는 "역시 투철한 분"이라는 감탄이 붙는다.
사학과에 가서도 동양사로 전공을 택한 탓도 있어서 두계 선생은 생전에 대면해서 인사드리지 못했다. 선생님들, 선배님들 이야기 속에서 그분 면모를 조금씩 들을 때가 있었는데, 학생 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는 후에 아버지 일기 속의 그분 모습과 방불한 느낌을 남긴 것이 있다. 어느어느 분과 함께 있을 때 어느 분이 하신 말씀인지 묘하게 기억이 또렷한데, 입장이 난처하실 수도 있으니 어느 분께 들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학술원장 관용차도 짚차가 나올 때였다는데, 두계 선생이 통금 시간에 걸렸다고 한다. 순경인지 헌병인지가 기사에게 말 걸고 있는 것을 선생께서 부르시고는 귓속말로 "나 이병도야." 하셨다고. 순경이 "네? 뭐라고요?" 하니까 재차 귓속말로 "나 학술원장 이병도라고."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챈 순경이 "그건 뭔지 모르니까 여기 사인이나 하고 가세요." 하더라는 이야기다.
<해방일기> 작업을 하다가 38세의 부장판사가 취중에 검문하던 군인과 옥신각신하던 끝에 총 맞아 죽은 사건을 살펴보며 그 생각이 났다. 1949년 3월의 일인데, 판사가 권총 차고 다녔다는 사실부터 희한하다. 정판사사건 판결 때린 양원일 판사 얘기다. 권력집단의 일원으로서 특권의식이 대단한 사람이었던 듯, 쎄게 나가는데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권총을 허리춤에서 빼려는 것을 칼빈으로 아랫배에 세 방 갈겨버렸다고 한다.
직접 배우지는 않았어도 할배벌 되는 선배 학자를 비명횡사한 권력형 판사와 나란히 놓는다는 게 민망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래도 그냥 떠오르니까 적어둔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그분께 세배 보내지 않은 까닭이 정확하게 뭔지 모르지만, 학문에 대한 자세가 안정되기 전에 그분과 마주치지 않은 것은 해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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