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8. 13:37
한덕수 주미대사 사임 소식을 들으며 생각나는 옛날 일들이 있다. 여러 일들이 모아지는 장면은 1967년 봄 어느 날의 고교영어경시대회 시상식이다. 내가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겪은 날이다. 하나는 학생 노릇 12년 만에 '상'이란 걸 처음 탄 일. 초등학교부터 우등상은커녕 개근상 한 번도 타본 일이 없었다. 또 하나는 역시 처음으로 '줄빳다'를 맞은 일. "죄와 벌"은 아니고 "상과 벌"의 날이었다.
서울대 언어연구소에서 개최한 영어경시대회의 제2회 대회였다. 전 해의 첫 대회에서는 한덕수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등 경기생들이 휩쓸었다. 그런데 2회 대회에서 우리 기는 죽을 쒔고, 응원 왔던 1-2년 선배들에게 줄빳다를 맞았다.
대회의 첫 날은 필기시험이었고, 거기서 커트라인을 통과한 학생들이 둘째 날 회화시험을 치렀다. 회화시험을 치러 갔을 때, 나를 잘 모르는 영어 선생님이 "김기협이가 누구야?" 찾는다. 주최측에 가서 은밀히 알아보니 필기시험에서 내가 최고 점수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작년보다 경기생들 성적이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면피는 될 수준이니 회화시험에서 분발하라는 격려가 뒤따랐다.
그러고 들어가서 인터뷰 형식의 회화시험도 잘 치렀다. 아무래도 회화 경험이 적기 때문에 경쟁자들의 추격이 예상되었지만, 내가 크게 죽쑤지 않았으니 깎여봤자 얼마나 깎였겠나 하는 느긋한 배짱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발표가 나온 걸 보니 종합점수에서 나는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독해력인가 작문인가 부문상을 받았던가? 아니, 부문상은 없고 종합 3위였던가? 오래 돼서 가물가물하다. 생전 처음 타본 상이었는데 그것까지 가물가물하다니 벌써 노인병인가?
아무튼 종합 우승은 외교관 자제인 어느 여학생이었고, 경기고는 체면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줄빳다까지 나올 일이 아닌데, 한덕수 등 1년 선배들이 너무 설친 바람에 대조가 되어 버린 거다. 그래도 좀 고소했던 것은 1년 선배들이 우리를 손봐준 다음 2년 선배들이 우리를 때리면서 1년 선배들까지 후배 지도 잘못한 죄를 물은 것이다.
그 당시 그 줄빳다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나와서 맞은 애들은 괜찮게 한 편이었다. 경기의 명성을 지키는 데 앞장선 편이기에 회화시험, 말하자면 본선에까지 나온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1년 선배들은 대개 전 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나와 있었다. 아주 못한 놈들은 안 맞고 왜 잘한 놈들이 맞아야 하나?
한참 지나고야 그 불합리의 성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티즘의 속성으로. 못하는 놈들은 관심 대상도 못 된다. 좀 하는 놈들끼리 서로 때리고 맞으면서, 격려하고 따르면서 유대감을 키우는 거다. 나처럼 맞으면서 매에 담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한 생각만 하는 놈은 그 그룹에 끼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경기에서도 굉장한 엘리트그룹에 속해 있으면서 그게 얼마나 굉장한 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자신문반이다. 경기고에서는 <Kyunggi Youth>란 제호의 영자신문을 학생 손으로 내고 있었다. 개교기념일과 졸업-입학 때 한 차례씩 타블로이드 4면인지 내는 것이었으니 별 것 아닌데, 영어 실습 기회가 적던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 학년에 세 명씩 반원을 뽑고 있었고, 지도교사가 아니라 선배들이 뽑았다. 엘리트 학교를 자랑하는 경기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서클이었다.
이광훈, 홍석현 두 친구와 함께 뽑혔을 때 나는 내가 무슨 재주로 뽑혔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어려운 자리에 뽑힌 것만 신이 났다. 1년 선배들 중엔 세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한덕수 혼자 일을 하는 감이 있었는데, 우리 기는 그럭저럭 힘을 합쳐 꾸려나가다가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90년대에 중앙일보 일 할 때 나와 홍 사장(회장) 사이의 관계를 대충 알고 묻는 사람이 있을 때, 열여섯 살 때부터 신문 함께 만들던 사이라고 대답하며 웃곤 했다.
신문반 선배가 된 한덕수는 나를 물 좋은 교외 클럽에도 끌어들여 줬다. 영어회화클럽이 유행이었는데 그중 물 좋은 곳의 하나인 HSCC였다. 여학생들과 함께 하는 클럽이 너무 신나서 참 열심히 다녔다. 몇 달 전 충남대에 강연 갔을 때 클럽 동료였던 임선희 학장을 만났더니 나를 "엄청 조용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덕수가 주미대사 그만두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 또래에게 '영어공부'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되돌아본다. 나도 한 영어 했지만 그건 목적의식 없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초딩 때 만화로 시작해서 영어를 습득한 이래 영어로 읽으면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기 때문에 영어에 익숙해진 것이다. 대부분 우리 또래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 때문에 영어공부에 내몰렸는데, 나는 입시 영어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한덕수의 영어공부도 입시에 매인 것이 아니었다. 한덕수나 내 수준에서는 영어에서 깎일 점수가 몇 점 안 됐고, 따라서 더 노력한다고 점수 올릴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나 나나 입시를 넘어 평생 활용할 '도구'로서 영어를 익힌 셈이다. 그런데 고딩 때도 한덕수가 회화에 중점을 꽤 둔 반면 나는 읽기에만 매달렸다. 우리 또래에서 그와 홍석현이 영어 회화를 제일 잘하는 사람 중에 꼽히는 반면 (유학 가서야 필요에 몰려 겨우 익힌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다.) 나는 영어 문장을 제일 잘 읽고 쓰는 사람 중에 꼽힌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지금 새삼스레 '영어공부'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해방일기> 작업을 하면서 '친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철이 없을 때도 영어의 독해에만 힘을 쓰고 회화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이 '친미'보다 '지미(知美)'에 기울었던 까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내게는 미국을 동경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능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애써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평생 영어로 이야기 나눌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1984-85 1년간의 해외 체류, 그리고 그 후 1991년까지 해마다 두어 달씩 밖으로 다닐 때가 고작이다. 학술 토론에는 큰 지장 없었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언어감각을 바짝 음미할 때가 더러 있었다. 유창하지 않은 사람이 어쩌다 맛좋은 표현을 하면 친구들이 놀라며 즐거워하곤 했다. 영어 회화는 내게 생존 수단이나 놀이개 정도였지, 무기로 구사할 수준까지 익히지는 못했다.
영어 회화를 활동의 중요한 도구로 익힌 선배와 친구들을 생각하면 학생 때부터 그쪽으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이 판단한 것이든 부모가 가르쳐준 것이든 주어져 있는 한미관계를 전제로 할 때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뛰어난 적성과 소질을 보였는데도 나 자신 그리 내키지 않았고 어머니도 전혀 권하지 않았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내 자세가 빚어져 오는 데 영어와의 관계가 하나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 것 같다. "You are what you eat."이란 말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You are what you s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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