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 좀 뜸할 때 동심의 세계로 잠깐 돌아가 본 일이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준구 교수 홈페이지에 찾아가 옛날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이 교수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났으니 52년 전의 일이다. 당시 혜화국민학교에는 우리 학년에만 학생 수가 근 1,300명이었으니 같은 반(약 100명) 하지 않고는 동급생이라도 얼굴 알기 힘들었다. 이준구 어린이는 우리 학년 최고의 천재로 날리고 있어서 나는 그의 얼굴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무명소졸인 나를 같은 반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50년 전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 집에 책 많은 것이 무척 부러웠다는 말을 그가 한다. 그렇다. 우리 집에 수백 권의 책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한 분량이었다. 서로 집도 가까워서 자주 놀러와 많이 빌려갔다. 지금 그 친구가 교양인 행세를 하는 데는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준구 어린이에게 우리 집 책이 얼마나 반가운 것이었는지는 그가 회고하는 우리의 첫 만남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 시절 일을 그가 더 많이 더 잘 기억한다. 역시 그 친구 머리가 나보다 좋은가? 그 친구 얘기를 듣고야 “아, 그랬던가?” 비로소 생각나는 일이 많다.) 상식문답 시합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준구 어린이는 지식욕을 채울 대상이 없어서 신문지만 손에 들어와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버릇이 있었고, 여러 해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상식박사’로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반에 들어온 내가 쓸 데 없는 것 많이 알기로 꽤 평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합을 붙었단다.

 

이 교수 기억으로는 그 시합이 무승부로 끝났다고 하는데, 그랬을 것 같다. 특기 분야가 서로 달랐으니까. 그 친구가 신문 붙잡고 시간 보낼 동안 나는 사전을 들여다보고 지냈다. 여섯 권인가 일곱 권인가로 된 학원사 판 <세계대백과사전>으로 기억한다. 틈만 나면 사전 펼쳐놓고 온갖 항목 찾아보는 일을 질려하는 일이 없었다.

 

이 백과사전을 내 글 읽기의 본격적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내 활자중독증은 입학 전부터 소문나 있었는데, 최소의 비용으로 그 식욕을 최대한 채워준 것이 그 사전이었다.

 

당장의 식욕만 채워줬을 뿐 아니라 영양가도 괜찮았다. 어느 날 도시에 흥미가 끌리면 도시 항목들을 찾아보고, 강에 흥미가 끌리면 강 항목들을 찾아보고... 지식의 대상에 아이템이 아니라 카테고리 단위로 접근하는 자세를 나는 그 때 익혔다. 그리고 그 때 머릿속에 그린 이 세계의 윤곽이 오랫동안 남아서 훗날 내 세계관을 세우는 발판이 되었다.

 

분량이 넉넉하고 영양가가 훌륭하다면 남은 문제는 맛, 즉 재미다. 형제들 간의 퀴즈게임이 재미를 북돋워주었다. 형들이 내 도전 상대였다. 형들에게는 다른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백과사전에 집요하게 매달린 내가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고, 2~3년 지나자 형들이 게임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퀴즈게임이 한 물 가면서 나는 정음사와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옮겨갔다. 이준구를 처음 만나던 무렵이었던 것 같고, 그도 그 책을 많이 빌려갔다. 중학교 때까지 약 5년간 그 책들과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50권씩으로 이뤄진 두 전집 속에는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철학을 위시한 각종 교양서가 들어있었다. 어른들도 읽기 쉽지 않은 책들을 그 나이에 어떻게 읽어냈는지 나중에 생각해도 스스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활자만 눈에 바른 것이었을까? 꼭 그렇지도 않다. 백 권 중에 끝내 읽어내지 못한 책이 딱 한 권 있었으니까. 제목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20세기의 지적 모험>. 그리고 <파우스트>도 무척 힘들게 읽은 기억이 난다. 힘든 걸 느꼈다면 맹탕 모르고 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절에서 지내던 어머니가 5년 전 쓰러지신 후 가까이 살펴드리게 되었다. 어머니를 꾸준히 관찰하며 지내다 보니 어머니와의 관계를 요모조모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년간의 시병일기로 작년에 낸 <아흔 개의 봄> 머리말에 “엄마 찾아 60년”이란 제목을 붙였다. 어머니의 노년 생활을 바라보며 모자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독서 환경에서 어머니의 역할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이 책 읽어라 저 책 읽어라 지시해주신 기억이 전혀 없다. 책 많이 읽으라고 닦달하신 기억도 없다. 어머니는 ‘사육’이 아니라 ‘방목’을 하셨던 것이다. 읽어서 괜찮은 책을 집에 갖춰놓고 아이들이 각자 흥미 끌리는 대로 읽게 하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는 형편이라서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교육철학이 그랬을 것도 같다.

 

한 가지 책에서는 어머니의 ‘의도’를 분명히 느낀다. 홍명희의 <林巨正>. “의형제”편 3책과 “화적”편 3책이 다락에 들어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한 동안 거기 빠져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의 내 글쓰기까지 그 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 책이 당시의 금서였음은 물론이다. 어머니는 국문학과 교수였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소장할 수 있었는데, 그 책을 연구실에 두지 않고 집 다락구석에 놓아두신 것이 ‘의도적 범행’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된 것은 수십 년 후의 일이었다.

 

1993년에 아버지의 전쟁일기를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낼 때 몇 분의 추모사를 붙여 실었는데 그중 강신항 선생님의 글에 <임꺽정> 얘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 책 읽기를 권하며 “우리말의 어휘 공부는, 이 책보다 더 좋은 교재가 없소. 열심히 읽어보시오.” 하시더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읽고 <임꺽정>을 읽은 지 30여 년 만에 비로소 깨달았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읽히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 들이대며 읽으라고 하는 대신 다락구석에 슬그머니 놓아두신 것은 반공법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역시 어머니의 교육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이 책에 빠질 수 있게 해주신 것은 어머니께 각별히 고마운 일의 하나다.

 

이 <임꺽정>이 얼마 전 다시 고개를 한 번 내밀었다. 2010년 2월 13일 강신항 선생님이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하여 요양원으로 모셔갔다. 그 날 다녀온 일을 적은 일기 끝에 이런 얘기를 붙였다.

 

아침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에 오르자마자 “도서 반납하네.” 하며 건네주신 꾸러미에도 여간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아니다. 1939년 간 <임꺽정전> 네 책. 전쟁 터지던 날 아버지가 빌려주셨던 책을 내가 대신 반납받아 달라시는 것이다. 받아는 놓았다. 그러나 곧 형들 양해를 얻어 선생님께 다시 드리고 싶다. 그분께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뻔히 아는데. (<아흔 개의 봄> 308쪽)

 

얼마 후에 도로 갖다드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