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23. 13:37
계명대학 근무가 만 3년 되던 1984년 초 보름 남짓 대만과 일본을 다녀왔다. 함께 간 동료 K 교수도 나도 첫 해외여행이었다. 나는 그 해 후반부터 1년 휴직할 예정이었으므로 교토와 타이페이에 체류할 준비를 위해서였고, 한국근대사 전공의 K는 도쿄와 교토의 향후 자료조사를 위한 정찰을 위해서였다. K는 대만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며칠 더 시간을 내서 나와 동행해 주는 김에 구경도 하겠다고 했다.
먼저 대만으로 가서 며칠 지낸 다음 K는 도쿄로 떠나고 다시 며칠 후 쿄토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혼자 대만에 남은 나는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첫 날 동해안의 화롄, 이튿날 남쪽 끝의 컨팅, 셋째날 서해안의 타이난에서 하룻밤씩 묵을 생각으로 3박 4일 여행길에 나섰다.
대만도 큰 산맥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해안이 가파르다. 특히 동북해안, 타이페이에서 화롄 사이는 거의 전 구간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터널이 하도 많아서 지하철 기분이 날 정도다. 기차여행 자체가 여간 별미가 아니다.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빈 자리가 꽤 있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펴 들고 있는데 차가 막 출발할 때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덩치가 우람한 서양 아가씨 한 패거리가 헐레벌떡 차칸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저쪽의 빈 자리에 몰려 앉는 기색을 보니 예약한 자리를 찾아 앉는 게 아닌 듯했다.
책을 보다가 밖을 내다보다가 하면서 한참 앉아 있는데 차장이 검표하러 왔다. 내 표를 찍고 지나갔던 차장이 잠시 후 내 곁에 돌아와서 머뭇댄다. 내가 쳐다보니 묻는데, 나도 알아들을 만한 질문이다. "니 숴 잉원마?" 영어 하냔 소리다. 왜 그러나 하고 고개를 들자 금세 상황 파악이 된다. 말 같은 아가씨들이 고개를 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통역이 필요한데 내가 영어책을 펼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워 숴 잉원, 커스 워 부훼이 숴 중원."(영어는 하는데 중국어를 못 해요.) 차장이 깜짝 놀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통역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옆칸까지 뒤져도 영어와 중국어를 다 하는 사람을 못 찾았는지, 내게 돌아와 그냥 개긴다. 할 수 없이 종이와 펜을 꺼내 필담을 시작했다.
문제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아가씨들은 화롄까지 가겠다는데 표는 그 중간까지만 끊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릉 갈 손님들이 원주 표를 갖고 탄 거다. 아가씨들에게 물어보니, 출발 5분 전 차표 발급이 끝난 뒤에 매표소에 도착했는데, 중간까지 가는 다음 열차 차표를 끊어주며 한 번 뛰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뛰어봤는데, 다행히 차를 잡아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어 온 표와의 차액을 아가씨들에게 받아 차장에게 넘겨주고 차장이 화롄 표로 바꿔주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차장도 무척 고마운 기색이었지만, 아가씨들은 완전 감동먹었다. 당시까지 대만의 정치사회 분위기는 한국과 큰 차이 없이 서방인들에게 불편한 것이었는데, 차표 갖고 차장과 반시간 가량 옥신각신하면서 무척 쫄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주었으니, 백마를 타지 않았어도 기사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동아시아 여행 중 현지인과(동아시아 사람) 편안하게 얘기를 나눠보는 모처럼의 기회였다는 것은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여행 계획을 들으며 정말 부러웠다. 여행의 기본 목적은 영국에서의 1년간 연수였다. 그런데 그들은 약 한 달 전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대만까지 와 있는 것이고, 다음에는 일본 구경을 한 다음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소련을(당시에는 러시아가 아니고 소련이었다!) 가로지르고 유럽을 두루두루 구경한 다음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계획이었다.
그 날은 점심 때 화롄 도착해서 오후 동안 풍광을 구경하고 저녁 후에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탈 것이라고 했다. 화롄은 대만 동해안의 가장 깊은 골짜기 어귀에 있는 도시라서 부근에 여기저기 절경이 있는 곳이다. 보통 택시를 대절해서 다니는데, 나는 혼자 그런 사치를 부릴 수도 없고, 오후에 시내 부근이나 산책하다가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 선생님들이 내게 점심 대접을 하고(내게도 이것이 서양인과의 첫 본격적 만남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차표 문제 해결을 얼마나 고마워했던 것인지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다.) 나서 택시 교섭을 부탁했다. 관광객 상대하는 택시기사들이야 영어가 대개 통하겠지만, 문화적 간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가 도와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택시기사 두엇에게 물어봤는데, 9백원을 부르기도 하고 1천원을 부르기도 했다. 가이드북에서 본 하루 대절료보다는 좀 깎아주는 값이기에 그대로 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8백원 짜리를 꼭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왜 그러냐 했더니 넷이 나누기에 쉽다는 것이었다.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기사 하나가 눈치채고 나선다. 아저씨도 같이 가지 그러냐고. 자기 차가 크고 좋은, 손님 다섯 태우는 차라서 다른 차보다 조금 더 받는다는 것이었다. 보니, 기사 옆에 기어박스가 없어서 앞줄에 두 사람이 더 탈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래서 다섯 사람이 2백원씩 내고 그 차를 쓰기로 했다. 모두들 행복해 했다. 아가씨들도, 기사도, 나도.
당시로서는 서양인의 생활방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편안하게 하루 오후 잘 돌아다녔다는 생각만 나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요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생활양식에 생각을 모으다 보니 그 날 저녁 헤어질 때의 장면이 불현듯 떠올라 이 얘기를 적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일행 중 총무나 당번이 있어서 여러 사람의 돈을 모아 기사에게 건네주는 것이 상식 아닌가. 먼저 지불한 다음 나중에 걷을 수도 있고. 긴 여행을 함께 하는 팀이라면 공동비용을 미리 얼마씩 모아둘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 각자 자기 주머니에서 2백원씩 꺼내 기사에게 직접 주는 것이었다. 하나의 팀으로서 기사와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사와 따로따로 거래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잔돈으로 2백원이 안 되어 1천원 짜리를 내고 거슬러 받겠다는 사람이 둘이었다. 둘 다 8백원씩 거슬러받아 자기 주머니에 넣어야겠는데, 여섯 사람이 갖고 있던 백원 짜리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내 몫 2백원을 내 놓고 작별 순간을 기다리던 내 눈에 참 황당한 장면이었다. 설마 설마 하다가 끝내 내가 또 나서고야 말았다. "에이미, 네 돈은 도로 넣어두고 제인한테 네 몫까지 내게 하지 그러니? 제인, 지금 6백원만 거슬러 받고 갔다가 나중에 에이미한테 2백원 받으면 안 되겠니?" 에이미와 제인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서로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고 하다가 어느 순간 기쁨에 차서 손벽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 맞아!" "어른, 넌 천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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