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5. 16:02
1981년 봄 계명대 전임강사로 자리 잡을 때까지 해외에 나가본 일 없이 국내에서만 공부를 해 왔지만, 나는 국내의 학풍이 너무 좁고 경직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국내의 중국사 전공자로는 이례적으로 서양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학교에 자리 잡고 과학사학회 간사 일을 맡으면서 외국 학자들과 편지 주고 받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영문 이름을 지었다. "Orun Kihyup Kim"으로.
1970년경에 형 둘이 다 버클리로 유학을 갔는데, 이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가서 겪은 문제를 알고 있었다. 원래 이름을 그대로 옮겨서 "Ki Bong Kim", "Ki Mok Kim"으로 했는데, 퍼스트네임이 같게 된 것이다. 미들네임이야 누가 신경 쓰나? 형제가 같은 이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고지식한 짓을 따라 하지 말고,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Orun'을 만든 것이다. 이름 불릴 때 "어른, 어른" 하는 것이 듣기 좋을 것 같았다. 부르기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고.
그런데 1985년 상반부를 케임브리지의 니덤 연구소에 가서 지내기로 결정하고 수속을 위해 편지를 주고받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니덤 박사는 1900년 생으로 당시 84세였는데, 편지 한 장을 비서 시키지 않고 자기 손으로 타이핑해서 내게 보내왔다. 내 이름의 의미를 묻는 편지였다.
한자에 빠삭한 니덤 박사는 한국 발음체계는 모르더라도 'Kihyup Kim'이 '金基協'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앞에 붙은 'Orun'이 뭐냐고 묻는 것이었다. 종교적 직책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타이틀이냐고.
그래서 답장을 쓰는데, 참 난감했다. 50세 연상의 노 학자에게 나를 보고 "어른, 어른" 불러달라고 한 셈 아닌가. 이름의 뜻과 만든 경위를 설명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던 것 같다. "I am afraid I was not thoughtful enough in deciding my name. I failed at the time to imagine that I would one day be asking an elderly person like you to call me by that name."
반년 후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연구소를 찾아가 현관에서 벨을 누르니 내 또래의 청년이(Gregory Blue) 나와서 문을 열고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You are Orun from Korea, aren't you!"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마침 커피타임이라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We have Orun here." 하고 다 아는 인물 소개하듯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니덤 영감님이 내 편지가 재미있다고 온 식구들에게 회람을 시켜서 다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본 사람들은 내 개성을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는 느낌을 가졌는지, 생전 처음 서양에 온 사람을 식구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 생활과 활동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일이다.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씩씩하고 아름다운 여인 MM과의 추억 (4) | 2011.09.07 |
---|---|
첫 해외여행 - 내 천재를 알아본 호주 아가씨들 (5) | 2011.08.23 |
강의의 어려움 (0) | 2011.07.05 |
Parce que j'etait superieur. (5) | 2011.06.22 |
룸비니, 구자명, 서중석 (4) | 2010.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