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의 공산당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른 정당과 다른 국제적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코민테른의 인증을 통해 공산당이 성립되었고, 인증의 기준은 레닌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었다. 즉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전위정당으로서 집권할 경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고 권위를 추구한다는 것이었고, 코민테른은 1국1당의 원칙을 고수했다.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20여 년간 지속된 이 관행은 당시의 상황에 맞춰 빚어진 것이었다. 공산당이 집권한 국가가 단 하나 존재했는데, 그것이 매우 거대한 국가였다. 소련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혁명의 모델이었고, 또한 지원의 본산이었다. 소련에게서 배우려는 열의와 소련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합쳐져 소련이 앞세운 코민테른의 지도가 막강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레닌의 공산당 이론은 소련 공산당의 집권 상황을 기준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많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전위정당보다 대중정당이 더 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조선, 중국, 베트남처럼 침략 대상인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목표가 민족주의와의 연대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 공산주의 세력이 미약한 나라에서는 1국1당의 원칙이 그 세력의 자유로운 발전에 멍에가 되기도 했다. 그런 문제들을 묵살하고 소련의 기준을 고집했다는 점이 코민테른의 ‘교조주의’로서 비판받기도 한다.


공산주의가 처한 상황은 1945년에 크게 변했다. 소련 자신도 참전을 통해 고립된 위치에서 벗어났고,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할 여건이 되었다. 1919년 이래 소련의 국제정책을 주도해 온 코민테른도 연합국 협력체제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1943년에 해체되어 있었다. 한 세대 전 소련의 상황이 아니라 지금의 여러 나라 상황에 맞추는 조정의 기회를 맞았다.


가장 일반적 추세는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이었다.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지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외연 확장에 나섰다. 소수파로서 투쟁하던 단계에 유지하던 전위정당의 성격이 이제 정권을 담당하는 단계에는 맞지 않게 된 것이다. 멘셰비키와의 투쟁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한 소련 공산당의 경험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공산’ 대신 ‘사회주의’, ‘민주주의’, ‘인민’, ‘노동’, ‘혁명’ 등의 이름을 새 집권 대중정당들이 가지게 되었다.


소련도 이 추세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섰다. 1946년 7월부터 일어난 조선의 좌익정당 움직임은 동유럽의 공산권 변화 추세가 소련의 권유를 통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에 실린 서용규(가명)의 증언에 따르면 7월 초 김일성과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일성은 비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원급 이상이 참가했는데 주제는 합당 문제였습니다. 합당문제는 이전에 전혀 거론된 적이 없어서 당중앙에서 일하던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회의는 실무자들이 참석하는 내부회의로 간주돼 박헌영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허가이의 보고를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허는 합당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습니다. 보고를 마친 뒤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두었습니다. 합당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습니다. (238쪽)


서용규는 7월 초 김일성과 박헌영의 이 방문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스탈린이 조선 지도자를 ‘낙점’한 계기였다는 증언도 했지만, 그 점은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합당 방침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여행 목적은 충분하다. 나는 이 방문이 박헌영과의 관계를 한 차례 정리하기 위한 김일성의 기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유럽의 변화 추세를 따라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것이 좋겠다고 김일성은 판단했을 것이고, 중국공산당의 경험과 전략에 친밀한 신민당도 쉽게 호응할 전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합당의 주체를 조선공산당 전체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남북의 공산당이 따로 합당에 나설 것인가?


‘공산당’이란 이름에는 아직도 ‘1국1당 원칙’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북의 공산당은 지난봄부터 ‘북조선공산당’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었다. 김일성에게는 이 형식적 종속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남북 별도의 합당을 원할 동기가 있었고, 박헌영에게는 반대로 남북을 아우른 합당을 원할 동기가 있었다.


서용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과 관계에 관한 많은 증언을 남겼는데, 1946년 전반기를 통해 김일성의 실력이 박헌영을 압도해 가는 과정에서 박헌영이 권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대목대목 보여준다. 공산당의 대중정당화 방침을 두 사람이 일 대 일로 토론해서는 김일성의 별도 합당 주장에 박헌영이 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소련을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토론에서라야 박헌영을 쉽게 승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매당의 관계를 가질 북조선노동당(북로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이북과 이남에서 별도로 추진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틀 속에서 북의 남에 대한 형식적 종속관계가 해소되었다. 실제로는 박헌영이 남로당의 원만한 결성에 실패하고 그 위에 미군정의 탄압이 겹쳐져 두 자매당이 서로 다른 성격과 역할을 가지게 된다.


북로당의 공식 출범은 8월 29일의 일이지만, 그 방침은 7월 말까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이남의 신문에도 8월 1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했다. (<자유신문> 1946년 8월 1일자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신민당의 견해”)


“신민-공산 양당 북조선에서 합당”

북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신발족하자는 북조선신민당 위원장 김두봉 씨의 제안에 대하여 북조선 공산당 김일성 장군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으므로 신민-공산 양당은 합동을 실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합당의 근본적 원칙은 현하 조선의 특수성과 세계 민주주의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국제적 제약성과 과도한 형식주의를 띤 ‘공산당’의 정치방식에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신민당과 공산당의 귀추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북조선노동당 신발족에 제하여 남조선신민당에서는 이를 지지한다는 담화를 이미 발표한 바 있는 만큼 동당의 의향은 능히 추정할 수 있는 바이지만 남조선노동당 출현 여부는 오로지 공산당 태도에 달렸다고 볼 수 있는 바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일자)


북로당의 합당 주체는 (북)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둘인데 남로당의 합당 주체는 공산당, 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셋이었다. 남조선신민당은 세력이 크지 않았지만 이북 신민당과의 관계 때문에 주체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로당 결성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남로당 결성 방침도 공개되었다. 이북에서 신민당의 김두봉이 제안한 것처럼 이남에서도 인민당의 여운형이 앞장서서 다른 두 당에 제안서를 보냈다. 실질적으로 공산당이 합당의 중심이 될 것이므로 적극적 태도를 다른 당에 맡기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었다. 새 당의 대표도 공산당이 양보하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관한 서용규의 증언은 이런 내용이다.


실무문제가 논의도기에 앞서 합당 후 등장할 새로운 당은 외형상 대중정당이지만 핵심은 공산당의 골격을 유지할 것임을 밝히는 몇 가지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첫째, 조직은 민주주의적 중앙집권 원칙 아래 지도되며 공산당 규약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

둘째, 당의 중심은 노동계급이 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합당과 관련된 세부사항은 남북 공산당이 각각 합당의 대상이 되는 정당과의 연합중앙위원회를 통해 논의되며 연합중앙위의 의사결정은 완전합의제로 한다는 것.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51쪽)


합당된 당이 계급정당이 아니라 노동자-농민-근로인텔리 중심의 대중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합의는 이미 되어있었습니다. 합당 자체가 당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는 급격한 공산주의화에 대한 우려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 강령도 “계급성이나 공산주의 편향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담기로 했지요. 강령에는 당의 목적을 완전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으로 하고 국-정체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로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정책으로는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 8시간 노동제, 세금제, 민주주의적 교육제도, 자주외교정책 전개를 명시하기로 했습니다. (위 책 251-252쪽)


당 지도부 구성은 합당 이후 정국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서도 대립할 가능성이 높은 문제였음에도 결론이 쉽게 내려졌습니다. 공산당 측 인물이 반드시 당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당의 대표 격인 위원장을 북에서는 조선신민당 출신을, 남쪽에서는 남조선신민당이나 인민당의 대표적인 인물을 추대하기로 했지요. 공산당 출신은 부위원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위 책 252쪽)


인용한 끝 문장을 보면 북조선공산당 상무위원회에서 이남의 합당 방법까지 의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권한을 가진 사항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일반적 원칙과 전망에 대한 토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북에서는 김두봉이 제안에 나섰다가 북로당 위원장을 맡게 되고, 이남에서는 여운형이 제안에 나섰고 후에 허헌이 신민당을 대표하다가 남로당 위원장을 맡게 된다.


인민당은 8월 2일에 중앙정무위원회를, 그리고 이튿날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3당 합당 방침을 결정하고 여운형 위원장 이름으로 합당 제안서를 공산당과 신민당에 보냈다. 공산당은 8월 5일 총비서 박헌영 명의로 수락 회답을 보냈고, 신민당은 8월 7일 중앙위원회를 거쳐 교섭에 응하기로 한다는 백남운 위원장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북조선의 2대 정당 합동 실현이 전해지고 있는 차제 남조선에서도 이에 호응하듯이 좌익 각 정당 간에 활발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작보한 바와 같거니와 2일 현재의 정세를 종합하여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전망에 도달할 수 있다. 즉 2일 오전 11시부터 광화문 본부사무소에서 중앙정무위원회를 긴급 소집한 조선인민당에서는 당수 呂運亨 명의로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에 대하여 3당 합동에 대한 제의를 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에 대하여 공산·신민 양당에서는 금명간으로 가부의 회답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합당에 관한 의견이 상호 일치되는 경우에는 3당의 정식대표가 일당에 회집하여 최후적 결정을 하리라는 바 그 시일은 2·3일내로 실현될 것으로 관측된다. 더욱 측문하건대 신당명은 그 정치적 강령과 민족적 혁명과업에 비추어 북조선노동당과 동일한 노선에서 역시 남조선노동당으로 결정되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일반의 난관시하는 당수 문제도 용이하게 합의될 것으로 예측되는바 남조선에 있어서의 좌익삼당의 합동은 수일 내로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946. 8. 3일자)


좌익 삼정당 합당문제를 싸고 인민당 공산당 신민당에서는 근래에 보지 못하던 활기를 띄고 있는데 인민당에서는 3일 중앙집행위원회를 張建相 사회로 개최하고 합당에 관한 최후적 토의를 한 결과 만장일치로 합당을 결의하고 합당교섭위원으로 呂運亨 張建相 李萬珪 李如星 金世鎔 金午星 宋乙秀 辛鐵 都宥浩 9씨를 선정하는 동시에 신민당과 공산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한 바 있었는데 금 5일에는 공산당중앙위원회총비서 朴憲永의 명의로 삼당합동에 대한 인민당의 제의를 전면적으로 수락한다는 회답문을 인민당당수 呂運亨에게 교부하였으며 신민당에서도 이를 찬동하여 합동하기를 결정하고 2·3일내로 회답문을 교부하기로 결정하여 이로서 합동문제도 일단락을 진 것으로 관측된다.


◊ 인민당 제안문 요지

(략)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인테리 등 모든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신민당 공산당 인민당의 합동은 조선민족 통일의 기초를 구축하고 민주진영의 주도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민당 중앙위원회는 신민당 중앙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3개당을 일대정당으로 통일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서기1946년 8월 3일 조선인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呂運亨


◊ 공산당 회답문

(략) 북조선에서는 민주주의당의 합동을 우리는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며 또한 남조선에서도 근로대중의 생활의 급진적 향상과 민주주의개혁의 실시와 완전자주독립의 완수를 위한 투쟁의 전면적 강행 발전을 목적하고 인민당 공산당 및 신민당을 한 당으로 합동함이 필요하다는 옳은 결론을 갖게 된 것은 민주건국을 위하여 경하하는 바이다. 이 때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3당 합동에 대한 인민당의 제의를 승낙하며 접수하는 합동에 대한 교섭을 개시하기를 선언한다.

1946년 8월 4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朴憲永

(<조선일보>·<서울신문> 1946. 8. 6일자)


3일 인민당으로부터 제의한 3당 합동에 관한 제안문에 대하여 남조선신민당중앙위원회에서는 신중 토의한 결과 남조선의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인테리겐차 등등의 근로대중의 권익을 대표하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은 합동함으로써 민주역량을 총집결할 수 있는 것이며 민주독립을 위한 해방정치의 기동성을 일층 덜 발휘할만한 구체적 조건을 구유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합당제안에 원칙적으로 찬동하기로 결정하고 동당위원장 白南雲은 7일 3당 합동문제에 구체화하는 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선언문을 인민당 呂運亨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서울신문> 1946. 8. 8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