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야기한 유림의 독립노농당(노농당)이 당시 상당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래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한국민주당 서울시당부 柳葉 李東俊 金泰民 朴世煥 제씨를 비롯한 127명의 당원은 얼마 전 한민당을 탈퇴하였던 바 독립노동당에 가입키로 되었다.

◊ 한민당 총무 白寬洙 담: 우리 당으로서는 무어라 말할 것이 없다. 柳葉이 탈당한 후 독립노동당 외교부장에 취임된다고 인사를 왔으므로 알았다. 우리 당에 있을 때는 임원이 아니었으며 모두 건국을 위한 것이라면 앞으로의 발전을 빌 뿐이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8월 6일, 14일자)


노농당 창당 움직임은 5월 초순에 일어나 7월 7일에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이 한독당과 통합하면서 진보적 우익정당의 필요에 노농당이 부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의 백관수 논평이 어느 시점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 못했는데, 8월 5일 한민당 서울시당부 성명서는 백관수의 논평처럼 점잖은 것이 아니었다. 민심의 이반에 한민당이 초조해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8월 15일부 柳葉 외 수 명이 연명으로 소위 탈당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일소에 부쳐 새삼스러이 논평할 필요조차 없다. 원래 柳葉 외 수 명은 전부터 반당행위를 한 탓으로 7월 16일에 제명처분을 받았고 1개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 기 개인의 반동 탈락자와 연서하여 사실무근의 허구적 사실 급 숫자로써 악질모략 성명을 하는 것은 일종의 낙오라 하겠다.

특히 본 시당부 간부로서 탈당성명에 연서한 사람의 거개는 장구한 동안 반당적 행위를 해온 탓으로 8월 5일 하오 1시 본 시당부 임시집행위원회에서 간부의 직을 박탈당하였음을 언명한다. 본당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임을 확인하여 둔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8일자)


한민당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는 정당이었나 보다. 아니, 주먹을 중시하는 정당이었나 보다.


“정치테러사건 또 발생 - 한민당 탈퇴한 이동준 씨 봉변”

8일 새벽에 청년 10여 명을 태운 트럭이 독립노동당 경리부 차장 이동준 씨 집을 습격하였다는데, 이에 대하여 그 당 선전부장 양일동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당 경리부 차장 이동준 씨가 8일 새벽 10여 명의 청년에게 트럭으로 습격을 받아 한민당 훈련부에 감금을 당하고 무수히 구타를 당하여 전치 2주일을 요하는 부상을 입은 끝에 전자에 한민당 탈당에 제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잘못하였다는 사과장에 도장을 찍고 겨우 놓여나왔다. 우리는 그가 한민당 당원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테러를 근절하려는 이때에 실로 유감된 일이어서 사회에 호소하는 바이다.”

한민당 선전부 함상훈 씨 담: “그러한 말이 전하기에 알아봤더니 지난 번 악질적 성명서가 돌아다녀서 연서한 17명이 모두 모른다 하므로 이동준 씨에게서 성명서에 한 것을 모른다는 데 서명을 받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구타를 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자유신문> 1946년 8월 10일자)


유림과 노농당에 사람이 많이 모였고, 그래서 정계 동향도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 인용한 유림의 8월 4일 담화문에서 좌익의 과제가 “합당보다 청당(淸黨)”이라고 한 주장도 예민한 동향 파악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내부 문제가 드디어 터져 나왔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대한민국사”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6년 08월 07일, 08일”로 표시된 기사로 8월 4일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불만을 가진 6인이(서중석, 김철수, 강진, 이정윤, 김근, 문갑송) 이튿날 발표한 성명서를 보도한 것이 있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서는 이 기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고 내용이 길기 때문에 여기 옮겨놓지 않는다.


이 성명서는 3당 합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중대한 일 앞에서 박헌영 일파의 파벌적 전횡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 박헌영 일파의 “트로츠키 경향”을 비판하고 그들의 전횡이 당내를 넘어 우당(友黨)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당원 동지들의 의견을 대담하게 표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제부터의 갈등 속에서 ‘간부파’로 불리게 될 박헌영 일파는 즉각 반발했다. ‘대회파’로 불리게 될 간부 6인의 처벌을 위해 사흘 만에 다시 열린 중앙위원회의 진행을 박헌영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중앙위원회를 7일에 긴급 소집하여 그 동무들의 출석을 구하였으나, 그 동무들은 대표로 이정윤, 문갑송 동무만이 나왔었습니다. (...) 이정윤 동무는 자기들의 주장과 태도는 끝까지 정당하므로 필연적으로 현 중앙과 싸우겠다는 것을 말하였고 (...) 문갑송 동무는 어느 정도 자기 반성의 빛을 보이므로, 이정윤 동무는 눈물을 머금고 출당 처분을 내렸고, 문갑송 동무는 하루빨리 그 잘못을 청산하여 함께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반성의 여유를 주기 위하여 정권 처분을 하였으며, 그 외 동무들은 회의에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일단 이정윤 동무를 XX(판독곤란)나린 다음 다시 개인적으로 충분히 의견을 들어서 적당한 조치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합당과 반당분자에 대하여”, <건국> 1946. 8. 24,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59-360쪽에서 재인용)


8월 7일 중앙위원회의 결정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우 6인의 명의로써 발표한 1946년 8월 5일부 “합당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이라는 반당 문서를 발표한 행동과 그 내용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좌와 여히 결정함.

우 6인은 당 규율을 유린하고, 당의 조직을 파괴하고, 당의 지도동지들에 대한 허위중상으로 대중과 반동진영에 당의 위신 타락을 기도하고, 당기관지 청년해방일보의 명의를 그 분열행동에 이용코자 도용하였고, 1946년 8월 4일 중앙위원회 회의의 당의 최고비밀을 반동진영에 고의적으로 누설하고 그 결의를 허위 주작하여 규약 제55조 및 제9조에 의하여 일체 당기관 책임으로부터 해임하는 동시에, 이정윤은 당적으로부터 제명하고, 기타 5인은 무기 정권을 결정하여, 이에 전 당원과 각급 기관에 통고함. (<건국> 1946. 8. 18,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60쪽에서 재인용)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 대회파 6인의 회견 기사가 실렸다. 공산당의 분란에 관해 <자유신문>에 비해 <동아일보> 기사가 훨씬 많고 소상하다. 8월 13일자에는 제1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특집기사까지 올렸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느낌까지 든다. 10일자 기사는 이런 것이었다.


“당규에 위반된 처사 - 소위 정권(停權) 희극에 조공 6씨 담”

좌익 합당을 계기하여 당내 성명을 발표한 공산당 중앙위원 강진, 서중석 씨 외 4인에 대하여 대표 박헌영 씨의 담화와 제명 및 정권 처분은 기보와 같거니와 이에 대하여 전기 6씨는 9일 다음과 같은 1문1답을 하였다.

(문) 박헌영 씨의 정권 처분 발표에 대하여.

(답) 이는 당 규약은 물론 외국 당의 전례에도 없는 연극이다. 다만 보수주의적 일파중심주의를 완강히 관철하려는 데 불과하다. 민주주의적 발전의 비약은 각당 자색주의와 소그룹을 철저히 청산 않고는 장래할 합동당에도 큰 지장이 될 것은 과거 1년간의 쓰라린 경험에서 명백히 증명된다. 소위 정권이란 희극은 콤그룹의 철쇄에서 해방된 데 불과하고 금후 콤그룹은 전당군중에서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 십수년간 지하에서 혹은 감옥에서 혁명적 투쟁을 하여온 자들이다.

(문) 어떤 조직이라도 가졌는가.

(답) 없다. 우리 6인은 소위 콤그룹 몇 개 친우들이 당 조직을 악용하여 협소한 보수주의와 종파주의로 유래된 당 사업의 마비화 분파성을 해소치 않고 조장하는 조직 경향에 반대한다. 우리는 최고기관을 조직할 의사도 없다. 다만 당원 대중이 요망하는 자색 편파성을 배제하여 대중의 위력으로 분쇄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세력의 집성인 합당의 활약적 발전 실천에 적극 참가하려 하며 여하한 토의 집회에도 우리는 참가하여 토론 질문에 응할 용의가 있다.

(문) 당 대회 요구의 필요는 없는가.

(답) 완고한 일파주의를 당내나 우당에 강요하는 한 민주세력 집결은 불가능하다. 일개분X일파로서 당이나 모든 단체를 전횡 운영하려고 운동의 발전을 마비 저해시키고 있음은 결과에 있어 이적행위며 합당 장해물이다. 여사한 배타적 종파성 청산을 위하여 당 군중의 최후적 해결책으로 당 대회(혹은 대표자대회)를 요구한다. 여기서만 당은 통일될 수 있고 합동당도 건전할 발전을 기할 수 있다.


대회파로 나선 6인은 당대 공산 진영의 쟁쟁한 인물이요, 투사들이었다. 박헌영이 장악한 중앙위원회에 들러리로라도 앉히지 않을 수 없던 중진들이었다. 그중 가장 원로였던 김철수(1893-1986)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잠깐 살펴보겠다.


전북 부안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1912-16년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후 몇 해 동안 상해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귀국,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이 되었고, 1926년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후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9년 제3차 및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당이 와해된 후 당 재건에 진력하다가 이듬해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 출감하였으나 1940년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 때 풀려나왔다.


해방 당시 공산주의자 중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인물이면서 박헌영의 지도력을 인정해 준 것이 박의 득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구술자료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감옥에서 가만히 살면서 보니까 박헌영파(경성콤그룹)만 잡혀와. (공산당) 재건운동하다가 잡혀온 것이야. 자꾸 잡혀 와. 우리 파(서울상해 합동파)는, 말을 들으니까 이권운동이야. 양조업도 하고, 정미업도 하고, 뭐 그런 거 저런 거 모두 직업을 얻어가지고, 왜놈한테 얻어서, 아쉬운 소리 하고, (운동 일선에서) 딱 떨어져버려. 박헌영파가 재건운동하다가 자꾸 잡혀와. 그걸 보고 감옥에서, 내가 양심적으로 아무래도 박헌영을 (지도자로) 내세워야지(라고 생각했어.) (김철수, “구술자료 - 정진석 소장본” <지운 김철수> 243쪽,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198쪽에서 재인용)


와세다대학 출신에 14년 가까운 투옥, 최고의 ‘스펙’을 갖고도 자신이 나서기보다 열심히 일할 사람을 밀어주는 것이 해방 당시 50대 초반이던 김철수의 자세였다. 그런 그가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박헌영은 당권 정지와 출당으로 응했다. 공산당에서 나온 김철수는 여운형의 사회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사회노동당이 해산하고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다시 정치에 나서지 않았다.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 30여 년간 궁핍 속에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