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발표된 인민당의 3당 합당 제안에 대해 당일로 한민당의 논평이 나왔다.


한국민주당 선전부에서는 기자단 정례회견 석상에서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신발족한데 대하여 이것은 국제공산당이 표면상 해체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 조선에서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는 인망을 집중할 수 없음을 간취한 증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한민당에서는 남조선에 있어서 공산당과 신민당은 합당하게 될 것이나 그 외의 당과의 합당은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3일자)


공산당과 인민당의 합당에 마찰이 있으리라는 한민당의 관측은 당시까지 두 당 사이, 그리고 박헌영과 여운형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관측은 적중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도 순탄치 못했다. 심지어 공산당 자체도 엄청난 내홍을 겪는다. 그 과정은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아무튼 한민당의 이 논평은 ‘관측’에 그치는 것으로, 적극적 비판은 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뜻밖의 방향에서 강렬한 비판이 튀어나왔다. 임정 국무위원 출신으로 7월에 발족한 독립노농당을 이끌고 있던 유림의 담화였다.


“금반 3당 합동 문제가 대두케 된 근본이유는 공산당을 중추로 하는 적색노선이 갈 바를 잃고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게 된 데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들의 과거에 범한 갖은 과오와 죄상으로 인한 대중과 고립을 수습하는 동시에 공산당 내부에 모순당착에 염증을 일으킨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의 공산당 정화운동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3당 합동의 주도력은 어디까지든지 공산당일 것이며 그 중에서도 자기비판 위에 선 공산주의자일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탈선적 행동을 뉘우치며 새로이 자기 정리를 하려는 공산당의 고충은 짐작할 수 있으나 결국 모략책을 작위하는 데 불과하다.

합동을 운위하고 있으나 공산당이 좌경 계열의 인민 신민 양당과 합동하여 해소된다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상식상으로도 이해키 어려운 일이다.

자당에 대한 불신을 회피하며 합동이라는 미명하에 일시 잠복하였다가 적당한 시기에 재현할 저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합동 시기는 이미 늦어버린 이상 차라리 합동이란 작희를 중지하고 지금까지의 과오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조선이 실정에 적합한 공산당 재조직을 꾀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4일자)


오늘은 상황 진행의 설명을 좀 접어놓고 유림(1894-1961)이란 인물을 좀 들여다봐야겠다. ‘합당(合黨)’보다 ‘청당(淸黨)’이 좌익의 과제라는 그의 화끈한 비판은 어떤 각도에서 나온 것인가, 비판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위 담화와 같은 주장이 품은 진짜 의미를 이해할 여지가 크다.


좌익인지 우익인지 정말 잘라 말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사람이다. 1942년 중경으로 가서 임정에 참여하고 1944년 4월 국무위원에 취임할 때 그의 소속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정부주의’가 잘못된 용어라고 주장했다.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anarchism)이란 그리스말을 일본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은데, 본래 ‘an’은 없다는 뜻이고 ‘archi’는 우두머리-강제권-전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heter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지, 자율정부(aut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사상면에서 큰 공헌을 하면서도 현실면에서는 패배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현실적 조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나 역시 아름다운 꿈을 안고 임시정부라는 조직에 참가한 것이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5일자.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선인 펴냄) 272쪽에서 재인용)


김재명은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이란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아 오지 못한 9인의 정치가를 부각시켰다. 중도파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해방일기> 작업에 좋은 출발점 역할을 해준 책인데, 그중에서도 유림에 관한 설명이 특히 고맙다. 통상적 기준으로 입장을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를 공산주의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로 보았다. 이론이 단순명쾌하다는 점에서 더 과격한 사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나키즘을 표방한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은(좌우를 구분하는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아주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었다. 유림은 사회적 변혁의 필요성에는 어느 좌익 못지않게 공감하면서도 신탁통치를 반대함에는 어느 우익보다 철저했다. 그는 해방공간을 통해 반탁운동 등 우익의 대열 속에 자리를 지켰지만, 좌익의 책략적 행태와 우익의 비민주적 행태를 똑같이 비판했다.


1946년 1월 하순 김원봉, 성주식, 장건상 등 일부 임정 요인들이 비상정치회의에 독촉이 합류해 비상국민회의로 선회하는 데 반발, 탈퇴할 때 유림도 일시 회의 참석을 거부하며 항의했다. 결국 비상국민회의에 남기는 했지만 1월 28일 기자들에게 입장을 밝힌 내용을 보면 이승만이 그를 민주의원 28인에서 어떻게든 빼려고 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임정은 입국 전부터 전 민족의 총의를 집결시킬 수 있는 전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열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헌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아서 선거권 피선권이 규정되지 못한 이 때 인민대표를 소집하여 국민대회를 열 수 없으므로 우선 해내외의 민족적 양심분자를 될 수 있는 대로 총망라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긴급대책 14조 중 제6항에도 그것을 표시해 있는데 이번 개최하려던 비상정치회의의 의도는 이에 준하였던 것이고, 자기도 그런 것으로 확신하고 출석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3당 측(한민, 국민, 신한민)에서 이승만 씨가 주재하던 중협을 합류시키자는 발론이 있고 동시에 회의의 이름을 비상국민회의로 고치자고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중협은 하등의 정치단체가 아니니 합류 여부가 없는 것이고 회의 명칭의 변경은 스스로 회의의 성질까지를 왜곡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국민을 참칭할 수 없다. (<자유신문> 1946년 1월 29일자)


<자유신문>은 3월 26일자에 유림의 “시국담”을 실었다. 우익 진영에서 소외되어 칩거하고 있던 인물의 견해를 크게 보도한 것은 그 시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나는 오사이 도무지 외출을 아니한다. 큰 기대리에 입국한 ‘임정’은 ‘임정’ 자신이 소멸시켜 없어지고 해외에서 약속한 혁명자대회는 비상정치회의로서 소집하려다가 중도에 비상국민회의로 탈락하여 억지로 국민회의라는 명칭을 걸었다가 소위 최고국무위원회 위원의 인수와 인선을 이승만 김구 양씨에게 전임(專任)한다는 불법을 감행하였다. 당시 나는 절대반대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나의 반대는 성립되지 못하였다.

당시 비상국민회의에서 발표함과 같이 ‘임시정부’ 수립의 최고 임무를 자부한 최고국무회의는 다시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을 조직한 것은 법리상으로나 정치상으로 모순이요 과오이다. 그 잘못한 일의 결과는 금일 여러분이 보는 것과 같이 유명무실의 간판만이 있다. 현재 우익 진영은 총 붕괴다. 원래 정치 협잡성을 띠고는 실패하는 법이다.


김재명의 정리에 따르면 유림은 안동 대지주 출신으로 3-1운동 후 가산을 정리, 만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고, 1920년 말경 북경으로 가서 신채호, 김창숙 등과 함께 잡지 <천고(天鼓)> 편집에 참여했다. 1922-1926년 성도(成都)대학에서 수학한 후 정의부, 신민부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10월 봉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1937년 다시 만주로 탈출해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여름 중경으로 가서 임정에 참여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 273-288쪽)


유림이 남긴 논설을 보면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하는” 풍조에 엄격하게 반대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 1946년 봄부터 독촉국민회를 통해 이승만과 밀착관계에 있던 신익희가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후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의 합류를 청할 때의 일화에서도 그런 면모가 보인다.


“단주(旦洲, 유림의 아호), 우리는 과거 친한 동지 사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한 사이 아닌가? 이제부터 같이 힘을 합쳐 독재자의 손길에서 구민(救民)운동을 해보세.”

“그래 해공(海公, 신익희의 아호)!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내가 이승만의 첩하고 타협을 해? 차라리 구국타협이라면 이승만하고 하지.”

“단주, 과거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용서하시게.”

“과거는 동지고 팥죽이고 간에 기생첩과 같은 사람과 타협할 수 없네.”

(<한국현대사의 비극> 303-304쪽)


정치적 성장의 기회도 그런 식으로 날려버렸다. 1946년 7월 초에 결성된 독립노농당은 아무 자금력도 없는 아나키스트 유림의 명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당 같은데, 상당한 세력이 결집되었던 모양이다. 이 당은 1948년 5월의 남한 단선을 거부했는데, 상당수 당원이 무소속이나 다른 사회단체 명의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립노농당은 그런 당원 5인을 제명해 버렸다. (위 책 301쪽)


잘못된 선거에 정당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다른 길로 그 선거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념을 함께 하는 동지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비타협적이란 평을 많이 듣는 내가 봐도 너무했다. 아들이 일본군 장교를 지냈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안 보여줬다는 양반이니... 아무튼 제헌선거에서 교섭단체를 만들 만한 실력으로 평가되던 독립노농당은 그 이후 몰락해 버렸다. 유림 본인도 1950년, 1958년, 1960년 세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했다.


8월 4일의 담화에서 유림이 “자기비판 위에 선 공산주의자”와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 기대를 보이는 대목에 생각이 머문다. 그는 민족주의 진영을 지키면서 민족주의를 빙자한 “협잡”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좌익 진영의 탈선적 행동과 모략책을 비판하면서도 진정한 공산주의의 역할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처럼 원칙에 충실한 노선을 포용할 공간이 해방공간에 없었다는 사실이 아쉽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