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오후에 종암예배당에서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 결성식이 열렸다. 이승만, 정인보, 김성수, 이극로 등이 내빈으로 참석했다는 이 결성식에서 고려대학의 이철승이 대표의장으로, 서울대학의 채만식과 유학생동맹의 박용만이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연합국에 보내는 이런 내용의 메시지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존경하는 연합국 지도자 여러분! 당신들의 위대한 승리는 우리 조국을 해방하여 주었으므로 무한한 감사를 표하나이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벌써 한 해가 지나건만 당신들이 공약한 조선의 임시정부는 아직까지 세워지지 못하고 또 38선의 장벽은 갈수록 굳어져 조선은 지금 독립의 광영은 그만두고 도리어 멸망의 비극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조선 백만 학도들은 지금 굳센 단결로써 총기립하였습니다. 조선의 해방자인 연합국 민족 여러분! 당신들이 우리에게 와 세계에 공약한 조선의 독립이 하루바삐 실현하도록 힘써 도와주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일자)


“멸망의 비극”이 누구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일까? 밝혀 말하지 않았지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연합국에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연합국 책임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책임이 조선인에게 있다는 것인데, 누워서 침을 뱉으며 자기 얼굴에는 말고 옆 사람 얼굴에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격이다.


1년간의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해진 생각이 있다. 민족 분단의 책임이 민족 내부에 있느냐 외부에 있느냐 따지는 내인론과 외인론의 대립이 있어 왔는데, 나는 이제 확고하게 외인론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개인에게 잘못된 일이 있을 때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느냐, 외부에서 찾느냐 하는 것도 내인론과 외인론의 한 틀이다. ‘남 탓’ 하기보다 ‘내 탓’ 하는 편이 도덕적으로 나은 태도로 대개 인식된다. 자기 보호의 본능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공자 평전>(안핑 친 지음, 돌베개 펴냄)을 번역하다가 안회와 자공을 비교한 대목에서 소감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노나라 임금이 제자 중 배우기 좋아하는 자를 묻자 공자는 안회가 죽은 후 그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그처럼 배우기를 좋아한 사람이 다시없었음을 말했다.

"안회는 다른 이에게 노여움을 옮기는 일이 없었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회에 대한 공자 최고의 찬사였다. 주석에는 "갑에게 노여운 마음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다"고 풀이했는데, 그 '갑'이란 것이 노상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먼저 찾으니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공 같으면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자기 허물에 아주 눈을 감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또는 여건에 잘못된 점이 없는지도 열심히 살폈을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만 돌아보는 안회보다 인격 도야에는 뒤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위해 잘 공헌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왜 욕을 먹는가?”)


자공은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어 둘을 아는 정도”라며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 말에 공자도 "네가 못하지. 너나 나나 안회만은 못하지." 화답했다. 그러면 자공과 공자가 정말 안회보다 못한 사람들이었을까?


안회가 공자에게 상징적 존재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내면을 파고드는 탐구심의 상징. 그 탐구심을 학문의 원리로 여겼기 때문에 안회를 치켜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 자신은 학문의 원리만 아니라 행동의 원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못하다”고 한 표현은 “같지 않다(不如)”였다. 자신을 낮추는 듯한 표현이지만, 사실은 길이 서로 다름을 말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상식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자기반성을 할 줄 모르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은 사회에 대해 파괴적 행동을 하는 반(反)사회적 인간이 되기 쉽다. 반면에 내 탓만 하며 세상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파괴적 행동을 하는 비(非)사회적 인간이 되기 쉽다. 안회는 비사회적 인간의 전형이다. 공자와 자공은 그 자기반성 능력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는, 보다 균형 잡힌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도 개인과 마찬가지다. 내부 문제에 눈감고 남 탓만 하는 사회는 파탄의 길을 걷기 쉽다. 한편 내 탓에 빠져 외부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회도 올바른 발전의 길을 찾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남 탓’보다 ‘내 탓’에 너무 치우쳐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인 침략자들이 조선의 역사와 민족성을 폄훼하는 데서 우리 사회의 열등감이 시작된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에도 이 열등감이 계속되어 온 사실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열등감이 어떤 문제를 일으켜 왔는가? 비사회적 인간이 정치적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문제다. 한국 사회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체제에 순응하려는 경향만을 보여 왔다. 냉전체제든, 신자유주의 체제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노력을 거의 보이지 않아 왔다.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문제 역시 자신감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인이 심어준 열등감을 확대재생산해 온 것이 한국 사회에서 극우파의 역할이었다. 해방공간의 극우파는 민족통일전선 성립을 반대하며 외세에 의존하려는 입장이었다. 극우파는 그 후에도 내부 문제의 자체 해결을 외면하고 ‘혈맹’ 미국에 의존하는 자세를 지속했다. 그 입장을 편하게 하기 위해 우리 민족에게 자체 해결능력이 없다는 관념을 키워온 것이다.


전국학련 결성식의 메시지로 돌아가 보자. 그 작성자는 조선이 “멸망의 비극”에 처해 있다고 진심으로 믿은 것일까? 미소공위가 중단되어 있었지만, 그 재개를 바라는 좌우합작 회담이 막 시작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극우파는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한다고 떠들어댈 때였다. 신탁통치에 떨어질 위험을 “멸망의 비극”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뭔가 의도를 가진 레토릭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기존의 미소 협력체제를 깨뜨리는 의도였고, 내부적으로는 마녀사냥의 발판을 닦으려는 의도였다. 소련의 비협조로 미소공위가 실패했으니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주장이었고, 좌익의 발호로 엄청난 위기가 닥쳤으니 극렬 투쟁에 나서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의도들은 이후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관철되었다.


1947년 가을 충주중학에 입학한 유종호가 입학 얼마 후 겪은 일을 회고로 남긴 것이 있다. 전국학련이 방방곡곡의 학창 분위기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학교에서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학생연맹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학련의 간부 회의를 열 일이 생겨서 중학교의 간부 몇 사람이 여학교를 찾아갔다. 그들은 여학교의 학련 대표를 만나고자 했으나 수업 중이었다. 그들은 수업 중인 교실로 가서 노크를 하고 교사에게 여학교 대표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교사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학련 간부는 중요한 학련 회의가 있는데 여학교 대표가 꼭 참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사는 학생에게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니 수업이 끝난 후에 만나라고 응수하였다. 몇 번 더 옥신각신이 있은 뒤 학생들은 교사를 숙직실 쪽으로 끌고 가서 장작개비로 마구 구타하였다. (...) 학생들은 보나마나 학련 활동을 방해하는 교사가 좌익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했을 터였다.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펴냄) 248-249쪽)


류상영은 해방공간에서 우익 청년단체의 역할을 이렇게 요약했다. 해방공간에서 형성된 그 역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익 청년단체는 주요 정치지도자의 귀국과 반탁운동의 전개과정에 급속히 조직을 확대하고 대중적 지지기반을 만회하면서 대 좌익 실력투쟁을 전면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일 정치조직에 의해 통일적으로 지도된 것이 아니라 주요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노선 분열에 따라 복잡하게 이합집산되어갔다. 주로 좌익 정치조직에 대한 파괴와 인민항쟁에 대한 진압과정을 통해 지방조직을 확대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군-경찰과의 합동작전을 전개하는 등 공식적-조직적 협력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결국 우익 청년단체의 확대과정은 극우 청년단체의 헤게모니 장악과정임과 동시에 단정세력에 의한 분단국가 형성과정이었다.

8-15 이후 좌-우익 청년단체의 좌우대립과 정치활동은 우익 청년단체와 단정세력에 의한 분단국가 형성으로 일단락되었고, 우익 청년단체원들은 현재까지도 분단의 확대재생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분단국가 내에서 의식적으로 좌-우 이념 대립의 구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극우 파시즘의 기반을 조성하고 분단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극우 사회단체들은 그 조직이나 성격에 있어서 이미 8-15 이후 우익 청년단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4> 수록 “8-15 이후 좌-우익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100쪽)


내인론과 외인론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다. 해방 후 1년간 소련군 점령지역보다 미군 점령지역이 훨씬 더 심한 정치적-사회적 격동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고 그 정책에 불안정하고 부적절한 것이 많았다는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일본에 의지하듯 미국에 의지하며 민족 문제의 주체적 해결을 외면하는 세력이 득세했다.


이 세력은 대결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 극우파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극우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극우파의 종속적 존재일 뿐, 고유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정통 극우파라 할 수도 없다. 민족주의 이념을 갖지 못하는 것이 극우파다운 극우파도 되지 못하는 단적인 문제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매판세력일 뿐이다.


이 세력이 대한민국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분단 지배 상황이 이뤄지는 데 미국의 작용이 컸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동기가 대한민국 지배세력에게 있었다. 그래서 교육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분단 원인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다는 내인론을 선전해 왔다.


그 선전의 성과인 민족 열등감은 독재체제 유지에도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군사독재도 자본독재도 마찬가지다. 냉전 시대에는 군사독재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자본독재가 매판체제로 더 적합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