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있었던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 탄압은 미군정의 양해 하에 경찰이 앞장섰던 일로 생각된다. 두 단체가 치안과 질서를 명분으로 경찰과 경쟁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정판사사건은 이와 달리 미군정이 꾸민 일이고, 경찰은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5월 4일 뚝섬 위폐사건을 적발한 것은 경찰의 일이었겠지만, 그 범인 중 하나가 정판사 직원이라 해서 5월 8일 근택빌딩의 정판사를 수색하는 데는 미군정의 의지가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5월 15일의 사건 발표는 장택상 제1관구(경기도) 경찰부장의 보고 내용이라면서도 군정청 공보과에서 발표했다.


경찰 수뇌부가 이 사건 처리에 자체 방침을 갖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표 직후 장택상과 본정서장의 발언에서 알아볼 수 있다.


◊ 張 경찰부장 기자단과 1문 1답


(문) 지폐위조사건에 관하여 상세한 발표를 바란다.

(답) 이 사건에 관하여는 상부로부터 함구령을 받았으므로 옳다 그르다 일체 말할 수 없다.


(문) 그러나 그 사건 발표는 귀관의 명의로 되지 않았는가.

(답) 공보부에서 내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자세한 보고를 하였으니 자세한 보고는 역시 공보부에 가서 물어주기 바란다.


(문) 뚝섬에서 검거된 지폐위조단과의 관계는 어떤가?

(답) 이것이 뚝섬사건인지 딴 별개사건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공보부 발표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에서 발표한 삐라를 읽은 장 부장은 ‘정판사 지하실’ 운운은 내 보고서에는 없는 사실이라고 부언하였다.


◊ 본정서장 李九範 담

“위조지폐사건에 대한 공보부 특별발표는 상부의 발표이라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나의 의사로는 잘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 사건은 아직 취조가 끝나지 않은 것을 발표한 것은 경솔하였다. 둘째로 지폐를 정판사 지하실에서 인쇄하였다는 발표는 무근한 사실이다. 셋째로 李觀述·權五稷이 사건에 관련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취조하여 보지 못한 이상 분명치 않다. 넷째로 이번 사건은 뚝섬사건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표에서 빠진 것은 이번 발표가 사건의 전모가 아닌 것을 말한다.”

(<중앙신문> 1946년 05월 17일자)


이 사건은 두 달 동안 경찰이 맡고 있다가 7월 9일 검찰로 송국했고, 검찰이 그 열흘 후에 기소했으며, 다시 열흘 후 첫 공판이 열렸다. 검찰과 법원의 기민한 처리는 경찰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서도 미군정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사건의 표적이 공산당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은 즉각 반발했다. 발표 이튿날 아침 박헌영이 군정청을 찾아갔으나 러치 장관도 뉴먼 공보부장도 만나지 못하고 의견서만을 제출하고 돌아와야 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자들은 이 일이 정치적 조치가 아니라 범죄 수사일 뿐이며, 피의자는 공산당이 아니라 개인들일 뿐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사건의 정치화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월 18일에 근택빌딩에 있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시키고 며칠 후에는 적산 건물인 근택빌딩에서 공산당을 쫓아내는 등 노골적 탄압조치를 통해 정판사사건을 공산당의 범죄로 본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의 타격이 컸던 중요한 이유가 그 폐쇄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 ‘사랑받는 공산당’이 떠오르고 있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해방 전 조선과 일본의 공산당원들은 비슷한 처지에서 지하활동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과 함께 다년간 활동하던 지도자 노사카 산조가 1946년 1월 귀국하면서 제창한 “사랑받는 공산당”이 당 내외의 호응을 받으면서 일본공산당이 대중정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공산당’ 하면 ‘음모’를 떠올리는 존재였다. 극우파의 공산당 비방도 이 점에 집중되었다. 정간 전날인 5월 17일자 <해방일보> 사설은 위폐사건이 군정당국의 무고라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향한 중상모략의 대표적 사례로 “공산당은 조선을 소련에 예속하기를 음모한다.”, “공산당은 방화를 계획한다.”, “공산당은 무기를 은닉하였다.”, “공산당은 공처(共妻)를 주장한다.” 등을 열거했다. 게다가 5월 초순에 공개된 조봉암의 편지에도 공산당 지도부의 독단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정판사사건을 빌미로 한 미군정의 공격은 적어도 당시까지 공산당의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타격 대상은 공산당 자체에 앞서 박헌영의 위신과 지도력이었다. 6월 말 방북 때 박헌영이 이북 지도자들에게 “미군정이 정판사사건을 만들 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 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 하는 질책을 받고 심지어 실제로 위폐를 발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았다고 하는 서용규(가명)의 증언(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0쪽)도 이 타격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용규의 다른 증언에 따르면(위 책 243-244쪽) 7월 20일경 다시 방북한 박헌영을 참석시킨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의에서 정판사사건을 조작으로 규정하고 그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공판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공판투쟁’에는 언론활동과 시위활동도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7월 22일 공산당이 하지에게 보낸 청원서가 이 ‘공판투쟁’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공 중앙위원회에서는 래 29일 위조지폐사건으로 기소된 동 당원 박낙종 이하의 공판을 앞두고 22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청원서를 하지 장군에게 제출하였다고 한다.

1) 현 담당검사 양인을 파면하고 가장 공명정대한 인격자로서 검사를 신임하며 이 신임검사는 좌우 양익의 대표자 3인씩과 법조인 6인으로써 조직한 옵써버 하에서 피의자들의 재취조를 진행하여 그 기소 여부를 결정시킬 것

2) 재판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할 것

3) 변호인은 귀국의 지명의 변호사를 초청하여 조선의 변호사와 동석하여 재판을 진행토록 할 것

4) 귀국의 유수한 여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여 재판의 정확한 기사를 귀국민에 보도하기를 허가하여 줄 것

5) 미소공위는 현재 휴회 중이나 양 대표가 조선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미소공위의 대표를 초청하여 재판에 임석토록 허가하여 줄 것

(<서울신문> 1946년 7월 23일자)


기본 취지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재판을 길게 끄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노출을 최대한 크게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이 ‘청원서’를 하지에게 보내고 즉각 언론에 공표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선언서’라고 하는 편이 성격에 더 맞을 것 같다. 하지는 신문에 발표된 여러 시간 후에야 이 ‘청원서’를 접수했다고 7월 26일 러치 군정장관의 성명서를 통해 불평했다. 공산당의 언론플레이로 본 것이다.


지난 화요일 신문기자회견석상에서 신문기자로부터 조선공산당이 하지 중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는 데 대한 질문을 받았었는데 나는 그때에 그 문제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었다. 나는 25일 이 문제에 관하여 하지 중장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지금 귀관에게 보내는 진정서는 그것이 일간신문에 발표되지 수 시간 후인 25일 정오경에야 내가 비로소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접수한 것입니다. 그 진정서는 수 주 전에 발각된 위폐단의 관계자를 재판하는 데 관한 것입니다. 이 진정서는 상당히 호한한 것으로 여러 가지의 놀랄만한 성명과 청원이 기재되었는데 그것은 조선공산당이 확실히 착오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 대규모의 위폐사건에 관한 피고의 재판을 공산당의 재판으로 만들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나는 나의 이전 지령을 귀관에게 재언하는 바이어니와 피고의 다수가 우연히 공산당원이었다고 하더라도 재판의 공정에 있어서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이번 사건에 있어서는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중대한 범죄를 한 차등 개인을 재판하는 것으로 할 것. 이 사건은 다른 모든 범죄사건과 꼭 같이 취급할 것 등입니다.

나는 이 재판이 예의와 권위로써 진행될 것과 피고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될 것과 피고와 조선국민에 대한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유능한 관리의 검토를 거칠 것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든지 정치적 모략이나 보복적 수단으로서 구형을 하는 것은 용인치 아니할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말한 바와 같이 법정의 일부에 기자석을 준비할 것이며 재판은 현재 법규에 의하여 공개될 것이다. 나는 하지 장군의 이상 서면으로써 표시한 희망이 전적으로 이행될 것을 확언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27일자)


7월 24일 기자단 정례회견에서 박헌영은 “위폐사건에 대한 귀당의 태도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 당으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이 사건은 출발로부터 순수한 모략인 것인 만큼 검사국 발표의 시기와 공판기일 등이 모두 모략적으로 정해졌다. 기록이 2천 장이나 된다니 이 재판을 2-3개월간의 준비가 필요할 터인데 기소 후 10일 만에 재판한다는 것은 공판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재판을 이와 같이 속히 함은 우리 당의 반증의 준비기간을 안 주기 위한 것이며 우리 민족에게 진상 인식 준비기간을 안 주자는 데 있다. 우리는 이런 처치에 적극 항쟁하여야 한다.”

(<자유신문> 1946년 7월 25일자. 이 문답은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53쪽에도 같은 날자 <현대일보> 기사를 인용해 놓았지만 내용이 훨씬 소략하다.)


이것이 공판투쟁의 기본전술이었다. 7월 29일 외부 소란 때문에 늦어진 양원일 재판장의 개정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변호인들은 공판 기일 연기, 피고들의 수갑을 풀어줄 것, 법정 내 무장경관의 퇴장을 요구했고, 피고 대표 박낙종은 ‘피고회의’를 열게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재판장에게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변호인단이 편파적 판결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판사 기피신청을 제출하고 퇴정함에 따라 공판은 연기되었다가 기피신청이 완전히 기각된 뒤 8월 22일 재개된다. 기피신청 제출 후 재판장과 피고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갔다.


(판사) 피고들의 의사도 변호단과 같은가?

(피고) 그렇소.


(판사) 판사기피를 하였다가 사실심리 결과 범죄사실이 판명되면 피고들에게 더욱 불리하고 벌을 더 엄중하게 받게 되는 줄 아는가?

(피고) 안다.


(판사) 그래도 하는가?

(피고) 그렇소.


(판사) 그렇다면 판사기피신청을 접수하고 오늘의 사실심문은 보류한다.

(<자유신문> 1946년 7월 30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