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이인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이다. 조금이나마 안다면 어떤 것을 '하는' 이인가 하는 것보다 어떤 것을 '하지 않는' 이인가 하는 쪽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이라는 점에서, 아는 것이 적은 데 비해 막연하나마 꽤 연대감을 느껴온 편이라 할까.

깔끔한 서평을 더러 읽은 기억으로 그런 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의식할 뿐, 세대가 다른 그와 어떻게든 얽힐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른 적이 없었다. 2008년 말이던가? 그가 내 책들에 대한 서평을 써줄 때까지. <뉴라이트 비판>과 <밖에서 본 한국사>, 그리고 <미국인의 짐>까지 곁들인 서평이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서평이었다. 끝에서 두 차례 "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견해를 존중한다."는 말을 연거푸 쓴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내 글을 대부분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규정하면서 독자들이 그 글에 대해 취해 주기 바라는 바로 그런 자세다.

하나의 단편적인 서평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쳐 주목할 만한 '사상가' 2백여 명을 추려내는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1년쯤 지난 뒤에야 알았다. 한기호 씨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 그 서평이 수록된 책을 받아봤다.

고르고 고른 사상가 2백여 명 중, 그것도 열 명이 안 되는 국내 저자 가운데 내 이름이 끼어 있다는 것이 엄청 어색했다. 두 가지 짐작이 가능했다. 하나는 최성일의 선택이 극히 주관적이라는 것. 또 하나는 이 작업의 전체 규모 중 아직 몇 분의 일만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앞으로 국내 저자 수십 명을 더 넣으면 그 틈에서 내 존재가 덜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프레시안>에 실린 최성각 씨의 추도문을 읽으며 두 가지 짐작이 다 틀렸음을 깨달았다. 최성일의 선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 주견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주관을 사회의 관점을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는 노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가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작업이 수십 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 위에 현시점의 완성도를 소홀히 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그의 선택을 진짜 진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칼럼집 <미국인의 짐>을 빼고 내가 본격적 저술활동으로 책을 내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이었고, 그의 선택을 받을 때까지 두 권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수많은 저자들에 앞서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의 두 가지 짐작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 취향으로 강한 공감을 느낀 면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술활동을 막 시작하는 내게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크게 보았기 때문에 이미 평판이 확립된 저자들보다 앞세워 다루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리뷰를 받고부터 2년여 시간 동안 몇 권의 책을 더 냈다. 한 권 한 권 받아볼 때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을 것을 상상해 본다. 요 몇 해 동안 나는 사회에 대한 역할을 잘하려는 노력에 꽤 잘 집중해 왔고, 그 첫 번째 지표가 진지한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독자의 모습을 구체화해서 내게 보여준 사람을 최성일로 생각한다.

예스24에 '初步'란 이름으로 내 책의 리뷰를 간간이 올려주는 독자가 있다. 한번 리뷰를 훑어보다가 그가 "최근 10년간 읽은 가장 중요한 책 세 권"을 올리라는 어떤 행사에 <밖에서 본 한국사>를 끼워 넣었다는 이야기를 봤다. (그가 올린 다른 두 책의 저자도 모두 최성일의 선택을 받은 분들 같다.) 하도 황송해서 댓글을 달았다. "초보님은 10년 동안 책을 세 권만 읽으신 모양입니다. 정말 엽기적인 선택입니다.[저자]" 얼마 전 초보님이 <해방일기 1> 리뷰를 올려주며 이 댓글 기억을 적은 것을 봤다.

2008년 말 최성일님의 선택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엽기적인 선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알아보았다는 자부심이 그 선택을 부채질했을 것이고, <책으로 보는 사상가들>의 신뢰도를 손상시킬 위험이 큰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여 온 것은 천만다행인 일이다. 앞으로도 그 노력을 이어가는 데는 독자 최성일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뜻이 뒷받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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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