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양대 독자였으니 제일 가까운 친척이 6촌이다. 그러나 6촌 형님들은 족보에서 이름만 보고 실물을 보지 못했다. 모두 이북으로 갔다던가? 그래서 실제로 제일 가까운 친척은 8촌이다.
그렇다면 차례고 기제사고 고조부모까지 4대를 지내야 할 텐데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양대 세 분만 우리 집에서는 모셨다. 대학 입학할 무렵 처음으로 고향에 가서 이복형님을 만난 후 대략 사정을 알게 되었다. 4대봉사는 시골 형님이 모시고 있었고 서울의 우리 집에서는 양대만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양대 세 분은 차례나 제사 때 시골과 서울 양쪽으로 상을 받고 계셨던 셈이다. 그러다 1970년대 초에 형들이 유학을 떠나고는 서울집 제사는 흐지부지 되고 내가 이따금 시골 제사에 참례하곤 했다.
1980년대 말에 시골 형님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날 때 큰 딸 경구가 제사를 물려받았다. 허우대 멀쩡한 동생이 셋이나 되는데 딸아이가 제사를 잇게 하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하나는 미국에 주저앉아 있었고, 또 하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갓 결혼한 참인데, 원래 세속을 따르지 않는 이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혼수속을 밟지는 않았지만 여러 해째 별거 상태로, 가정이 없는 상태였다.
1990년경 이혼을 하고 학교를 떠나 혼자 지내다가 몇 해 후 재혼하고 제주도에 살림을 차렸을 때, 아버지 제사만 모실 생각을 했다. 기제사와 설, 추석의 차례를 극히 간소하게 차리고 둘이서 절 올리는 정도였다. 어머니는 절에 천도재를 맡겼으니 제사에 신경쓰지 말라고 권하셨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으셨다. 말린다고 들을 나도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강할 때였는데, 특히 집안 일에 관해 어머니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2001년, 서울에서 지낼 때 아버지 50주기를 맞아 모처럼 한 차례 제대로 제사를 모셨다. 미국의 형 내외와 딸들, 사위까지 청하고 사촌형님들, 7촌아저씨까지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듬해 또 이혼하고 중국 가서 지내게 되었으니. 그리고 제사가 없어진 조선족 사회에서 지내다 보니 제사 같은 것 생각 않고 사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 60주기가 다가오니 마음이 좀 언짢다.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보다가 몇 주일 전에 서울대학에 들어가 국사학과 친구들을 만나 부탁했다. 아버지와 관련된 콜로키엄이라든지, 뭐 조그만 행사 하나 할 수 없겠냐고. 유족으로서 도울 일이 있다면 힘껏 돕겠다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고, 그런 자리 만들도록 애써 보겠다는 그들 답변에 감사하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가족이 모여 기려 드릴 만큼 집안을 꾸려내지 못한 것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60주기를 맞아 그분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조그만 모임 하나라도 어느 구석에서 열릴 수 있다면 죄송한 마음을 그나마 견딜 만하겠다.
추석도 그냥 무심히 지낸다. 그저 60주기에 면피라도 됐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한 자락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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