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 위폐사건’에 대한 제1관구 경찰청(장택상)의 보고를 5월 15일 군정청 공보과에서 발표했다. 5월 16일자 신문에 보도된 발표 내용을 3월 25일자 일기에 옮겨놓았었다. 공산당 본부가 있는 근택빌딩 지하실의 인쇄소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 3백만 원을 찍었으며, 여기에 공산당원인 인쇄소 직원 14 명과 두 명의 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관술 총무-재정부장과 권오직 해방일보 사장)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튿날 제1관구 경찰청 정보과에서 위폐 인쇄량이 3백만 원이 아니라 9백만 원이라는 정정 발표가 있었다. 그 동안 위폐사건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인쇄량이 대개 몇 십만 원에서 백여만 원이었다. 9백만 원이라면 여타 위폐사건과 차원이 다른 대규모 조직범죄라 할 것이다. 이 정정 발표가 있은 다음날 <동아일보>에 후속기사가 실렸다.
조선공산당간부와 당원들의 위조지폐사건은 15일 공보부 발표로서 사회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뒤 취조에 따라 죄상은 더욱 확대되어 도합 900만 원을 남발한 것이 드러나 액수가 많은 점으로도 다시금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다. 일개인의 행위도 아니고 적어도 근로대중을 위한다는 공산당의 간부와 정당원들이 당 본부 안에 있는 인쇄소를 이용하여 지폐남발로서 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사건인 만큼 보다 더 우리의 관심은 커가고 있는데, 백일하에 드러난 일당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원들의 화폐위조사건의 전모는 작보하였거니와 범인 14명을 방금 제1관구경찰청에 유치하고 엄중 취조중인데 이 범인들의 지금까지의 진술로서 판명된 배후관계와 동기는 다음과 같다.
일당이 위조지폐를 박게 된 동기는 8·15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당 자금 선전운동비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한 결과 정판사를 접수하였다. 그래서 이 기관을 접수한 朴洛鍾은 동 공장에서 전부터 근무하는 공산당원 金昌善에게 李觀述과 權五稷의 지령을 전한 다음 작년 10월 20일 하오 6시 경 시내 장곡천정 74번지 근택빌딩 정판사 사장실에서 박락종 서무과장·宋彦弼(46) 재무과장·朴弼商(40) 기술과장과 평판과장 金昌善(36)·기술공 鄭明煥(30)·창고계 주임 朴相根(43) 등이 비밀히 집합하여 위조지폐를 박을 계획을 세우고 또 공산당이 재정난이라는 것을 명시한 다음, 지폐를 위조 발행하여 이것을 공산당에게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곧 그 날 20일 하오 7시 경 공장직공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김창선이 평판과장으로 있을 즈음 절취하여 보관하였던 100원 권 원판 4매 두 벌로서 먼저 200만 원을 박아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인쇄한 경로를 보면 제일착으로 작년 10월 22일 오후 7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사이에 정판사 평판과장 金昌善(36) 외 13명이 200만 원을 박아 내었고 그 다음 제 2회는 작년 12월 5일 하오 7시 경부터 6일 오전 4시 경까지에 200만 원 그리고 제 3회는 금년 2월 12일 밤 10시 경부터 13일 새벽 4시 경까지 100만 원 또한 제 4회는 2월 20일 오후 7시 경부터 21일 상오 4시 경까지 200만 원 제 5회는 3월 25일 하오 7시 경부터 상오 4시까지 200만 원 이렇게 전후 5회에 걸쳐서 900만 원을 원판 9개로서 전부 100원 권을 박아 내었던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일당이 사용한 도구는 전부 본정서와 중앙경찰청에서 압수하였는데, 압수된 증거품은 다음과 같다.
100원 권 원판 9매 / 소각아연판 잔해(300문) / 옵셋트인쇄용 원판 3매(대형) / 잉크 3종 / 잉크헤라 2조 / 인쇄기 4대 / 재단기 2대 / 공산당원증 2매 / 대의원증 1매 / 용지 2연(모조지) / 페파 2매 / 회계장부 5책 등
(<동아일보> 1946년 05월 1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기사에는 본정서 서장의 기자회견 내용이 붙어 있었다.
(문) 李觀述·權五稷은 관계가 없으며 공산당원 관계가 아니라는데요.
(답) 공산당원이라고 한 것은 두 장의 당원증을 압수하였을 뿐더러 범인이 자백한 바이다. 간부당원에 대하여서도 공범자의 자백에 의한 것이다.
(문) 또 당원만이 한한 행위와 당이 한 것과는 사실상 다른데?
(답) 이관술은 동 당의 중앙집행위원이오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이고 권오직도 당의 중앙집행위원이다. 그래서 이관술 하면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하면 이관술 하지 않는가. 이 두 사람이 나와서 돈을 어디 썼는가. 그 구체적 내용을 알면 더 한층 명백해 질 것이다.
(문) 만일 공산당이 관계되었다면 박헌영 씨를 왜 부르지 않는가?
(답) 일제시대와 달라 현재의 수사는 사건관계자의 진술에 따라 진전되는 것이다.
(문) 사건은 더 파급하는가?
(답) 그것은 아직 말 못하겠다.
(문) 뚝섬의 이원재와의 관계는?
(답) 아직 사건이 진전되지 않아 분명치 않다.
(문) 공산당원증을 사진박아 발표하게 할 수 없는가?
(답) 좀 더 기다리기 바란다.
이 사건은 철저한 ‘진실게임’이었다. 공산당 측은 일체의 혐의를 부인하고 경찰의 조작이라고 시종일관 주장했다. 11월 23일 선고공판에서 기소사실이 모두 인정되어 피고들이 중형을 받기는 했지만 공정성과 거리가 먼 정치적 판결이었다.
설령 기소사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재판과정에서 그를 입증하는 유효한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위의 기사 중에 적시된 증거물 중에는 기소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없었고, 판결은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거해서 이뤄졌다. 그런데 여러 피고인들은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이 고문에 의한 허위였다고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고, 공장장 안순규는 진술을 번복했다 해서 위증죄로 추가기소를 당하기까지 했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은 위폐를 인쇄했다는 시기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하기도 했다. 군정청의 당시 자료에서도 미군 측은 공산당의 범행을 확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 진행 중인 9월 19일 담당검사 2인 중 김홍섭 검사가 돌연히 사표를 제출한 것도 무리한 진행에 대한 반발로 널리 해석되었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500-501쪽)
본정서장의 기자회견 중 “뚝섬의 이원재와의 관계”에 이 사건의 열쇠가 있는 것 같다. 5월 10일자 <서울신문>에는 5월 4일 적발된 뚝섬 위폐사건과 5월 8일의 정판사 수색을 묶어서 보도한 기사가 나왔는데, 공산당과 정판사의 이름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해방 후 화폐범람으로 경제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수 천 만원의 위조지폐단이 있는 사실이 본정서에 발각되어 국민들을 아연케 하고 있다. 즉 본정서에서는 우연히 얻은 정보로 4일 오후 수영사 직공 裵石龍(32)을 인치하고 즉시 무장경관대를 뚝섬에 파견하여 우익 모 정치단체 뚝섬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는 李元在 외 3명을 인치하여 취조하는 한편 각각 그 본거를 습격하여 화폐원판 석판인쇄기 7대 기타 다수를 압수하였는데 8일에는 다시 시내 모 좌익정당 산하에 있는 인쇄소를 수색하여 직공 12명을 검거하고 오후에는 다시 吳貞淑 외 1명의 여자를 체포하는 등 맹활동중인데 사건을 엄비에 부치므로 진상은 판명되지 않았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내와 그밖에 교외수처에 인쇄공장을 두어 위조지폐를 박아 내어서 현재 판명된 금액만도 수 천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독촉국민회 지역조직 간부 이원재가 벌인 뚝섬 사건은 개인적 범죄로 보인다. 이 사건에 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이 끼었던 데서 경찰 수사가 8일의 정판사 수색으로 이어졌다. 김창선이 이원재와 공모한 위폐 인쇄에 정판사 시설을 활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뚝섬 사건에 정판사 직원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장택상과 조병옥은 공산당 공격의 호재로 여겼던 모양이다. 본정서장은 뚝섬 사건과 정판사 사건의 관련성을 언명했는데, 후에 김용찬 검사장은 이를 부인했다고 한다. (서중석 위의 책 500쪽)
이 사건의 와중에 <해방일보>는 5월 18일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 정간은 결국 폐간으로 이어진다. “폭풍에 항(抗)하여”란 제목의 5월 17일자 <해방일보> 사설에는 위폐사건이 군정당국의 무고라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향한 중상모략의 대표적 사례로 “공산당은 조선을 소련에 예속하기를 음모한다.”, “공산당은 방화를 계획한다.”, “공산당은 무기를 은닉하였다.”, “공산당은 공처(共妻)를 주장한다.” 등을 열거했다. (서중석, 위의 책 499쪽)
공산주의자의 패륜성은 우리가 어렸을 때 받은 반공교육에서 중요한 축의 하나였다. 1946년의 반공선전에서도 이미 패륜성이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가 제창하는 ‘혁명’이란 기존 질서의 파괴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공선전과 반공교육에 패륜성이 쉽게 활용되는 것인데,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이 약점을 스스로 키워준 측면이 있다.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은 <혁명의 길> 서두에서 ‘혁명가의 행동’을 규정하는 몇 가지 특징을 나열한다. 이것을 19세기 러시아의 테러리스트 세르게이 네차예프가 쓴 ‘혁명가 문답’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의 역할이 혁명적 대의의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무자비해야 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또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하고 속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네차예프의 지나친 면들은 러시아의 급진운동 일각에서도 비난을 받았지만, 레닌은 전체적으로 이 문답서를 매우 좋게 보았으며, 이것은 나중에 볼셰비키의 경전이 되었다. (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224쪽)
네차예프의 혁명지상주의는 레닌에 의해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표준으로 세워졌다.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진정한 운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관계까지도 희생시켜야 한다는 강박 아래 행동했다.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그 희생의 수준에 따라 운동가로서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풍조도 일어났다. 해방공간에서 ‘볼셰비키’는 상식적 생활방식을 벗어난 극단적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김성칠의 일기 중 친구인 좌익 법조인 홍승기에 관한 대목에서 이런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한동안 세상에서들은 그가 법정에서 담당 판사에게 대하여 피차에 자리를 바꾸어 서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호통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나 나는 처음부터 말 같잖은 소리라고 자신 있게 부인해버렸던 것이다. 홍군은 성격상 그럴 수 없는 사람임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홍군은 담당 판사 임한경 씨의 말이라 하여 “양심적인 인텔리라면 아예 지하운동에 발을 들어놓지 말라. 그는 결국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서로 믿고 지내던 친구들을 배반하기에 이를 것이다. 현실은 그처럼 가열한 것이다.”라고 자못 감명 깊게 나에게 두어 번이나 이야기해준 일이 있었다. (<역사 앞에서> 1950년 6월 29일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혁명에의 헌신성이 훌륭한 동지의 중요한 자격 기준이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도 ‘희생’의 자세는 도덕성의 징표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그 희생의 대상이 인간성 자체와 인간관계라면? 혁명지상주의자는 도덕성도 기존 체제의 일부로서 파괴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홍승기와 같은 해방공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덕성의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었고, 반공 진영은 이 약점을 선전에 활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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