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베트남 이야기에서 베트남의 민족국가 경험이 우리와 다른 점을 설명했다. 베트남의 민족 전통은 지금 베트남의 북쪽 끝 통킹 지역에 뿌리를 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말 한 무제의 남월(南越) 정벌 이래 중국문명권에 편입되어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15세기까지 중국문명권의 남쪽 끝이었고, 그 남쪽은 중국문명보다 인도문명의 영향 지역이었다.
한 무제의 정벌 이후 통킹 지역은 중국의 느슨한 지배 아래 있다가 10세기 들어 당나라의 쇠퇴에 따라 확실한 독립 단계에 들어섰고, 11세기 초에 안정된 리(李) 왕조가 나타났다. 1009년 혼란에 빠진 레(黎) 왕조를 물려받도록 근위대 사령관 리 콩 우안(李公蘊)이 동료들의 추대를 받아 리 왕조를 열었다는 이야기는 960년 오대(五代)를 끝낸 송 태조의 이야기와 방불하다.
리 왕조 때 수도를 산골짜기로부터 지금의 하노이로 옮기고 대규모 관개사업과 조세제도 정비, 과거제 실시 등 중국을 표준으로 한 국가체제가 이뤄졌다. ‘다이베트(大越)’란 국호도 이 때 만들어져 왕조 교체에 관계없이 18세기까지 사용되었다. 13세기 초 리 왕조가 망할 때 왕자의 한 사람이 고려로 건너와 화산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이베트는 강한 군사적 전통을 가진 나라였다. 리 왕조 때(1075-76) 송나라의 10만 대군을 막아낸 일이 있었고, 그 뒤의 친(陳) 왕조 때는 여러 차례(1257, 1284, 1288) 몽고군을 격퇴했다. 1407부터 명나라 군대에게 점령당했지만 레 로이(黎利)가 이끈 10년간의 항쟁 끝에 30만 명군을 몰아내고 1428년 레 왕조를 열었다. 이 전통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1873년과 1883년에 하노이를 점령했던 프랑스군 사령관들이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다이베트의 군사적 전통은 방어전에서만 빛을 발한 것이 아니었다. 11세기에 국가체제가 안정되면서부터 8세기에 걸친 ‘남 티엔(南進)’이 시작되었다. 11세기 초의 다이베트는 북위 23도에서 20도에 걸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11세기 중에 남쪽 경계선이 18도까지 내려갔고, 15세기 후반에 참파 정복으로 13도까지 내려갔으며 16세기 중에 11도에 이르렀다. 사이공 주변의 메콩 삼각주는 대부분 18세기 중에 다이베트에 들어왔다.
1802년 구옌(阮) 왕조의 성립으로 ‘베트남’이란 국호와 함께 오늘날 그 이름으로 알려진 영토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 통합성은 고려-조선의 국호 아래 오랫동안 지켜져 온 한반도의 통합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북진’은 11세기에 평안도, 14세기에 함경도를 끌어들이고 완성된 것임에 반해 베트남의 ‘남진’은 18세기에야 완성된 것이다.
구옌 왕조의 창업자 쟈롱 황제의 통일 과정에 이미 프랑스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베트남에 작용하는 유럽의 힘은 군사력만이 아니었다. 17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가 알파벳을 이용한 베트남어 표기법을 창안했는데, 이것이 한자를 이용한 전통적 표기법 ‘놈(諵)’을 제치고 널리 보급되어 베트남의 ‘쿠옥 구(國語)’가 되었다.
남 티엔의 일차적 주체는 중국화된 통킹 지역의 다이베트 세력이었지만,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베트남에 편입된 중부와 남부 지역의 변화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참파의 인도문명은 불교를 통해 자리를 지켰고, 17세기 이후 확대된 중국인의 이주가 새로 개척되는 중부와 남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 이후로는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영향이 남쪽에서부터 확장해 올라왔다.
1880년대까지 인도차이나 지배권을 확립한 프랑스가 베트남을 북부의 통킹, 중부의 안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로 3분해서 통치한 것은 한반도를 38선으로 자른 것처럼 점령자의 편의에만 따른 것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조건이 작용한 결과였다. 1850년대에 프랑스 지배를 받기 시작한 코친차이나는 베트남에 편입된 지 한 세기도 안 되어 민족주의적 저항이 가장 약한 곳이었다. 중국문명의 뿌리가 깊은 통킹과 반대였다. 국수주의적 ‘칸 부옹(勤王)’, 근대화를 지향하는 ‘두이 탄(維新)’, 그리고 사회혁명을 바라보는 공산주의 등 민족주의 운동의 여러 갈래가 엇갈리는 데 지역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 안에 자리 잡고 있다가 천하체제 붕괴와 함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은 한국과 베트남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의 실제 조건에는 두 나라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들은 독립운동의 방향과 성격에도 투영된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일본의 조선 지배보다 다양한 목적을 복합적으로 가진 것이었다. 일본에게 조선 지배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라는 의미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산업구조 변화에는 등한한 편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에서 플랜테이션 등 전형적 식민사업을 통해 큰 경제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조선의 ‘식민지 근대화’를 논하는 이들은 베트남의 ‘식민지 근대화’를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근대화를 ‘억제’한 방향이었는지 바로 실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상태의 근대화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파괴적인 현상인지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변화가 큰 만큼 수혜자의 범위도 넓었고 안정된 왕조 지배의 경험도 얕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대한 협력 현상이 조선보다 베트남에서 더 활발했다. 그리고 한편 변화에 따른 민중의 피해도 컸기 때문에 민중의 저항이 컸다. 1930-31년의 응에-틴 폭동도 체계적 이념의 지도를 받기보다 현실에 대한 단순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사회혁명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될 조건이 베트남에서는 조선보다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후에의 구옌 왕조 조정이 상당한 지역에 대한 명목상의 통치권을 유지한 것이 독립운동의 복고적 분위기를 청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 지배 초기에는 황제가 후에를 탈출해서 근왕 운동을 이끄는 등 독립운동의 전면에 서기도 했지만, 후에의 조정은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 지배에 대한 ‘협력’의 본산 노릇을 하며 독립운동의 극복 대상이 되었다.
조선 독립운동에서 1919년 공화국을 표방한 후에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하는 복고적 민족주의가 주류의 자리를 지킨 것과 달리 베트남 독립운동은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추세가 강했다. 서양 알파벳을 쓰는 쿠옥 구 보급이 민족운동의 중요한 사업이 된 것도, 서양에서 들여온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널리 수용된 것도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현상들이었다.
베트남과 비교하면 조선은 역시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이 개항기를 맞을 때 프랑스의 침략을 받고 있던 베트남은 이미 2백 년간 군사적, 문화적, 경제적 침식을 당한 뒤였다. 1945년까지도 조선은 베트남보다 훨씬 적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서세동점의 물결이 닥쳐오기 전에 심어져 있던 전통의 뿌리는 조선 쪽이 훨씬 굳건했다. 1945년 이후의 베트남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정면대결을 벌일 때 조선에서는 이 대결이 복고적 민족주의에 가려져 있었다.
[베트남어 발음 표기를 요즘은 제가 적는 방식보다 원음에 가까운 방식에 따른다고 지적해 준 독자가 계셨습니다. 발음체계를 검토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어서 당분간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원래 방식을 고수하겠습니다.]
[드디어 연재에 펑크를 냈습니다. 근 10개월 만이군요. 감개무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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