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에 인용했던 1946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다시 한 번 세밀히 들여다본다.


조선은행권 (1)호에서 (5)호까지의 백원권 지폐는 쓰느니 못쓰느니 받느니 안 받느니 하고 항간에는 별의별 유언낭설이 떠돌고 있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동시 경제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12일 조선은행 발행과장 吳正煥에게 그 진상과 대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위조지폐가 돌아다닌다는 바람에 백원권 위조지폐와 비슷하다는 소위 조선은행권 기호(1)·(2) 두 종류 지폐를 잘 안 받는다는 말을 듣고 우리 은행에서는 의심을 품고 이런 지폐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한하여는 감정하고 바꾸어 주었다.

이 문제가 이렇게 크게 된 원인의 하나는 일부 은행 가운데서 무조건하고 백원권 지폐는 예금도 안 받고 바꾸어 주지도 않는 점도 큽니다. 적어도 은행 출납계에 있는 사람으로 위조인지 아닌지를 구분 못할 정도의 교묘한 위조지폐는 아직 없습니다. 문제의 기호 (1)과 (2)는 일인이 패전 이후 미군 진주 전에 찍어낸 것인 만치 그 기술에 있어 원지 또는 인쇄에 있어 똑똑치 못한 점도 있으나 (3)·(4)·(5)는 미군 진주 이후 인쇄한 것이라 불량한 지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하간에 위조지폐의 기술이 해방 전보다 교묘하게 된 것도 사실이나 일반시민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안심하고 종전과 같이 사용하기를 바라며 의심되는 것은 언제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는 책임지고 본점은 물론 지방지점에서도 교환하여 드릴 터이니 안심하기를 바라며 은행당국을 신뢰하여 협력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1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유통되고 있던 고액권 지폐 중에 인쇄가 서로 다른 여러 종류가 있었고, 그중에는 용지와 인쇄상태가 “똑똑치 못한”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은 1945년 8월 15일에서 9월 8일 사이에 찍어낸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똑똑치 못한” 지폐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가? 일본 항복 당시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약 55억 원이었는데, 미군 진주 전까지 약 30억 원을 더 찍었다. 많은 양을 급하게 찍느라고 지폐를 인쇄하지 않던 인쇄소들까지 동원되었다. 조선정판사는 그중의 하나였다. 용지의 규격 통제도 느슨했다. 그래서 이 때 찍은 조선은행권에는 불량품이 많았다.


화폐 위조 범죄는 생산과 유통, 두 측면으로 이뤄진다. 정품과 구별하기 힘든 위폐를 인쇄하는 생산 작업만으로 범인들이 이득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유통시켜야 이득이 생긴다. 생산 기술이 일단 확보되었을 때, 범죄의 규모는 유통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화폐 위조 범죄에는 보통 생산보다 유통 작업에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유통 능력이 없으면 기껏해야 유흥비로 쓰는 길밖에 없다.


해방공간에서 화폐 위조가 성행한 가장 큰 이유는 ‘정품’ 지폐 중에 “똑똑치 못한” 것이 많았던 데 있었다. 웬만한 기술로 웬만한 종이에 찍으면 정품 못지않게 똑똑한 위조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 생산이 쉬웠다. 그리고 어차피 불량품이 통용되는 화폐시장에서는 위폐의 유통에도 저항이 적었다.


일본 항복과 미군 진주 사이에 찍은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을 위조지폐로 봐야 하지 않을까? 정품 지폐라면 정당한 발행권자가 정당한 발행 절차를 거쳐 정당한 규격으로 인쇄한 것이어야 한다. 미군이 진주해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넘겨받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의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이 정당한 발행권을 가진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20여 일 동안 기존 통화량의 절반이 넘는 거액을 발행하는 데 정당한 절차를 거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쇄한 제품의 대부분이 기술적으로 불량품이었다.


미군 진주 때 찍은 지 한 달도 안 된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이 누구의 손에 들어 있었나? 찍어낸 자들의 손에서 멀리까지 전파될 시간이 없었다. ‘은사금’이니 ‘보상금’이니 하는 명목으로 통치기구 구성원들과 그 가까운 협력자들 손에 그 대부분이 뭉칫돈으로 남아 있었다. 그 불량품 지폐로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사려 해도 상인들이 잘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총독부-조선은행은 위조지폐를 ‘생산’은 했지만 ‘유통’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미군 진주 때까지 찍어낸 위폐를 위폐범들이 나눠 갖고 있었을 뿐이다. 효과적인 유통 방법이 없다면 이 위폐의 대부분은 사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30억 원 위폐를 정품으로 인정해 줬다. 유통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불량품이라도 이 30억 원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조선은행에서 바꿔주게 했다. 30억 원 규모의 위조지폐 범죄가 미군정의 참여로 완성된 것이다.


나는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었는지, 찍었다면 얼마나 찍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산당의 계획적 범죄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1천2백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어낸 공산당의 계획적 범죄”라는 경찰의 주장은 믿을 수 없다. 당시 공산당을 때려잡고 싶어 한 사람들도 경찰이 더 그럴싸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을 것이다.


5월 17일자 <중앙신문>에 몇 개 관련기사가 실렸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먼저, 공산당 중앙위의 성명서.


5월 15일 군정청 공보부 발표라는 제목 하에 조선경찰 제1관구경찰청장 張澤相 씨의 위조지폐사건에 대한 발표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는 좌와 여히 성명함

1) 이 지폐위조사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李觀述·權五稷 양인이 관련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이상 양인은 이 사건에 전연 관계없음을 단호 성명함

2) 이 사건은 관련되어 체포되었다는 14인을 모두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이라고 하였으나 발표가 사실과 상위가 있음을 지적함

3) 동 발표에 ‘해 위조지폐 300만 원의 대부분은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위조한 것이다’라 하였으나, 근택빌딩 지하실에서는 인쇄기를 설치한 일이 일차도 없으므로 이 발표는 전연 부당한 것을 지적함

4) 동 발표에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명칭 하에 당 간부 및 당원이라는 칭호를 씌워 조선공산당이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나 있는 듯이 발표한 것은 더욱 기괴천만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은 단호히 이 사건과 호말만한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경제혼란의 행위에 대하여는 가장 용감히 투쟁하였고 투쟁할 것을 다시 한 번 천하에 공포함

5)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 국외에 긍하여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임을 지적하는 동시 우리 당은 이 사건과 절대로 관계없으니만치 머지 아니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고 우리 당의 위신은 이러한 허위적 중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동요·미혹이 없을 것을 단언함

1946년 5월 15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박헌영 공산당 대표가 16일 오전 9시 군정청을 방문했으나 러치 군정장관과 뉴먼 공보부장이 모두 외출 중이라서 그 하급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군정장관에게 재고를 바란다는 의견서 전달을 부탁했다는 기사가 있었고, 범인으로 지목된 공산당 간부 이관술과 권오직이 결백을 주장한 성명서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장택상의 기자회견 기사와 사건을 담당한 본정서 이구범 서장의 견해가 실렸다.


◊ 張 경찰부장 기자단과 1문 1답

(문) 지폐위조사건에 관하여 상세한 발표를 바란다.

(답) 이 사건에 관하여는 상부로부터 함구령을 받았으므로 옳다 그르다 일체 말할 수 없다.

(문) 그러나 그 사건 발표는 귀관의 명의로 되지 않았는가.

(답) 공보부에서 내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자세한 보고를 하였으니 자세한 보고는 역시 공보부에 가서 물어주기 바란다.

(문) 뚝섬에서 검거된 지폐위조단과의 관계는 어떤가?

(답) 이것이 뚝섬사건인지 딴 별개사건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공보부 발표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에서 발표한 삐라를 읽은 장 부장은 ‘정판사 지하실’ 운운은 내 보고서에는 없는 사실이라고 부언하였다.


◊ 본정서장 李九範 담

“위조지폐사건에 대한 공보부 특별발표는 상부의 발표이라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나의 의사로는 잘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 사건은 아직 취조가 끝나지 않은 것을 발표한 것은 경솔하였다. 둘째로 지폐를 정판사 지하실에서 인쇄하였다는 발표는 무근한 사실이다. 셋째로 李觀述·權五稷이 사건에 관련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취조하여 보지 못한 이상 분명치 않다. 넷째로 이번 사건은 뚝섬사건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표에서 빠진 것은 이번 발표가 사건의 전모가 아닌 것을 말한다.”


독촉국민회와 한민당에서는 바로 공산당을 비난하는 담화가 나왔다.


조선공산당의 음모 하에 다량의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조선경제를 교란하며 국민생활을 파훼한 것은 일대 죄악이다. 악질 공산당 일파의 집단을 삼천만 동포의 총의로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공산당의 모략에 빠진 동포들은 하루바삐 반성하여 완전자주독립전선으로 집결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46년 05월 17일자)


조선공산당의 위조지폐사건은 만천하의 이목을 경동시켰다. 천하의 공당으로서 선언한 공산당이 이같이 불법행위를 하고 경제계를 교란시킨 죄과는 해체로서 천하에 사과해야 할 것이다. 당원의 한 일이 당에서 한 일이 아니라고 변명한들 당 재정부와 당 기관지 사장과 당원 14명이 사건에 관계했을 때 그것을 그 당의 소위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다. (<동아일보> 1946년 05월 1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비난의 초점은 ‘경제 교란’에 있었다. 공산당의 범죄가 경제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그 피해가 모든 인민에게 미친다는 주장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겨가 묻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지만.


30억 원의 위조지폐를 유통시킨 범인이 누구인가? 당시 조선은행권 유통량 90억 원 중 3분의 1이다. 더구나 정상적 화폐 60억 원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던 데 반해 이 30억 원이 이남 지역에만 몰려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이남 지역에서 위폐의 비율은 40 퍼센트가 넘었을 것이다. 30억 원짜리 위폐단이 겨우 1천만 원짜리 위폐 사건을 짜 맞춰 ‘경제 교란’ 책임을 따지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