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에 들어 있다가 서세동점의 물결에 휩쓸린 나라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지배를 받다가 1940-1945년간 일본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한국이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을 받은 것처럼 베트남은 북위 16도선 양쪽으로 중국군과 영국군의 점령을 받았다. 두 나라의 분할 점령은 모두 연합군사령부의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1일자 일기) 그 후 한국에는 1948년에 두 개의 국가가 세워졌고, 베트남은 1954년에 두 개의 국가로 쪼개졌다.


일본 항복 직후의 상황에서 베트남은 한국과 많은 조건을 공유한 나라였다. 두 나라의 남쪽에서 이승만과 고 딘 디엠의 정권이 무너진 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상황까지 닮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이 참혹한 전쟁을 겪고 통일을 이루는 데 와서야 길이 크게 갈라진다.


많은 조건을 공유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두 나라 역사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 많이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는 틈틈이 베트남 사정도 알아보려 한다. 우선 1945년 이전 베트남의 역사를 <Wikipedia>의 “History of Vietnam” 조에서 훑어보며 우리 역사와 ‘달랐던 점’을 살펴보겠다. 정밀한 비교를 위해서는 상이한 조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한국처럼 오래된 민족국가가 아니었다. 한국이 적어도 고려조 이래 한반도의 민족국가로 존재해 온 것과 달리 지금의 베트남 영역이 단일권력의 지배 아래 들어온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었고, 그때도 고려나 조선 수준의 통합성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구옌(阮) 왕조가 설 때 비로소 ‘베트남’이란 국가가 뚜렷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구옌 왕조의 창시자 구옌 푹 안(1762-1820)이 취한 제호(帝號) ‘쟈롱(嘉隆)’은 사이공을 뜻하는 ‘쟈’와 하노이를 뜻하는 ‘롱’을 합친 것이다. 두 지역을 함께 다스리게 된 것이 큰 의미를 가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월한 문명조건을 가진 북방이 개발이 늦은 남방을 정복하고 지배해 온 중세 이래의 베트남 역사에 비추어 사이공의 거점에서 출발한 구옌 왕조가 북방을 정복한 것은 대단히 특별한 일이었다.


16세기 초반에 이 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은 베트남 지역을 두 개의 나라로 파악했다. 북쪽의 통킹(Tonkin)과 남쪽의 코친차이나(Cochin China)였다. 1527년 막(莫) 왕조가 일어나 레(黎) 왕조를 남쪽으로 몰아낸 이후 18세기 말까지 정치적 통합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471년 ‘참파 정복’으로부터 1527년 왕조 분립까지 반세기간 레 왕조가 지금의 베트남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통합된 국가체제를 이루지는 못했다. 참파(Champa, 占城)는 7세기 이래 인도문명을 받아들여 베트남 중부 지역을 지배하던 나라였다. 일찍부터 중국문명을 받아들여 온 북부 지역이 15세기 들어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남쪽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참파 정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참파 정복으로 확대된 레 왕조의 지배 지역도 지금 베트남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사이공을 포함한 남쪽의 메콩 강 삼각주 일대는 미개한 상태에서 크메르의 영향권 안에 남아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베트남 지역의 변화는 ‘북세남점(北勢南漸)’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중국문명의 우세를 배경으로 한 ‘남 티엔’(남쪽으로의 발전)은 11세기부터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참파 왕국의 저항력이 무너짐으로써 크게 가속된 것이다. 레 왕조 출현 직전 1407-1428년간 명나라가 다이베트(大越)를 점령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이 지역에서 중국문명 도입을 가속시킨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13-14세기 몽골의 고려 지배가 한반도의 중국화를 촉진한 것과 비슷한 계기가 아니었을지.


1527년 왕조 분립 이후 ‘남북대결’ 상태가 300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남쪽의 대결 주체가 남쪽의 토착세력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쪽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와 남쪽의 자원을 동원해서 북쪽에 대항하는 양상이었다.


1527-1592년의 기간은 북쪽의 막 왕조와 남쪽의 레 왕조가 대립한 ‘남북조’시대였다. 그러나 사실 레 왕조가 자리 잡은 탄호아는 하노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중국화된 북부 지역 내의 분열이었고, 새로 정복된 참파 지역은 대결의 주체가 아니었다. 1592년 레 왕조의 실력자 트린 퉁이 하노이를 함락해 남북조시대를 끝낼 때부터 진정한 남북대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 왕조가 탄호아로 밀려날 때 왕조를 지탱한 실력자는 구옌 킴이었다. 1545년 구옌 킴이 죽을 때 그 사위 트린 키엠이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구옌 킴의 아들 하나를 죽였다. 또 하나의 아들 구옌 호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1558년에 자청해서 남쪽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구옌 호앙은 1613년까지 55년간 남방을 개발하며 구옌 왕조의 기초를 닦았고, 1600년부터는 후에에 근거를 두고 트린 키엠의 아들 트린 퉁의 명령을 거부, 독립된 위치를 차지했다.


하노이의 트린 가문과 후에의 구옌 가문은 모두 명목상 레 왕조를 받들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 가문은 1627-1672년의 기간 중 전쟁상태에 있었고, 휴전이 이뤄진 뒤에도 치열한 경쟁을 다각적으로 계속했다. 이 기간에 구옌 가문이 약화되고 있던 크메르로부터 메콩 강 삼각주 지대를 넘겨받아 개발했다.


남방 토착세력이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1771년 후에보다 훨씬 남쪽 퀴논에서 일어난 타이손(西山) 봉기였다. 농민에 기반을 둔 봉기 세력은 1776년까지 구옌 가문을 축출했고, 1786년에는 하노이를 점령해 트린 가문까지 무너뜨렸다. 봉기 지도자 구옌 후에(阮惠, 1753-1792, 후에의 구옌 가문과 혈연이 없음)는 쿠앙트룽(光中) 황제를 선포하고 청나라 건륭제가 보낸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구옌 가문의 반격으로 1802년 무너진 이 왕조를 ‘타이손 왕조’라 한다.


구옌 가문의 잔여세력이 반격에 나서는 과정에서 사이공이 베트남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구옌 푹 안은 타이손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몰두했다. 1785년에 샴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패퇴한 후 프랑스 선교사 피뇨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피뇨 주교는 본국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여의치 않자 인도의 프랑스 식민지 퐁디셰리에서 인도인 부대를 동원해 프랑스인 자원부대와 함께 구옌 푹 안을 지원하게 했다. 이 혼성부대의 도움으로 1788년 탈취한 사이공을 거점으로 구옌 푹 안은 프랑스식으로 군대를 조직해서 북벌에 나섰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근 300년에 걸친 남북대결에서 북방 세력의 거점은 변함없이 하노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항하는 남방 세력의 거점은 탄호아에서 시작해 후에로, 퀴논으로, 사이공으로, 계속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노이는 몇 차례 남방 세력에게 유린당했다. 그러나 하노이를 장악함으로써 남북대결에 승리한 세력에게는 더 남쪽에서 도전세력이 나타났다.


남북대결의 마지막 단계에서 사이공을 거점으로 삼은 구옌 푹 안 세력은 바다로부터 온 유럽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근 1천 년간 중국문명의 힘을 배경으로 한 ‘북세남점’ 현상이 뒤집힌 것이다. 해양세력의 힘은 구옌 왕조를 세워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1788년 이후 베트남에 영향력을 늘려가던 프랑스는 1858년부터 나폴레옹 3세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베트남 정복을 시작했다. 1884-1885년의 청불전쟁을 치른 후 1887년까지 베트남 전체를 ‘프랑스령 인도지나’로 만들었다.


프랑스령 인도지나는 세 개 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제일 먼저, 1859-1867년의 기간 중에 점령당한 남부 지방은 ‘코친차이나’란 이름으로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1893년에는 라오스와 크메르가 코친차이나에 합쳐졌다. 북부의 ‘통킹’에는 총독부를 두고 약간의 자치를 허용했다. 그리고 중부 지역은 ‘안남’이란 이름을 붙여 구옌 왕조가 명목상의 통치권을 가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베트남’이란 나라 이름은 1802년 구옌 왕조와 함께 태어난 것이다. 조선이 건국할 때 명나라 황제에게 국호를 하사받는 형식을 취한 것처럼, 구옌 푹 안도 새 왕조를 세우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국호 하사를 청했다. 하노이의 왕조들은 오랫동안 ‘다이베트(大越)’란 국호를 칭해 왔다. 구옌 푹 안은 국호를 바꿔 받고 싶어서 ‘난베트(南越)’란 이름을 청했다. 그런데 이것이 한나라 때 광둥성 지역에 있던 나라 이름과 혼동된다 해서 글자를 뒤집어 보낸 것이었다.


이 국호와 함께 남북을 아우르는 국가의 실체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몇 십 년 후 베트남은 세 개의 토막으로 나뉘어져 서로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베트민(越盟)을 중심으로 건국 사업이 벌어질 때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 사람들의 반응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16도선의 분할만이 아니라 남북 사람들의 국가 인식 편차가 이후 역사의 진행에 적지 않은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