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미군정과 경찰은 노골적인 좌익 탄압을 다소 자제하고 있었다. 회담이 휴회되고 소련 대표단이 서울을 떠나자 다각적인 좌익 탄압이 시작되었다. 개성경찰서에서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 간부들을 검거했다는 짤막한 기사는 이런 상황의 한 끄트머리일 텐데, 지역 활동가들을 체포하면서 혐의사실조차 공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경기도 개풍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柳錫男과 동회 孔聖泰·李寬在 군 농민조합 총무부장·李鍾澤 등을 개성 경찰당국에서 검속하는 동시에 다수 서류도 압수하였는데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모르나 취조결과는 매우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경찰의 한국인 총수 조병옥과 장택상의 엽기적 언행을 여러 번 소개했거니와 그중 압권은 “우리 경찰진용은 사회추천에 의한 민선기관이 아니고 그 직원은 군정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명권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된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를 다 함으로써 의무를 다 하게 되어 있다.” 하는 조병옥의 4월 7일 발언이었다. (1946년 4월 7일자 일기) 경찰은 인민을 돌아볼 필요 없이 상급자의 명령에만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총수들이 이끄는 경찰의 인적 구성은 어땠는가? 해방 때 조선의 경찰 인원 2만 명 중 1만2천 명이 일본인이었고 8천 명이 조선인이었다. 미국인 경무부장 매글린(William Maglin) 대령은 1946년 11월의 한 회의에서 그 8천 명 중 5천 명이 군정청 경찰에 남아 ‘중핵(中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B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6쪽) 이북 지역의 식민지시대 경찰 중 상당수가 남하해서 군정청 경찰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은 하급 경찰관의 수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을 생각하면 식민지시대 경찰관의 거의 전원이 경찰에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이영희의 <대화>에 해방 후 경찰을 떠난 매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1946년 가을까지 군정청 경찰이 2만5천 명으로 늘어났으니 새로 들어온 사람이 2만 명이었지만, 경찰의 ‘중핵’으로서 분위기를 지배한 것은 5천 명의 ‘베테랑’들이었다. 해방 당시 이천경찰서 신갈주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1960년까지 경찰에서 계속 근무한 1916년생의 홍순복은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인물로 보이는데, 그의 회고에서 당시의 경찰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왜정 때 관여했던 모든 관리들, 또 행세했던 사람들을 숙청했어요. 좌익, 이른바 공산주의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그런 식으로 처리했던 거죠. 그런데 남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해방 직후에 어지러운 질서를 잡아나가자면 왜놈 치하에 있던 경찰의 능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이승만의 정책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병옥, 장택상 같은 분들도 사상적으로 박해받던 사람들이었는데도 자기네를 핍박했던 경찰들을 다시 채용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 아량은 보통이 아닙니다. 왜놈들이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 나쁜 것이지, 일제 때 경찰한 사람들이 행정적인 면에서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8-15의 기억> 235쪽)
그러면 당시 경찰은 어떤 태도로 인민을 대하고 있었을까? 장택상이 5월 2일 관하 경찰관들에게 발포한 포고문에 상당 부분 나타나 있다. 이런저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런 짓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니까.
월권행위에 빠지기 쉬운 일선 경찰진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동시에 법치국민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제 1관구경찰청장 張澤相은 2일 관한 경찰관리에게 고하는 다음과 같은 포고를 공표하였다.
1) 법치국 인민의 거택은 절대 불가침이다. 법률에 정한 규정에는 군경이라도 무단침입을 불허한다.
1) 경찰관리는 상사의 승인 없이 일반인민의 가택을 수색치 못하고 입택검문의 필요가 유할 시는 반드시 주인의 승인을 요한다.
1) 입택검문의 필요가 유하거나 관서로 동행을 요할 이유가 생할 시는 반드시 경찰관의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라. 인민은 신분증명서를 제시치 않는 경찰관에게는 동행을 거부하여도 무방하다. (단 정복관은 차에 불재함)
1) 현행범죄 [외에]는 경찰관리가 상사로부터 발행한 구인장 없이는 인민의 체포를 불허한다. 체포할 시는 반드시 구인장을 즉시에 제시하라.
1) 현행범은 비록 경찰관리가 아닌 일반인민도 범인을 체포할 권리와 의무가 유하고 체포 즉시로 경찰에 범인을 인도할 것
(<조선일보> 1946년 05월 0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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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인천 군정청의 결정 내용에서도 당시 경찰과 미군 헌병의 근무 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헌병이 민가에 들어갈 때 신발 벗으라고 한 (6)항이 이채롭다.
인천 미군정당국에서는 조선경찰과 MP사이에 상호협조책을 강구하고자 16일 부평 헌병대본부에서 관계자가 모여서 다음과 같은 요항을 토의한 후 결정하였는데 앞으로 성적이 좋으면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될 것이다.
1) MP는 원칙적으로 미군 급 군수품에 관한 범죄만 취급할 것
2) MP의 조선인에 대한 노상 신분검사를 금함
단 용의자 급 현행범은 MP본부에 동행하여 장교입회하에 통역관을 통하여 이를 취조할 것
3) MP의 조선인 요정 음식점 등의 임검을 금함
4) 미군인의 현행범 체포에 있어서 현장에 MP가 없을 때에는 조선경찰관이 이를 집행하여 미헌병대에 인도할 것
5) 직무집행 중 인원 등으로 경찰이 부족할 때에는 쌍방이 서로 협력 응원할 것
6) MP는 조선인 가옥에 침입할 때 반드시 탈화할 것
(<조선일보> 1946년 05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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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청 경무부의 브룸 소령은 4월 19일 담화문으로 경찰의 고문에 대한 일반인의 의심이 “허구한 낭설”이라고 일축하며 만약 경찰의 가혹행위를 신문에 보도하려면 증거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22일자) 그러나 악형과 고문의 존재는 3월 12일 러치 군정장관이 경찰서장들에게 보낸 성명서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12일 러취 군정장관은 경찰의 악형, 고문을 경고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남조선 각 경찰서장에게 보냈다. “지나간 6개월간에 경찰진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그러나 악형, 고문은 민주주의 이상에 역행되므로 이는 인도상 용서치 못할 것이다. 경찰제군의 분투를 축하하며 이상의 뜻을 이해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1946년 0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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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하지 자신도 한국의 경찰이 ‘민주경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정청의 미국인 고문들 중에도 그런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지는 그런 사람들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았다. 2만여 명의 경찰조직에 투입된 미국인 지휘관과 고문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경찰의 민주화보다 더 시급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조선 경찰의 구조와 조선인 인력을 온존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만큼 응집력을 가지고 좌익을 결연히 적대하는 다른 세력이 없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일본 지배에 봉사한 조선인 경찰관들은 협력자들을 배제하거나 처단하려는 정치집단의 득세를 막는 데 이해관계가 함께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이해관계 때문에 경찰은 다른 어떤 조선인 집단보다 강한 응집력을 가졌다. 조병옥은 자신과 하지가 남한 지역에서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해체할 능력을 가진 존재가 경찰뿐이라고 믿었음을 자서전에서 당당히 밝혔다. 미국 쪽 자료도 이 주장에 부합한다. (...) 전국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경찰력을 만들면 “지역적 유대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저항집단의 참가를 최소화”할 수 있고 “특정 지역사회에 너무 밀착된” 경찰관들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커밍스 위 책, 162-163쪽)
5월 12일 오후 독립전취국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선언문을 보면 반소-반공을 지상명제로 삼은 극우파 행사였다.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선대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린 제방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국제공약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도비한 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공안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국토와 국민을 량단하고 나아가 국시와 국권을 량분케 한 38의 교수선(絞首線) 문제도 소련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공의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소련의 권모와 인류적 특권이요 국제적 공리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소련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외력의 제압에 혈과 육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회억하고 다시금 외력의 방촌에 형과 체가 좌우되려는 현하의 고경을 직시할 때 우리는 타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보다도 원유를 자신에게 살피어 내성할 필요를 느끼나니 구기본원(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내구보다도 적은 우리 장내에 있고 외상보다도 균은 우리 체내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반역도당의 존재가 그것이며 타방에 추미하여 외모를 유치한 악질 공계(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수탁의 망론을 공언하고 민족적 거역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 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호전에 구안함이 본래 우리의 의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옥쇄로 나감도 우리의 책이 아니나 그러나 민족정기의 주축은 부동이라 행좌진퇴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배수진두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세계에 명시하여 여론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영겁에 호지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자아요 오직 자력이다. 자존·자지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자립·자행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자조·자면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집주시키어 해방조선을 거룩하게 하고 광부조선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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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대회가 끝난 후 시위행렬이 좌익(즉 극우파에 동조하지 않는) 신문사들을 습격한 것이다. 자유신문, 중앙신문, 조선인민보가 습격당했다. 신문은 당시 정치투쟁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신문사 습격이 자주 있었고, 신문사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나름대로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집회에 이은 시위행렬의 습격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지난 해 연말에도 조선인민보가 시위행렬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반탁운동으로 시내가 온통 들끓고 있을 때였고, 서울 시내 경찰서장들이 경교장에 충성을 맹서하러 떼 지어 몰려갈 때였다. 경찰이 제 구실 못한 것을 탓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1946년 5월 중순의 시점에서 급조된 정치집회 뒤의 신문사 습격을 경찰이 막지 못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은 여론의 비난을 못 이겨 14일에 독립전취국민대회 대회장 오하영 등 몇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더 중요한 일에 매달려 있었다. 적발된 위조지폐 사건과 공산당과의 관련성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탄압이 임박해 있었다.
대규모의 위조화폐사건은 시내 중앙경찰청과 본정서에서 관계자 11명을 검거하고 극비밀리에 조사 중인데 이들은 모 정당과도 관계가 있는 자들로 사건은 의외의 방면으로 파급되어 가고 있다.
돌연 8일에는 범인을 모처로 이감시키고 취조 중인데 이들이 발행한 위조지폐는 400여 만 원에 달함이 판명되었고 사건은 아직도 수사관계로 발표를 않고 있으나 취조가 끝나는 대로 근일 중에 정식 발표가 있을 터이라 한다.
◊ 趙炳玉 경무부장 담
“조국광복의 중대한 이때에 더욱이 위조지폐로 경제계를 교란시키는 자들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는 독립방해자이다.
이 사건은 중앙경찰청에서 방금 수사 중이므로 상세한 사건내용과 그 배후관계 등에 대하여는 아직 말할 수 없으나 조사가 끝나는 대로 사건전모가 발표될 줄 안다.”
(<동아일보> 1946년 05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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