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덕 선생님, 이렇게 존함을 적고 나니 가슴속에서 진동이 인다. 사람 이름을 떠올리면서, 사람 모습을 떠올리면서 가슴속에서 진동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만큼 선생님은 내게 있어 각별하시다.


선생님은 국문과 교수였었고 나는 그 학교의 졸업생으로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나를 선생님의 직계 제자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학을 다닐 때는 물론이고 대학을 졸업한 한참 후까지 나는 선생님을 모르고 지냈다.


선생님과 내 연(緣)이 맺어진 것은 선생님이 정년을 1년 앞둔 때였으니 선생님이 60대 중반쯤 되었을 때였다. 국문과를 졸업한 친구로부터 이남덕 선생님이 불교에 심취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 학교로 찾아간 것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교수실로 들어섰을 때 선생님은 한복을 입고 계셨고, 철재 캐비닛 위엔 연등이 놓여 있었다. 이화여대 교수실에서 연등을 본다는 것은 너무도 특이한 일이라서 나는 선생님의 당당함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날 한 시간 정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선생님의 어원 설명이었다. 선생님은 많은 낱말의 어원을 설명하시면서 “말의 어원을 찾다보니 우리말의 상당 부분이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셨다. 당신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을 설명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1년 후 선생님과의 재회가 태안사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 태안사에는 청화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선생님은 청화 스님을 친견한 순간 “내가 일생 동안 찾고 있던 스승을 드디어 만났다.”고 하시면서 그 절에서 바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셨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선생님이 대자암에서 내려오실 때까지 줄곧 절에서 생활하셨으니 청화 스님과의 만남은 선생님의 3막 인생을 연 역사적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크게 세 개의 산봉우리를 그리면서 사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하나는 10살 이내의 4남매를 혼자 키우면서 산 어머니로서의 삶이고, 또 하나는 교수로서 후학들을 키우며 산 학자의 삶이고, 나머지 하나는 부처님 제자로 귀의해 구도자로 산 삶이다.


내가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세 번째 산봉우리를 그릴 때였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있는 선생님은 언제나 불교와 연결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인도 성지순례를 선생님과 함께한 21일간의 기억이다. 한국교수불자회에서 인도 성지순례를 갔는데 나는 회원은 아니지만 그분들과 많이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성지순례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남덕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돼서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새벽 5시쯤 호텔 밖으로 나와서 넓은 대지를 바라보며 선생님과 함께 예불문과 천수경을 외웠던 기억, 영취산과 기원정사에 갔을 때 부처님 체온이 그대로 느껴져 함께 눈물 흘렸던 기억,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선생님이,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이제 그만 고생하고 같이 가자.”고 하셨을 때 “영이는 어떻게 하고요?” 반문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셨다는 꿈 얘기, 기억 뒤편에 숨어 있는 선생님과의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자면 한이 없다.


선생님이 대자암에서 쓰러지셔서 일산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지인을 통해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선생님은 의식을 차리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를 보는 순간 “당신이 어떻게 알고 왔수?” 하며 반기셨다.


그런 며칠 후 선생님의 셋째 아드님인 김기협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이 파주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렇게 좋아하시던 산책도 당신 힘으로 할 수 없는 환자가 되어서 침대 생활을 시작하셨다. 금강경을 외우며 산책하실 때의 그 낭랑한 음성, 듣는 사람까지도 행복감에 젖어들게 했던 그 산책을 선생님은 다시 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다.


파주 요양병원에서 점점 기력을 잃으신 선생님은 다시 일산 시내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게 되었다. 의식을 잃고 누워 계신 어머님을 보며 김기협 선생님은 장례 방법을 의논하셨고, 나는 마지막 입고 가시는 옷인 수의만은 제자들이 해드려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에 직계 제자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선생님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해 음식물을 드실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건강을 되찾아가셨다. 자세한 내용은 시병일기에 있으므로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간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구나, 하는 감동이다. 이남덕 선생님의 네 번째 생은 아드님인 김기협 선생님이 선사하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여주에 있는 세종너싱홈으로 옮기신 후 선생님은 마치 음유시인처럼 모든 대화를 노래로 하시게 되었다. 그런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로켓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듯이, 선생님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삶의 궤도를 뚫고 저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세종너싱홈에 처음 가던 날, 그때가 9월 중순쯤 되었을 것 같다. 나는 화창한 가을 하늘과 맑은 강물을 한 번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휠체어에 태워가지고 몰래 요양원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그리고 강가에 휠체어를 세워놓고 억새와 강물을 선생님 눈으로 보게 해드렸다. 그날 선생님과 나는 함께 동요를 부르며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다가 “선생님 우리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요.” 하고 청을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박수를 치시며 선생님 특유의 노래 가락으로 “그래 다시 만나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하며 화답하셨다.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지만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남덕 선생님과 나는 여주 강 언덕에서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기로 한 의식을 은밀히 치렀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만나게 될까? 선생님과 나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