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08:49
 

대구의 장 선생이 서울 온 길에 어머니를 뵈러 찾아왔다. 점심 때 같이 가면서 작년에 낸 책 두 권을 가져갔다. 요즘 병실에서 물러나올 때 "어머니, 저 이제 일하러 가요. 나중에 또 올께요~" 하고 둘러대는데, 그제는 내가 가는 것이 아쉬우신지 "무슨 일인데?" 물으신다. "책 쓰는 일이예요, 어머니." 하니까 눈을 둥그렇게 뜨시고 "네가 책을 써? 네가 뭘 안다고?" 하신다. 그래서 "저 책 잘 써요. 나중에 보여드릴께요." 하고는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는 어머니를 두고 나왔다. 어제는 증거물을 가져간 것이다.

장 선생의 인사를 받고는 "아는 분 같은데, 내가 기억을 잘 못하니 용서하세요." 멀쩡하게 인사를 차리시는 동안 내가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니 '뭔데?' 하는 눈길로 책을 쳐다보신다. 한 권 표지를 보여드리니 "밖에서 본 한국사..." 제목을 읽으시고는 다시 '뭔데?' 하는 눈길을 이번에는 내 얼굴로 돌리신다. 부제를 손가락으로 짚어 드리니 "김기협의..." 읽다가 나를 돌아보며 "이 김기협이가 너냐?" 물으신다. "네, 저예요." 대답을 들으시고는 다시 표지를 들여다보며 "김기협의 역사에세..." 읽다가 도저히 못 참으시겠다는 듯 "하!" 터뜨리신다. 탄성은 절대 아니고 콧방귀 비슷한 건데 이런 걸 뭐라 하더라? 비웃음? 아닌데. 기맥힘? 어처구니없음?

"저건 또 뭐냐?" 앞에 보이는 책에는 더 관심 없으시다는듯 또 한 권을 쳐다보며 물으시기에 "이것도 제가 쓴 책이예요, 어머니." 하고 표지를 보여드리니 "뉴라이트 비판... 이건 뭔 소리냐?" 제목을 읽다가 물으신다. "요새 뉴라이트라고 까부는 애들이 있어서 제가 꾸중한 책이예요." 하니까 얼굴도 돌리지 않고 눈알만 돌려 나를 흘겨보시면서 "니가 누구를 꾸중해?" 하고는 장 선생을 바라보며 "우리 아들이 책 쓴다고 하면 제가 막 걱정이 된다우." 장 선생이 "왜요, 다들 잘 썼다고 하는데요?" 하니까 정말 걱정되신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시고 "에이, 그럴 리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가 장기인 엉구럭에 나섰다. "어머니, 제 책 본 이들 중에 저를 석학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석학." 하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듯 "석학?" 하시더니 생각나셨다는 듯 "아하하하하!" 파안대소를 터뜨리신다. 그 소리에 놀라 방 저쪽에 있던 간병인들이 쳐다보고 어머니 기분이 좋으신 듯하니까 저희들끼리 웃는다. 어떤 사연으로 터져나오신 폭소인지 모르기 망정이지~

일전에 내 나이를 아시냐고 여쭐 때도 "서른 좀 넘었지?" 하셨던 것처럼, 20여 년 전의 상황이 어머니가 세상을 인식하시는 표준모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년퇴직 하신 86년이 그 계기가 아닐까? 그저께 아내가 모시고 앉았을 때 불현듯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하나? 밥이 어디서 들어오지?" 하시더라는 이야기도 생각난다. 아내가 "든든한 아드님이 세 분이나 있는데 무슨 밥 걱정을 하세요?" 하니까 "걔들이 무슨 재주가 있기에... 걔들이 벌어주는 밥 내가 먹어본 적이 없어." 하셨단다. 의식이 파편화된 경계선 중에 굵은 것 하나가 퇴직을 가로지르는 것 아닐까?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였으니까.

든든한 아드님 세 분 얘기 나오고 보니 그중 하나에게 어제 전화한 생각이 난다. 입으로 식사를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작은형에게 전화해서 용태를 알려드렸다. 통화하는 내내 자기가 어떤 일 어떤 일에 쫓겨서 그 사이에 다시 가 뵙지 못했다는 변명에 바쁘다. 내가 참 시병하다 보니까 성질  많이 좋아졌다. 그런 변명을 욕지거리 하나 없이 들어 주다니. 그 사이에 용태를 묻기 위해 내게 전화하지 못한 사정에는 왜 변명이 없나! 신선놀음 하려면 변명이나 없이 하면 좋겠다.

음식 참 맛있게 드신다. 다음 주 중에는 틀니를 넣어드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기력도 의식도 회복이 빠르시면 활동 욕구가 늘어나실 텐데, 중환자실의 틀을 벗어나실 가능성도 이제 생각해야겠다. 같은 병원 내의 일반병실로 옮길 가능성.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2중 체제로 전환한 자유로 병원으로의 복귀 가능성. 불교 계통 요양원으로 옮길 가능성. 3월 초 큰형이 다니러 올 때 구체적인 의논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알아봐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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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