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많이 또렷해지셨지만, '착란'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랑 편안하게 말씀하시다가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한 차례 돌리실 때, 불쑥 정중한 경어체가 나오곤 하신다. '내 아들'이 순간적으로 '누군가'로 바뀌는 것이다. 기억의 집합이 여러 개 덩어리로 쪼개져 있으신 것 같다. 한 덩어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에는 보통사람과 별 차이 없는 사고력을 유지하시다가 다른 덩어리로 넘어가실 때는 인식과 사고가 모두 단층을 일으키는...
오늘은 점심 식사 나오기에 앞서 시간 여유가 많이 있었는데, 그 동안 금강경을 아주 즐겁게 들으셨다. 어떤 날은 펼쳐 드리면 입안으로 읽으시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시기도 하고, 엊그제는 "금강경 읽어 드릴까요?" 하는데 "책을 꼭 읽어야 하니?" 하고 딱하다는 듯이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오늘은 펼쳐 드리고 "손수 읽으시겠어요?" 했더니 "네가 읽어 다고." 하신다.
나는 절에 꽤 다녔지만, 금강경을 일삼아 읽은 것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놓은 뒤의 일이다. 1년 가량 꾸준히 읽으니 내용이 많이 익숙해져서 현토 한문 읽는 식으로 소리내어 읽는 것이 내 기분에 썩 괜찮다. 절에서 독경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식이다.
오늘은 내가 읽는 동안 펼쳐 드린 경문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는 등 만족한 기색을 보이며 기분좋게 들으신다. 더러 나지막하게 "잘 읽는군." 평도 하신다. 잘 들어주시는 바람에 신이 나서 꽤 여러 장을 읽고 더 계속할까 어쩔까 잠깐 쉬며 눈치를 살피는데 어머니께서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탄복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젊은 사람이 썩 잘 읽는군." 그리고 "요새 참..." 하고 말을 흐리신다.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수준과 다르다는 말씀인 듯.
내가 "어머니, 제 나이가 몇인지 아세요?" 했더니 별 걸 다 묻는다는 듯이 "니 나이? 서른 좀 넘었잖니?" 그래서 "어머니, 제가 서른만 넘은 게 아니라 마흔도 넘었어요." 했더니 눈이 둥그래져서 "그래?" 하신다. 내가 이어 "마흔만 넘은 게 아니라 쉰도 넘었어요." 하니까 고개까지 쳐드시며 "뭐? 그럴 리가!" 하신다. "어머니, 제 나이가 이제 육십이예요, 육십." 소리를 듣고는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서 말씀도 나오지 않으시는 형색이시다. 이건 장난으로 그러시는 게 아니다. 진짜 놀라신 거다.
일전부터 병실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 이마에다가 뽀뽀 좀 해드려도 될까요?" 여쭈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는데, 뽀뽀해 드리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어 빠이빠이를 하시기도 한다. 서운한 마음이 잘 안 드시는 것 같고, 내 기분도 낫다. 원래 그런 징그러운 짓은 큰형 전공인데, 의식이 혼미하실 무렵에 나도 버릇을 들였다. 의식이 또렷해지신 두어 주일 전부턴 하지 않게 되었었는데, 며칠 전부터 다시 시작하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에 좋은 것 같다. 아들 노릇 잘할 길이 참 많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