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점심 때는 장난기가 대단하셨다.
식전에 갈아놓은 배를 드리는데, 무척 맛있어 하시는 것을 두 숟갈만 드리고 치워놓았다. 식후에 드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장 여사 훈수에 따른 것이었다. 좀 삐지셨는지, 내 얼굴도 안 쳐다보시고 내 말씀도 못 들은 척하신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척, 사진첩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반대쪽 면을 어머니에게 보이게 하니, 눈길이 사진에 꽂히신다.
몇 장 보여드리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다섯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머니 앞에 펼쳐놓고 있는데, 주 여사가 곁에 와 아버지를 짚으면서 이 분이 누구시냐고 묻자 "나 아는 사람이야~" 하신다. 애매할 때 많이 하시는 수작이시라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데, 덧붙이신다.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이야~" 삐딱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을 왜 똑바로 대답하나, 먹물 티 내시는 거다. 흥이 나서 또 덧붙이신다.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지."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 하고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야~" 0촌과 1촌의 차이까지도 명확하게 인식하시는 것이다.
흥에 너무나 겨우신지, 이제 나까지 집적거리신다. "이 사람 너하고는 어떤 관계냐? 너도 잘 아는 사람 아니냐?" "그러믄요, 어머니. 어머니랑 가까운 관계라면 당연히 저랑도 가까운 관계죠." 그러고 한두 차례 오간 뒤에 (그 내용은 벌써 잊어버렸다. 아깝다.) 내가 엄살을 떨었다. "어머니,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 아니세요?" 그러자 대뜸 나오시는 대답이 "그래, 내가 너를 좀 놀렸다. 좀 놀리면 안 되냐?" 그리고는 기가 막혀 하는 내게 덧붙이신다. "내가 너를 놀리지 않으면 네가 너무 심심하지 않겠니?"
한 달 전까지 "아침," "점심" 외마디소리 겨우 따라 하시던 분 맞나? 요새 식사 후에는 식곤증을 느끼시는지 노곤한 기색을 보이시는데, 어제는 그런 상태에서 말문이 터져 퇴직 전 학교 시절 이야기를 길게 하셨다. 노곤한 상태에서 생각 닿는 대로 말씀이 오락가락하니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하나의 갈피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대꾸를 넣어 가며 부추겨 드리니 사설이 5분 가량 계속되셨다. 끝에 "학생들 편에 서겠나, 학교 편에 서겠나, 참 어정쩡한 입장이었지." 하는 말씀에 내 추임새가 좀 오버했나보다. "네, 어머니. 인간이란 게 원래 어정쩡한 존재잖아요." 그랬더니 재미난 얘기 들었다는 듯이 "어? 그게 무슨 뜻이냐?" 하고 따라 나오시는 바람에 회상으로부터 빠져나오시고 말았다.
어머니의 반응이 활발하지 않으실 때는 그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내 멋대로 떠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재미있게 노실 때는 그 노시는 모습을 그려내기 바빠 딴 생각 할 겨를이 없다. 할 수 없지, 모처럼 보여주시는 활기찬 모습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단계에 이르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또 딴 생각도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런데 요새처럼 회복이 좋으셔서는 불원간 "너 요새 쓰고 있는 게 뭐냐? 가져와 봐라." 하고 검열에 나서시지나 않을까 걱정까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