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통일이란 말이 어떻게 쓰여 왔나?

 

통일이 민족의 과제로 떠오른 것은 분단의 상황 때문이다. 19458해방때까지 한반도의 민족사회는 국가를 갖지 못한 식민지 상태에서도 하나의 나라로 존재해 왔다. 그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일제 말기의 내선일체주장이나 국어(일본어)통일정책에 대한 광범하고 확고한 반발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통일<동아일보> 기사를 검색하면 1945년에 74건의 기사가 나타난다. 그 해 121일에 복간되었으므로 한 달 동안의 기사다. 이듬해부터 3년간 해마다 5백여 건씩 보이다가 분단건국 이듬해인 1949년에 1020건으로 늘어난다.

1950416, 1951292, 1952374건으로 줄어든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1953649건으로 늘어나 1959년까지 500건 내지 1천 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9601152, 19611210건으로 늘어난 것은 4-19혁명의 여파였다. 1962603건으로 다시 줄어들고 1969년까지 500건 전후를 오락가락한 것은 민족통일을 기피하는 초기 박정희 정권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19721397, 19731195건으로 치솟은 것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둘러싼 정세 변화 때문이었지만 1974년부터 1986년까지는 연 1천 건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6699건에서 19871348건으로 갑절로 늘어난 것은 민주화에 따른 현상으로 보이며, 1997년까지는 1500건에 못 미치는 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981183, 19991083건으로 좀 줄어들었다. (검색된 기사 중에는 통일이 남북통일 아닌 다른 뜻으로 쓰인 것도 더러 끼어 있지만 세밀히 걸러내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37년 동안 통일 논의가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된 상황을 기사 분량의 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재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된 1960-61년에 (그리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남북관계가 부각된 1972-73년에) 기사 수가 많았던 것은 그 밖의 시기에 통일 논의가 원활하지 못했던 사실을 반증한다.

그런데 이 37년의 세월이 통일의 실질적 의미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말 통일운동에 앞장선 문익환(1918-1994) 선생의 자세에서 이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문 선생이 통일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데서는 변화 이전의 의미,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제창한 데서는 변화 이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II. 미국이 한반도 분단건국에 집착한 까닭

 

1945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역 분단은 날벼락이었다. 주민들의 생활권과 경제권이 갈가리 찢어지고 틀어 막혔다. 지속적 민족분단의 위험을 차치하고도 이 분단 상태 자체가 식민지시대에도 겪은 일이 없던 총체적 질곡이었다. 19458월에 한반도를 찾아온 것은 해방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보다도 더 불합리하고 악랄한 분단 점령이었다.

이 분단은 3년의 점령기 동안 갈수록 강고해져서 결국 분단건국에 이르게 된다.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민생(民生)의 원리에도 역행하는 분단의 고착화는 두 점령국의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다수 인민이 반대했지만 남북의 외세 의존세력이 분단을 부추겼고, 이에 대한 지식층과 인민의 저항은 이적행위나 적대적 책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두 점령국 모두 솔로몬의 판결에 나오는 가짜 어미처럼 아기를 죽여서라도 자기 몫을 챙기려 들었다. 그런데 가짜 어미들 사이에도 잔혹성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위치에 있고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 상황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영향력 확보를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펼 필요가 적었다. 그래서 점령 직후부터 행정과 치안을 조선인의 인민위원회에 맡길 수 있었다.

미국의 이남 점령정책은 이북의 소련 정책에 비해 무리하고 거칠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오랫동안 뜻을 두고 주의를 기울인 반면 한반도 남반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얼떨결에 맡게 되어 키워놓은 군정 요원도 없었다. 또한 먼 곳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구나 현지 사정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체제를 세우기 위해 민심에 거스르는 정책을 펴야 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뒤를 잇는 군정청이 행정과 치안을 독점해야 했고, 협조세력으로 친일파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래서 38선의 강화를 통한 분단의 고착을 주도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군정은 1946538선 통행을 일방적으로 제한하고 나섰고 물자의 이동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38선 이북의 저수지에서 물을 받는 연백평야의 물 값 지불을 거절하고 이북의 송전에 대한 전기 값 지불도 회피하다가 19485월 송전 중단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했지만 이 점에서도 미국 쪽이 더 강경했다. 통일된 민족국가가 어떻게든 세워질 경우 미국의 무리한 정책방향을 받아들일 개연성이 적고 미국의 협조세력인 친일파의 입지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점령군의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등 민족 독립을 지지하는 척 생색을 내면서 미국의 분단건국 집착에 편승해서 실속을 차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미국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1949년의 핵실험 성공 전까지 소련의 전략노선이었다.

 

 

III. 북한 평화공세의 근거

 

분단건국은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민심을 역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양쪽 정권은 그 염원에 부응하는 시늉으로라도 통일정책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북에서는 이남에 비해 민족주의 노선을 포용하는 국가체제를 세울 수 있었고, 그를 기반으로 적극적 통일정책을 펼 수 있었다. 반면 민족주의 세력이 거세되고 배제된 남한 독재정권은 국민의 통일 염원을 왜곡해서 북진통일이란 구호로 대립의 격화만을 꾀하면서 일체의 평화통일논의를 이적행위로 몰았다. 조봉암 처형의 결정적 이유도 평화통일 주장에 있었다.

북한은 분단건국 직후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공산중국의 대륙 석권에 고무되어 무력통일 노선에 나섰고, 전쟁에 실패한 뒤에도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는 동안 그 노선을 지켰다. 그러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평화통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19608-15 경축대회 연설 중 김일성은 연방제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선 당국이 남조선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아직도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민족적으로 긴급하게 나서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이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호상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분단건국 이전부터 이남 건국세력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이북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한 좌익이 유리한 결과를 얻을 것을 꺼려서 회피했다. 이 우려를 감안해서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 적대행위의 위험을 줄이고 협조의 기회를 늘리자는 연방제 제안은 현실적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서 무력통일 노선에서 평화통일 노선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시점에서 북한 측이 이념과 국력 양면에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7-4공동성명 후 1년이 지난 19736월에는 연방제 제안을 더 구체화한 고려연방공화국제안이 나오고 198010월에는 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더 점진적 방안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제안이 나왔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 련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련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을 지도하며 련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에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로 되어야 합니다.”

 

이 시점까지 통일에 관해 북한 쪽이 평화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남한 쪽은 정세에 떠밀려 7-4공동성명에 나선 외에는 어떤 평화적 통일 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평화통일 주장을 내놓은 김대중은 그것 때문에 빨갱이로 몰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남한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상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IV. 문익환 통일론의 양면성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국제적 위상이 올라간 남한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건국 이래 싸잡아 적대시해 온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앞의 두 차례 대회가 반쪽으로 치러진 뒤였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특별히 큰 관심을 모았다. 결과가 대성공이 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개혁-개방으로 나서는 등 공산권의 결속력이 이미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헝가리 등 남한과 수교에 나서는 나라들까지 나타났다.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진행 때문에 북한에 대한 자세도 유화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웅산 테러에 불구하고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특사를 교환하며 정상회담을 타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북방정책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1987년 여름 민주화가 이뤄지자 민간의 통일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임수경, 황석영, 문익환 등 각계 인사들의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북한 방문이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며 통일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통일의 의미는 40년 전 분단 당시와 같을 수 없었다. 문익환 선생의 당시 메시지 중에서 이 변화의 양쪽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문 선생은 통일이라는 과제에 어떤 대가라도 아깝지 않은 절대적 가치가 실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단 당사자 세대의 관점이다. 30세 무렵에 분단 과정을 겪은 문 선생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분단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문 선생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제창했다. 이것은 40년이라는 분단 기간을 고려한 현실적 관점이 반영된 주장이었다. 분단 기간이 길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통일을 선언하기만 하더라도 바로 분단이 해소되고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 기간의 분단 상태 속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고착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단의 해소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분단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것은 민족공동체에게 생살 찢는 아픔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던 사람들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고, 경제공동체의 파괴로 고난을 받아야 했다. 진행되고 있는 분단을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절규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힘 앞에 파묻혀 버렸다. 분단이 건국으로 완성되고 전쟁까지 겪은 뒤에도 사람들은 어느 날 그 분단이 무효로 돌아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찢겼던 생살은 엉성하게라도 아물었다. 반토막난 민족사회라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틀이 잡혔고, 정든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생이별을 겪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노인이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분단에 따른 생이별을 겪어보지도 않고, 반토막 민족국가에 태어나면서부터 길들어진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민족통일이 이뤄지더라도 그에 적응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통일이 이제 필연의 과제가 아니라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덩어리 민족공동체를 잘라내는 분단은 폭력행위였다. 그런데 이제는 두 덩어리 국가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통일 과업에 폭력의 성격이 곁들이게 된 것이다. 도덕적 평가와 관계없이 엄연한 현실의 문제다. 통일에 너무 많은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경우 실제로 이뤄지기가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V. “목숨 바치는통일, “정성 다하는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내가 어렸을 때는 셋째 절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고 불렀다. 언제 누구 손으로 바뀐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시대의 변화를 잘 나타낸 개사(改詞)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무조건 이뤄야 할 과제로만 여기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 마음이 그만큼 불안해지기 때문에 성취가 더 힘들 수 있다.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길이 열릴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이뤄야 할 절대적 목표의 설정은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다. 목표의 가치에 대한 자기 믿음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지난 70년간 분단 상태를 겪어온 데 모든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고, 그 부끄러움 위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분단을 강요한 외세나 분단에 앞장선 일부 세력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니다. 식민지시대에 숨 쉬고 산 죄밖에 없던 선량한 사람들도 그 죄까지 반성해야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분단시대를 진심으로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밥 먹으며 산 죄까지 반성하며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물질적 욕심만이 아니라 정신적 욕심까지도.

겸손한 마음으로 통일의 과제를 다시 바라본다면, 민족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완전한 통일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통일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담은 부차적 과제들이 눈에 들어온다. 분단에 대립이 따랐기 때문에 전쟁도 겪었고, 많은 국방비를 소진했고,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했고, 극심한 단절로 분단의 고통을 극대화했다. 민족의 화해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립을 줄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과제다. 이러한 취지에서 1990년대 중반 민족화해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95815일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에 그 뜻이 담겨 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를 요구해왔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 얻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우리를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체험하고 있는 분단은 사랑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분단의 상황이 반세기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것은 우리 겨레가 하느님이 명하신 화해와 일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분단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의 겨레는 그 잘못을 겸허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겨레는 공동체적 죄악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일치와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과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추기경 말씀에서 인용한 성서와 그리스도의 뜻만이 아니라 민족 대의에 따라서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지금 이 사회에는 분단 극복의 의지를 분명히 가진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 그 사람들의 도덕적 문제 이전에 지금까지 이 사회가 처해 있던 상황에 있는 것임을,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함께 반성하는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한다. 그래야 함께 반성하는 사람들을 늘리고, 진심으로 분단 고착을 원하는 극소수 반동세력을 고립시켜 분단 극복의 성공 가능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VI. 미국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나는 민족의 통일아닌 화해를 목표로 삼기로 했다. 분단건국이 이뤄진 뒤에 태어나 대립을 조장하는 정치체제 아래 자라난 우리 세대에게 통일은 추상적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극단적 대립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의 극복보다 대립의 해소가 더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대립의 해소가 어떤 이득을 가져올지는 내가 굳이 설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을 만큼 잘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의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온 상황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

1945~48년 사이 해방에서 분단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 <해방일기>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북한 개방이 실패하는 과정을 살펴본 <냉전 이후> 작업을 통해 나는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 분단의 근본 원인임을 밝혔다. 해방공간에서 미국의 정책이 분단의 구조와 동력을 제공했고 소련은 그에 소극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1990년대에 북한의 종주국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북한의 개방 의지를 가로막은 것은 세계경찰 역할을 위해 악의 축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네오콘 정책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미국의 반동세력은 중국 견제를 위해 북한의 고립상태를 원했다. 그 의도는 근년 사드 배치 문제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사드 문제에서 미국의 반동노선이 한계에 이른 것을 느낀다. MD(미사일방어)는 현실적 가치가 없는 무기 개념이다. 공격에 비해 월등 높은 수준의 기술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MD의 공격대상은 소련도 아니었고, 중국도 아니고, 미국 국민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을 집권세력과 밀착관계에 있는 군수산업에 쏟아 넣는 통로일 뿐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이 엄살을 떨고 있지만 속으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표정관리에 바쁠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아주 작은 기술적 부담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이득을 한-미간 혈맹관계 해소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트럼프의 등장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미국의 헤게모니 상실 추세를 10년 전에 이렇게 설명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미국의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 쇠퇴 단계의 영국 경우처럼,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는 국내외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적 지위 악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처럼, 비록 덜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자본은 이러한 악화에 대해 세계적 금융 중개업으로 특화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맞섰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상황은 런던이 해외 제국을 포기하고 불만스럽지만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의 하위 파트너에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세계의 주도적인 채권국으로서 예전의 지위를 상실하는 데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소요되었다. 두 차례 전쟁으로 영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재정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대로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일찍 그리고 더 심각하게 채무국이 되었는데, 미국의 소비주의적 경향만이 아니라, 영국이 자국의 헤게모니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세계 남측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군대를 공짜로 끌어 쓸 수 있는 인도가 미국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은 이들 군대와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무기에 돈을 치러야 했다. 그 위에 해외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수탈하기는커녕,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의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자본을 위해 기를 쓰고 경쟁해야만 했다.” (죠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71-272)

 

지금의 젊은이들은 미국을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자라난 우리 세대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고 생활한다. 단순한 분단 이전 상황의 복원이 아닌, 21세기 상황에 맞는 민족 통일의 길을 그들이 열어 나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자세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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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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