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과제의 출현

 

통일의 과제는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 이남과 이북이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제기된 것입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통일로 검색하면 1944년까지 이 말이 나타나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없었는데, 1945년에 74건의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듬해부터 3년간은 5백여 건씩 보이고 분단건국 이듬해인 1949년에는 1020건으로 늘어납니다.

1950년에 416건으로 줄어들고 이듬해 292, 그 이듬해 374건으로 더 줄어든 것은 전쟁 때문이었겠지요. 전쟁이 끝난 1953649건으로 늘어나 1959년까지 500건 내지 1천 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9601152, 19611210건으로 늘어난 것은 4-19혁명의 여파로 이해됩니다. 1962603건으로 줄어들고 1969년까지 500건 전후를 오락가락한 것은 초기 박정희 정권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19721397, 19731195건으로 치솟은 것은 10월유신과 적십자회담 등 남북 간의 접촉 때문일 것이고, 1974년부터 1986년까지는 1천 건을 넘기는 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6699건에서 198713481348건으로 갑절로 늘어난 것은 민주화에 따른 현상으로 보이며, 1997년까지는 1500건에 못 미치는 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1183, 19991083건으로 꽤 줄어들었습니다. (검색된 기사 중에는 통일이 남북통일 아닌 다른 뜻으로 쓰인 것도 약간 끼어 있지만 세밀히 걸러내지 않았습니다.)

시기에 따라 많이 쓰이고 적게 쓰이는 굴곡은 있었지만, 남북통일은 지난 72년간 한국인의 과제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가진 실질적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 변화와 차이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2. 통일 논의의 전개 양상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 생각해 보죠. ‘국가를 잃고 있던 식민지시대에도 조선은 하나의 나라로서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도 내선일체국어(일본어) 통일에 사람들이 반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해방이 되고 미-소 점령지역으로 분단되었을 때 통일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친척, 친구 간의 방문에 국경을 넘는 것 같은 어려움이 따르고 사업상의 거래관계가 모두 막히게 된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연백평야 곡창에 20리 북쪽의 저수지 물을 대지 못하게 되었고, 발전설비가 부족한 이남 지역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게 되었는데,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물 값, 전기 값 지불을 퍼주기로 여겼는지 제대로 치르지 않아 민생과 산업을 파탄에 빠트렸습니다.

3년의 점령기가 지나는 동안 38선의 장벽은 더욱 강고해졌고, 결국 분단건국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전쟁을 겪으면서 남북의 정권은 상대방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지요. 제 또래들은 북한의 빨갱이를 뿔 달린 괴물처럼 여기도록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30여 년 후 북한을 처음 가본 황석영 씨가 방문기 제목에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겪고도 통일을 원하는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내걸었지요. 북한 측과 의논해서 통일에 합의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적대정책이었습니다. “평화통일주장은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내세웠을 때 당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는 몇 해 후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했고, 2011년에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반공정권이 무너진 후 억눌렸던 민간의 통일 논의가 크게 일어났으나 5-16쿠데타 후 다시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1970년대 초 세계 정세 변화에 따라 남북대화의 길이 잠깐 열렸지만 박정희 정권은 민간의 통일 논의를 계속 틀어막았습니다. 1987년 군사정권 종식 후에야 통일 논의가 열리게 되었고, 남북 간의 교류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에 따라 통일 논의가 새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분단 상태는 약 40년간 냉전의 체제 대립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전 해소로 남북통일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갖춰진 셈이지요. 그 상황을 이용해서 한반도 긴장완화 노력이 1990년대 초에 펼쳐졌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북한이 핵사찰을 허용하고 그 대신 핵발전소 건설 등으로 연료문제를 해결해 주는 제네바합의가 1994년 타결되었으나 미국의 부시 정권이 2001년 북한에 적대정책으로 돌아서면서 합의가 파기되었고, 그 후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해서 200610월 제1차 핵실험에 이르게 됩니다. 1990년대 초에 실체 없는 의혹으로 불거진 북핵이 현실화되면서 그 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3. 통일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차이

 

1987년 남한의 민주화 무렵에는 남북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다른 변화들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의 경제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에 통일 문제를 놓고도 북한이 공세적 입장을 취해 왔지요.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는 남한 경제력이 크게 자라나,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는 공산권 전체를 상대로 전례 없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로 이어질 공산권의 약점이 1987년 무렵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헝가리를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이 남한과 교역을 늘리고 수교까지 하게 되면서 북한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지요.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동유럽 방면에서 활발하게 펼쳐졌지만, 결국 바라보는 방향은 북한이었습니다.

분단 후 약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정세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반공 군사정권이 종식되면서 억눌려 있던 통일운동이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운동에 앞장선 한 분, 문익환 선생의 주장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을 저는 중시합니다.

그 하나는 통일의 절대적 가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민족통일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이뤄야 할 절대적 과제라고 그분은 주장했지요. 이것은 분단 당사자 세대의 입장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1918년생의 문 선생은 30세 무렵에 분단 과정을 겪었지요. 그 과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그 세대의 입장이었습니다.

또 하나 주장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말씀하신 것이죠.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분단은 현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 선생 세대와 달리, 다음 세대 사람들은 함께 자란 사람들끼리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일이 없었지요. 그러니 우리 민족이라 하더라도 구체적 인간관계가 뒷받침해 주지 않는, 다소 추상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체제 아래 살아오면서 가치관과 생활감각에도 상당한 차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의미 회복을 위한 과정을 제안한 것입니다.

1950년대에서 4-19혁명기까지의 통일운동은 분단의 원천무효를 주장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원천무효 선언만으로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즉각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통일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출발점으로부터 하나의 과정, 한편으로는 통일의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통합성을 확충해 나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을 그분은 제창했습니다.

분단 과정을 직접 겪은 당사자 세대에게 분단은 생살 찢는 아픔이었습니다. 함께 살아오던 가족, 친척, 친구들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갈라져야 했으니, 많은 죽음을 한꺼번에 겪어야 했던 셈입니다. 그 세대의 통일운동에는 갈라졌던 가족, 친척, 친구들을 되찾겠다는 의미가 얹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찢어진 상처는 엉성하게라도 아물어 갔습니다. 이후 세대에게는 남북으로 갈라진 친구들이 없고, 친척이라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 온 추상적 존재일 뿐이지요. 한편 서로 다른 체제 속에 살아오는 동안 이질감이 늘어났습니다. 한 덩어리 민족 집단을 둘로 쪼갠 1940년대 후반의 분단 과정에 폭력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두 덩어리 주민 집단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 과업에 폭력성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4. ‘통일보다는 통합

 

분단 당사자 세대에게는 통일이 필연의 과제였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치를 추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가치들의 성취를 위해 통일이 유리한 길이라면 우리가 선택할 것이고, 불리한 길이라면 거부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통일이 우리 민족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줄 것이라면 통일을 선택할 동기가 커지겠죠. 그러나 통일로 인해 지금보다 인권과 자유에 제약을 겪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 발전에 유리한 점이 많으리라는 사실은 개성공단의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의 천연자원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고, 대륙과의 물류(物流) 조건도 크게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남북통일을 위해 양쪽 체제를 절충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북한의 낮은 자유와 인권 수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남한 체제의 좋은 점을 양보하고 싶지 않죠. 그렇다고 남한 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만 남한 체제에 가깝게 바꾸라고 요구한다면 통일이 아예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일보다 통합이란 말을 더 쓰고 싶습니다. “통일이라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뜻인데, 분단 직후에 적합하던 이 말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데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죠. 꼭 균질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접고, 대립을 지양하며 서로 돕는 가까운 사이가 되는 정도로 목표를 낮추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통합은 유연성을 가진 말이어서 아주 긴밀한 통합에서 꽤 느슨한 통합까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최소한의 느슨한 통합을 일단 해놓으면 그것이 당사자들의 마음에 들 경우 더 긴밀해져서 결국 통일에 이를 수도 있겠죠. 처음부터 화끈한 통일 아니면 안 된다고 꼭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통일의 목표에 유연성을 가하려는 노력도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20006-15 남북공동성명 제2항은 이런 내용이었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단일국가를 궁극적 목적으로 하되 그 과정에서 연방 형태의 통합을 먼저 하자는 제안은 김일성이 19608-15 경축대회에서 내놓은 이래 북한의 전형적 통일방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연방제라는 말 자체가 빨갱이로 몰렸던 것인데, 2000년까지도 색깔론이 등등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 측에서 비슷한 내용을 연합제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죠.

북한의 연방제 제안에 처음에는 평화공세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연방공화국을 만들면 국론이 다양한 남한보다 북한 측 의지를 관철시키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공산권 붕괴 후에는 방어적 자세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19934월에 발표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중 제5항에는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들어간 것이죠.

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은 후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한 것은 완만한 통합 과정을 거쳐 장기적으로 통일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대만에게도 비슷한 통합 과정을 제안하고 있지요. 우리도 문익환 선생 말씀처럼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생각한다면 어려움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고쳐 부르는 통일의 노래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통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제가 어렸을 때는 셋째 절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제 누구 손으로 바뀐 것인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잘 나타낸 개사(改詞)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분단의 극복에 따르는 이점을 일반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 이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