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부터 일반 독자 상대의 글쓰기를 열심히 해오다가 작년 이맘때부터 작업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공부가 일반 독자를 상대하는 글쓰기에 꼭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공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내려는 것인데, 일반 독자들은 이미 통용되고 있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마침 학교에 있던 또래들도 은퇴하는 무렵이라, 나도 프레시안 필진에서 은퇴했다.

 

그 동안 해온 일반 독자 상대 글쓰기가 내게는 가치있는 일이었다. 내 공부가 현실의 수요에서 벗어나 우활한 것이 되기 쉬운데, 일반 독자를 의식하려는 노력이 나를 현실 세상 안에 붙잡아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작업을 계속할 세월에 한정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공부의 목적에 더 집중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매달리려는 "필생의 작업"을 어느 방향으로 펼쳐갈까, 여러 모로 생각을 굴려봤다. 그러다가 교수직을 떠난 후 돌아보지 않던 "연구작업"으로 돌아갈 생각이 차츰 들었다. 연구점수를 위해 형식 갖추기에 급급한 연구작업에 묶이지 않고 내멋대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자세로 20여 년 지내 왔는데, 이제 평생의 공부를 모아 후세에 남기려면 역시 탄탄한 연구성과물의 형태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내 마지막 연구작업이 되었던 학위논문 "마테오 리치의 중국관과 선교노선"이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논문을 제출할 때 서중석 교수가 보고 그가 당시 주관하던 역사비평사에서 책으로 낼 것을 권했지만, 당시 동양사학계에 내 안티가 많았기 때문에 껄끄럽게 생각되어 사양했다. 그리고는 다시 책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작년에 글쓰기를 늦추고 돌아보니, 한창 나이에 몇 해 공들였던 그 논문, 내 문명사 공부의 출발점이 된 그 논문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조금 정리해 출판할 생각을 굴려보다가,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종이책까지 만들 것 없이 이 블로그에나 남기자는 생각으로 원래 내용 그대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올려놓은 것을 보고 연구자 몇 분이 이런저런 의견과 관련 정보를 보내주었다. 그에 따라 그 분야의 최근 연구성과를 살펴보니, 학계의 연구동향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에 접어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7세기 예수회의 중국선교는 학술분야의 교류에 큰 비중을 두었고, 이것을 발판으로 중국과 조선에 "西學"이 일어났다. 서학은 산업혁명을 앞둔 시점에서 동서문명의 접촉-교류가 급격히 늘어난 현상이므로 서양의 힘이 동양을 압도하는 "서세동점" 현상이 일어나기 전 동서문명 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창문이다. 19세기 이후 유럽문명을 인류문명의 표준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가 세상을 풍미하다가 이제야 걷히기 시작하고 있는데, 균형 잡힌 시각을 새로 세우는 데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서학이 큰 참고가 될 수 있다.

 

근세 초기 동서문명교섭사라 할 예수회 선교사업과 서학에 대해서까지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이 오랫동안 적용되어 왔다. 선교사들이 우월한 문명을 전해주었는데 깨인 사람들은 그것을 적극 수용했고 몽매한 자들은 그것을 배척했다는 식이다. 서양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동양 지식인들도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이 확신을 벗어나는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이 20세기 후반을 통해 점차 확대되어 왔지만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대세는 바뀌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 주제를 주목하게 된 것은 자크 제르네의 1982년 책 Chine et christianisme: Action et réaction 에 접하면서였다. 그 전까지 서양사의 맥락에서만 고찰되던 예수회 중국선교를 중국사의 맥락에서 살필 가능성을 제시한 책이었다. 내 학위논문은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인식 수준과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제르네의 제안을 뒷받침하려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조선 서학까지 고찰 범위에 넣으려 했는데 당시 학과장이 "왜 동양사 논문에 한국사 내용을 넣으려 하느냐?"고 반대하는 바람에 마테오 리치의 활동만으로 범위를 좁히게 되었다. 조선 서학에 관한 논문도 두 편 썼지만 해외에서만 발표하게 되었다.

“Western Studies and Confucian Responses in 18th Century Korea” in T. H. C. Lee, ed., China and Europe: Images and Influences in Sixteenth to Eighteenth Centuries (Hong Kong, 1991)

“Development of Shilhak and Western Studies in 18th Century Korea” in Edward J. Malatesta and Yves Raguin, eds., Images de la Chine : le contexte occidental de la sinologie naissante (San Francisco, 1995).

제르네의 제안이 관련 학계에 큰 충격을 던졌으므로 그 방향의(중국사의 맥락에서 초기 동서문명교섭사를 바라보는) 연구가 활발하게 나올 것을 나는 기대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연구성과를 지난 겨울에 훑어보니 예상 외로 적었다. 그 동안 중국의 국력 신장과 서양식 근대문명에 대한 반성 등 여건 변화를 감안하면 교섭사의 관점이 크게 바뀌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이 분야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가 아직도 많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한일과학사세미나 강연에서 (http://orunkim.tistory.com/1691) 밝힌 것처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중국의 관점"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문학 분야는 중국에서 아직 충분한 자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중국천주교회와 교황청 사이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 작용해 온 것은 아닐까?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서양 연구방법과 이론을 배워가기 바쁘던 중국 사회과학계에서 지금은 사회과학의 발전 방향을 선도해 가는 움직임을 보이기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정말 빨랐다. 인문학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제부터 일어난다면 사회과학계보다 더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초기 문명교섭사 관련 연구가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과 교황청 사이의 관계 변화도 불원간의 일로 예견되는 시점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구활동으로 돌아갈 뜻을 굳혔다. 문명교섭사에 대한 서양 중심의 관점이 풀릴 때, 그 반작용으로 지나친 중국 중심의 관점이 일어날 개연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는 중국문명의 주변부에 있던 조선의 서학 연구가 시각의 균형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구 분야와 주제라면 연구자에게 정말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이다. 내가 왜 마다하겠는가?

 

이런 뜻을 알게 된 한국과학사학회 후배들이 모두 환영해 주었다. 꽤 역량 있는 선배 한 사람이 연구활동을 외면해 온 데 대한 서운함이 깔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전북대 과학문명학연구소 신동원 소장이 열렬히 환영하며 자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등록해 주고 연구활동 지원 신청을 권해주었다.

 

그런데 첫 지원 신청에 낙방했다.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 지원사업에 2년간 지원을 신청했는데, 지난 월말 발표된 선정 목록에 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내 스스로 신기한 것은 낙방에도 불구하고 연구활동에 복귀하려는 내 뜻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내 드러운 성질로는 뭐가 내 맘대로 안 될 때, "에잇, 할일이 딴 게 없어서 여기 매달려?" 하고 집어칠 마음이 들 텐데, 이번에는 "즈그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하는 마음이다. 늙었나?

 

과학사 쪽만이 아니라 교회사 쪽의 환영도 크게 힘이 된다. 조광 교수는 학위논문 준비할 때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마주치며 경의를 품었던 분이라 연구활동을 재개하며 자료 등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상상 밖의 열렬한 환영과 극진한 도움에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내 연구가 교회사 서술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깊이 이해해 주는 것이다. 내 연구가 애초에 과학사 쪽으로부터 방향을 잡아 온 것인데, 우발적으로 발생한 교회사 방면에 대한 함의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니, 내 연구도 그 함의를 추구하는 데 더 비중을 두게 될 전망이다. 그것이 "문명사"의 의미를 더 잘 키우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에 지원을 신청한 작업은 학위논문의 업데이팅과 업그레이딩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 작업 수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그 계획은 접어두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세우고 있는 작업계획은 서학서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인데, 이미 익숙해져 있는 마테오 리치의 저술 범위에서 시작하기가 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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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