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6. 11:44

 

이 계획서의 저술계획과 규모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주제의 독창성과 독자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다지 창의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에 대한 연구업적은 사실 중국과 일본, 중국 더 나아가 서양 쪽에서도 많은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별도로 동아시아 서학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문저술 출판은 사실 연구기간 그리고 연구역량이 상당히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또한 그로 인해 새로운 독창적인 저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서를 볼 때 학문발전 공헌도가 미약한 편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서학을 논할 때, 일본의 서학을 빼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계획서를 작성한 필자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면, 중국 명청사에 관한 전문 연구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중국 근대사 내지 동아시아 서학 전반에 걸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사 관련, 그것도 근현대에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최근 5년간 연구활동 또한 연구재단의 업적을 살펴보면, 이 계획서와 연관한 실적이 미흡하다. 연구자의 연구업적과 주제는 연관성 약하며, 연구성과를 볼 때, 동아시아 서학과 관련한 연구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월 한국연구재단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신청한 "예수회의 중국선교와 동아시아의 서학"의 심사 종합의견이다. 심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종합의견을 공시하는 것은 물론 좋은 제도다. 나도 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인 학술진흥재단의 지원 과제 심사에 참여할 때 심사 자체 못지않게 종합의견 잘 작성하는 데 공들이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내 신청에 대한 종합의견을 읽으면서는 공정한 심사를 받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낙방을 작정해 놓은 뒤에 억지로 이유를 꿰어맞춘 느낌이다.

 

맨앞에서 "창의성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보라. 예수회의 중국 선교와 동아시아 서학에 대한 연구성과가 외국에서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내가 1985년 이 분야 연구를 시작해 몇 해 사이에 조선 서학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국제학회에서 발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은 것은 국제학계에서 최소한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 아닌가.

 

그 연구를 계속해 1993년까지 학위논문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인식과 보유역불론"을 작성하고 심사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전공이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구분되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나는 학부 때부터 동양사를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에는 한국이 포함된다. 그런데 중국과 조선의 서학을 함께 고찰하려던 애초의 연구계획서가 학과장에게 거부당했다. 동양사 학위논문에 한국사 주제를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 동양사를 전공한 학과장의 거부 이유였다. 그래서 국제학계에까지 발표해 온 조선 서학 연구를 접어놓고 마테오 리치로 주제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 과정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문제 제기가 많아서 나는 통과를 아예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결국 학위를 받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내가 소속한 학회는 동양사학회와 과학사학회 둘이었는데 서울대에서 민두기 교수와의 사제관계를 거부한 후 동양사학회에서는 활동이 불편해 발길을 끊고 지내다 보니 소속감이 전혀 없게 되었다. 종신회원으로 등록했던 것 같은데, 나도 학회 들여다볼 일이 없고 학회에서도 내게 연락한 일이 없다. 위에 올린 "종합의견"을 보니 동양사학회 쪽에서 나온 의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학위논문 통과 후 제도권 학계에 넌덜머리가 나서 공부하는 "學人"의 자세는 지키되 제도적 틀에 맞추는 "學者"의 위치에는 집착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학계를 떠나 내멋대로 공부하며 20여 년을 지냈다. 그러다 노망날 때가 되어서야 철이 들었는지, 격식 있는 연구활동을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으니 과학사학회 후배들은 진심으로 환영해주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지난 3월 한일과학사세미나라는 중요한 자리에서 발표할 기회도 만들어주고 연구활동의 여건을 갖춰주려 애쓴다. 말하자면 내가 해온 공부에서 "울거먹을" 게 있다고 보는 거다.

 

반면 동양사학계에서는 내 공부를 울거먹을 필요를 느끼는 기색이 없다.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내 근년의 저술 업적을 놓고, 동양사 공부와 아무 관계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양사 논문에 조선 서학을 넣으면 안 된다고 하던 20여 년 전의 학과장님처럼. 나는 한국을 포함하는 동양문명권의 역사적 진로를 꾸준히 더듬어 왔고, 근년의 한국근현대사 관계 저술은 그 표현의 일환이다. 그것을 놓고 한국사 연구자 중에는 시야를 넓혀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동양사 연구자 중에서는 현실과의 관련성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해 주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 분야에서는 이 사회의 진로에 참고할 의견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다. 동양사 분야는 한국사 분야보다 적기는 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자원을 누리고 있는데, 왜 쓸모있는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가. 나와바리 때문이고 철밥통 때문인가.

 

같은 사업에 지원한 다른 이들의 계획서를 보지 못했으니 내 신청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많아서 내가 배정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계획서에 대한 "종합의견"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이런 말. "이 계획서를 볼 때 학문발전 공헌도가 미약한 편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서학을 논할 때, 일본의 서학을 빼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서학"? "서학"이란 1583년 중국에 입국한 마테오 리치가 1595년경 한문 저술 출판을 시작한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작성한 "서학서"를 발판으로 이뤄진 학풍이다. 일본의 기독교 선교는 1540년대에 시작되어 한 때 큰 규모에 이르렀다가 1590년대 이후 박해가 시작되면서 쇠퇴했다. 16세기 일본의 선교사업에는 "서학"이란 이름이 붙을 만한 학술적 활동이 따르지 않았고, 17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란가쿠(蘭學)"는 중국, 조선의 서학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학술연구 지원을 위한 공적 자금의 통로인 한국연구재단 사업의 심사를 맡았다면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계획서를 작성한 필자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면, 중국 명청사에 관한 전문 연구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같은 대목을 보면 명청사 연구자라야 지원 받을 자격이 된다는 생각인 모양이고 자신은 명청사 연구자라고 자임하는 모양인데, "일본의 서학" 운운 하는 것을 보면 그 자격도 의심스럽다. 중국에도 서학이 있고 조선에도 서학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당연히 서학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식견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사업의 심사를 맡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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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